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사형수 김무경

친하게 지낸 이웃집 아이 유괴 살해
순간적으로 이성 잃고 큰 죄업 지어

1992년 8월, 유난히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로 기억된다. 당시 내가 주지로 있던 서울 자비사 포교당에 한통의 편지가 날아온다.

“삼중 스님, 이제와서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하나밖에 없는 아들 자식을 그렇게 죄인으로 만든 것도 다 제가 잘못한 탓이려니 뉘우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 소중히 생각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저는 그 아이를 자식이면서도 먼저 일찍 세상을 떠난 남편 대신 의지하며 20여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만일 그 아이가 잘못된다면 저도 살아갈 희망이 없어집니다. 혀를 깨물고 자진하려 했던 적도 많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 아이 얼굴이라도 볼 수 있기에 희망을 갖고 사는데, 부디 사형만은 면하게 구명운동이라도 해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유괴살인을 저질러 당시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23살의 사형수 김무경의 어머니가 보낸 절박한 내용의 서신이었다. 김무경은 4대 독자 외아들이었다. 위 편지에도 소개됐지만, 그의 어머니는 김무경 하나만 보고 살았다. 하지만 그는 한 여인을 만나 평범했던 운명이 바뀌었다.

대학생이던 그는 첫 눈에 반한 한 여자를 지독히도 사랑했다. 그녀가 비록 유흥업소에서 일했지만 그에겐 직업과 신분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 눈에는 자신의 아들이 감당할 만한 여자가 아니라는 걸 처음 보는 순간 직감했다. 어머니의 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김무경은 급기야 집을 나가 그녀와 동거에 들어갔다. 그녀가 일하러 간 사이 김무경은 혼자 집에서 보냈다.

무료함을 달래려 집 앞 놀이터에 가끔 나가면서 한 어린애와 유독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애와 집에서 좀 멀리 떨어진 약수터를 가게 됐는데 난데 없이 따라가겠다고 한 어린아이가 “형 지금 나 유괴하는 거야?”라고 말하자 김무경은 배신감에 화가 치밀었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잘해줬는데 유괴범 취급을 하자 김무경은 “그래 너 어디한번 진짜 혼나봐라”라고 마음먹고 진짜 유괴를 하게 된다.

이 사건을 접하고 정말 세상에 전생의 업이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착한 사람이 순간적 악성을 갖고 이성을 잃으면 더욱더 무섭게 돌변할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집으로 아이를 데리고 온 김무경은 그 아이의 옷차림이 말끔하고 부자집 애같자 욕심이 생겨났다. 그의 애인과 함께 그 아이의 집에 전화를 걸어 부모에게 2천만원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의 부모가 유괴임을 알고 경찰에 신고해 김무경은 자신의 집에서 체포됐다. 이미 그 어린아이는 죽은 뒤였다. 계속 집에 보내달라고 울고 소리치자 목을 졸라 살해한 것이다.

유괴는 큰 중죄이므로 당시 사회분위기상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대부분 사형을 언도 받는다. 구명 운동도 소용이 없었다.

김무경이 잡히자 그의 애인이 나를 찾아와 “옥중 결혼을 하면서라도 평생 무경이를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결국 사형을 면할길이 없음을 안 그녀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떠나갔다.

이 사실을 안 김무경은 감옥서 자해를 시도하고 난동을 부렸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나를 찾아와 무경이를 달래고 진정시켜 달라고 부탁해 그를 서울구치소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도망간 여자에 대한 배신감