박범훈 작곡가 (70·조계종불교음악원 원장)

 

박범훈 작곡가는…중앙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일본 무사시노 음악대학과 대학원에서 작곡과 음악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 중앙대학교 서울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또한 우리 음악의 정체성 확립과 세계화에 뜻을 두고, 음악과 관련한 철학과 불교연구로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휘자와 작곡가로서 86아시안게임 개막식 작곡 및 지휘를 시작으로 88서울올림픽, 2002한ㆍ일 월드컵 개막식 음악 등에 참여했다. 국립국악관현악단, 중앙국악관현악단, 아시아민족악단 등을 창단해 인재양성 및 우리 음악 대중화에 기여했다. ‘붓다’ ‘부처님 오신 날’ ‘날마다 좋은 날’ 등 다수의 찬불가를 작곡했으며, '한국불교음악사 연구' '작편곡을 위한 국악기 연구' 등의 저서가 있다. 중앙대학교 총장을 비롯해 한ㆍ아세안전통음악위원회 위원장,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수석, 청와대불자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국민훈장 석류장, 조계종 불자대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인상 등 다수 수상했다. 사진=박재완 기자

이어지는 음악과의 인연
초교 때, 풍금소리에 매료
중교 합주부에서 트럼펫 시작
남사당 만나 국악과 인연
“국악은 불교음악 그 자체”
고교 때, 국악의 거장들 만나


평생 우리 찬불가를 위해 살고 있는 음악가가 있다. 그는 국악이 ‘불교음악’이라는 사실을 일찍이 알았으며, 그 사실에서 출발한 음악가였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사실과 세상이 알고 있는 사실이 달랐음에 그의 삶은 늘 안타까웠다. 그래서 그는 우리 찬불가의 정체성을 찾고 찬불가의 대중화와 생활화를 위해 살았다. ‘붓다’, ‘찬미의 노래’, ‘부처님 오신날’, ‘날마다 좋은 날’ 등 우리 귀에 익은 찬불가를 지은 작곡가 박범훈 조계종불교음악원 원장이 그이다.

풍금소리가 좋았던 소년
박 원장은 1948년 경기도 양평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먹을 것, 보고 들을 것, 놀 것이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박범훈의 마을 역시 그랬다. 소년 박범훈은 어느 날, 학교에서 풍금소리를 듣게 된다. 초등학교 4학년 음악시간이었다. 처음 듣는 담임 선생님의 풍금소리에 소년은 온 마음을 뺏겼다. 박 원장은 풍금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음악시간이 즐거웠다. 박범훈은 음악에 소질이 있었다. 박범훈을 알아본 선생님이 박 원장에게 풍금을 가르쳤다. 그때부터 박 원장은 음악에 대한 꿈을 품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음악에 대한 소질이 있다며 저에게 음악에 대한 꿈을 심어 주셨죠. 아마도 그것이 내 음악인생의 시작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학예회의 연극 등에서 음악에 대한 자신의 소질과 끼를 보게 된 박 원장은 음악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고, 실천하기 시작한다. 그는 중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밴드부(합주부)에 들어가서 트렘펫을 시작한다. 

인연의 소리, 남사당을 만나다
트렘펫으로 한창 음악에 대한 열정을 태워가고 있던 박 원장은 ‘남사당’을 만난다. 박 원장의 음악 인생은 ‘남사당’을 만나면서부터 구체화 된다. 때는 남사당이 쇠퇴기에 들어선 때였다. 신파극과 영화 등 새로운 볼거리의 등장으로 인해 남사당은 점점 설 곳을 잃어가고 있었다. 안성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남사당은 박 원장이 살고 있는 양평 마을에 새롭게 정착했다.
남사당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악기도 가르쳐주고 소리도 가르쳐주었다. 박 원장은 그 때 우리의 소리, ‘국악’을 알게 된다. 남사당의 꼭두쇠(대표)인 남운용의 부인 박계순이 박 원장을 알아보았다. 종씨라는 프리미엄까지 있어 박계순은 소년 박범훈을 각별하게 대했다. 박 원장은 그로부터 국악기를 배우고 국악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음악에 대한 꿈을 한 층 더 구체적으로 키워갈 수 있었다.  
“학교 밴드부에서 트렘펫을 부는 것만으로는 큰 그림을 그릴 수 없다. 나와 함께 서울로 가서 음악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학교에 진학하는 게 좋겠다.”
박 원장은 중학교를 마치고 박계순의 지도와 소개로 당시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한다. 스승들이 어마어마했다. 최고의 작곡가 김동진 선생이 가곡을 가르쳤고, 김희조 선생은 음악 이론을, 박귀희 선생은 병창을, 성금련, 김윤덕 선생은 가야금을, 그 외에도 기라성 같은 스승들이 넘쳤다. 이 때 박 원장은 국악에 새롭게 눈뜬다.
“우리의 음악인 국악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고, 공부할 수 있었어요. 대부분의 음악이 불교에서 온 것들이었어요. 국악은 ‘불교음악’ 자체였어요. 제목부터 그랬어요. ‘염불’, ‘영산회상’, ‘탑돌이’ 등등 찬불음악이 국악의 전부라고해도 틀리지 않았어요.”
박 원장은 중학교 밴드부에서 트렘펫을 배웠지만 국악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게 되면서부터 국악과 불교음악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게 되었다. 박 원장은 이 때 국악의 대가들을 대거 만나게 된다. 그 만남들 자체가 그에겐 깊은 공부가 되었고, ‘행운’이었다. 게다가 박 원장은 우리의 음악에 누구보다 빠른 흡수력을 보였다. 국악과 불교음악에 대한 훗날의 그의 행로와 원력은 이 시절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훗날 서양음악을 공부하고 나서도 국악과 불교음악을 놓지 않았던 것은 그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먼 길을 걸어 불교를 만나다
박 원장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민속예술단에서 음악담당으로 활동하며 멕시코 올림픽 등 여러 국제 행사에 한국 대표로 참여한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고 어느 날, 박 원장은 학업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직업인으로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지만, ‘음악’에 대한 성취는 없었다. 그는 학업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중앙대학교 작곡과에 진학한다. 그리고 긴 수학의 시간이 시작된다. 박 원장은 누구보다 긴 수학의 세월을 보냈다. 학부를 마치고도 9년 동안 일본 유학에서 학부를 다시하고 석사를 마쳤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강단에 서기 위해 다시 5년 동안의 박사 과정을 거쳤다. 긴 세월이었다. 그 긴 세월을 살게 한 것은 박 원장의 중심을 떠나지 않은 테마, ‘우리의 음악’이었다. 
박 원장은 긴 세월을 웅크린 만큼 음악가로서의 배고픔이 누구보다 진지했다. 그 동안 작곡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그 동안의 음악은 박범훈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일본 유학을 마친 그는 이제 박범훈의 ‘곡’을 쓰고 싶었다. 곡을 쓰기로 마음먹은 그에게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조용한 절’이었다. 당시 그는 불자가 아니었다. 그저 그곳에서 곡을 쓰고 싶었을 뿐이었다. 수소문 끝에 그는 쌍계사의 말사 국사암과 인연을 맺는다. 그 인연은 박 원장에게도 우리 국악과 불교음악에게도 큰 인연이었다.
국사암의 본사인 쌍계사는 진감국사가 830년 중국 당나라에서 범패를 배워와 최초로 범패를 전파한 불교음악의 본사다.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박범훈이 처음 인연을 맺은 곳이 국사암이라는 것을.

놓을 수 없는 불교
서양작곡 전공했지만 결국 찬불가
일본 유학 등 오랜 세월 수학
논문 〈불교음악의 전래와~ 〉
한국불교음악의 교과서로 불리며
〈한국 불교음악사 연구〉로 출간

국사암에서 도량석 듣고 감화
“도량석은 진정 기다렸던 소리”
찬불가 ‘붓다’, 찬불음악 새 장
‘보현행원송’ ‘부처님오신날’ 등
대중화 위한 찬불가 40여 년 발표
옥중서 휴지에 ‘니르바나’ 작곡
6월 1일 공연서 초연 예정
“여생 찬불가 하면서 살고 싶어”  

 

꿈속의 도량석
국사암에서의 첫날 밤. 박 원장은 꿈속에서 노래 소리를 듣는다. 꿈결에 들려오는 그 소리는 낯설지가 않았다. 새벽 4시, 낮에 인사를 나누었던 상훈 스님이 도량석을 돌고 있었다. 상훈 스님의 목소리도 일품이었지만 초겨울 새벽에 듣는 도량석 소리는 만물을 깨우는 소리라기보다는 죽음을 맞이한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빌어주는 소리 같았다.
“그 때 상훈 스님의 도량석을 듣는 순간 많은 것들이 나를 지나갔어요. 그 동안 받아들였던 음악적 동기들이 그 소리를 기다려온 것 같았어요. 진정 내가 만나고 싶었던 ‘소리’였어요.”
그랬다. 그 후로 작곡가 박범훈이 오선지에 올린 음표들은 모두 그 ‘소리’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박 원장은 도량석을 마친 상훈 스님을 따라 법당으로 들었다. 처음 보는 새벽예불이었다. 박 원장은 신기했다. 왜 진작 이런 소리를 만나지 못했을까. 이어지는 예불소리는 또 한 번 박범훈을 훑고 지나갔다. “지심귀명례…” 그것은 음악이었다.

다시 공부, 이번엔 불교공부
“불교음악을 하기 위해선 불교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불교를 모르고 지은 찬불가는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국사암에서 상훈 스님의 도량석과 예불문을 들은 후 박 원장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박 원장을 다시 수학의 길을 걷게 했다.
당시 그는 국립국악관현악단 초대 단장 겸 예술감독을 지내고 있었다. 공연이나 연습이 없을 땐 극장과 가까운 동국대를 찾았다. 그리고 점점 면학에 대한 원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는 얼마 후 신설된 박사과정인 예술철학 분야에서 불교와 불교음악 공부를 시작한다. 그는 한국불교음악사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찬불가를 쓰기 시작한다.
연구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점점 커져만 갔다. 그의 원력도 커져갔다. 그는 연구 중에도 꾸준히 찬불가를 지었다. 그 원동력 중의 하나가 불교학자 목정배 교수였다. 목 교수는 학자 이전에 시인이었다. 목 교수가 시를 지으면 박 원장이 곡을 붙였다. 그대로 찬불가였다. 그 음악들은 지금도 대중들이 듣고 부르고 있다.
연구와 창작에 매진한 그는 5년 만에 한국불교음악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논문 〈불교음악의 전래와 한국적 전개에 관한 연구〉를 완성한다. 달마의 소리가 동쪽으로 간 이유, 그리고 그 달마의 소리가 어떻게 한국적으로 변했는가를 밝혀낸 논문이었다. 그는 “국사암 도량석에서 시작된 불음의 인연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고 했다. 그리고 논문은 〈한국 불교음악사 연구〉로 묶어져 한국불교음악의 교과서가 된다. 그리고 한국불교음악사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2013년 불자대상에 선정된다.    

‘부처님오신날’ 등 34곡이 수록된 음반 ‘박범훈 뭇소리 찬불가’ 2014년 발표.

 

새로운 찬불가의 시대를 열다
1987년 우리나라 최초로 순수 민간 국악관현악단인 ‘중앙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하는 등 연주자, 작곡가, 지휘자로 활동하며 우리 국악계를 대표하는 음악인으로 영역을 넓혀가던 그는 1991년 새로운 찬불가, ‘붓다’를 발표하며 찬불음악의 새로운 시대를 연다. 그리고 광덕 스님의 요청으로 만든 국악교성곡 ‘부모은중경’을 비롯해 ‘보현행원송’, ‘꽃을 바치나이다’, ‘무상계’ 등 찬불가와 대형합창곡들을 이어서 발표한다. 한국불교음악이 전개된 역사적 배경과 그 본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박 원장이었다.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까지, 박 원장은 그 과정과 성과, 정체성 등에 대해 공부해왔다. 그는 이 시대의 우리에게 필요한 찬불가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실생활에서 대중이 쉽게 부를 수 있는 찬불가를 만드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찬불가라고 생각했다.
“현재의 찬불가 중에는 불교음악의 정체성을 제대로 투영하지 못한 곡들이 많지만 그것은 역사적인 불가피성으로 인해 제대로 전승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시대적 배경으로 인한 어쩔 수 없었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시절 속에서도 찬불가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한 선지식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역사라도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저와 같은 음악인들이 제대로 된 불교공부를 하고 그 과정 속에서 제대로 된 찬불가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후로도 ‘찬미의 나라’, ‘부처님 오신 날’, ‘날마다 좋은 날’ 등 수많은 찬불가를 발표했다.

뜻밖의 시련, 시련이 가져다 준 불심
2015년 박 원장은 뜻밖의 시련을 만난다. 그는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수석을 지냈는데, 재직 시 뇌물을 받고 중앙대에 특혜를 제공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고, 징역 2년의 실형을 받았다.
“사법부의 판단은 어쩔 수 없이 제가 받아들여야 하는 시절의 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부덕함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 양심에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았다는 말씀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저로 인해 불교계나 중앙대 등 그 동안 저에게 언덕이 되어준 사부대중께 심려를 끼친 점이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박 원장은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억울한 일이지만 그것 또한 자신이 받아들여야 하는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어느 곳에나 부처가 있었어요. 옥중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 소중한 삶을 짊어진 중생들이었어요. 누구에게나 배울 것이 있었어요. 나와 세상을 다시 볼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그리고 밖에서 들려오는 불자들의 성원의 소리는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는 큰 힘이 되었어요.”
그는 그렇게 어려운 시간을 부처님과 대중의 고마운 마음으로 겪어내며 힘든 시간을 오히려 수행의 시간으로 삼았다. 그는 그 마음을 음악으로 옮겼다. 그는 옥중에서 찬불가를 지었다. 휴지에 오선지를 그리고 음계를 그렸다. 그리고 출소한 후 그 곡들을 완성시켰다. 그 중 한 곡이 6월 1일 예술의전당 공연에서 마지막 곡으로 선보일 20분짜리 합창곡 ‘니르바나’이다.
형을 마친 그는 지난 해 7월 재가자로는 처음으로 조계종불교음악원 원장에 임명됐다.
“불교음악원은 앞으로 예불음악을 비롯해 생활찬불가에 이르기까지 연구와 교육, 실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우리 불교음악의 정체성을 찾고 불교음악을 발전시켜나가기 위해 진력할 것입니다.”
그는 여생을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찬불가 하면서 살겠다고 했다. 힘겨운 시간을 보내며 부처님과 함께 걱정해준 사부대중을 생각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두 말할 것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오고 있다. 연등 불빛과 함께 그의 노래 ‘부처님 오신 날’이 벌써 들려오는 듯하다.

 

2002년 11월 2일 국립극장 해오름 극장. 한·중·일 아시아민족악단 공연에 지휘하는 박범훈.

 

 

녹음실에서 찬불가를 녹음하고 있는 박범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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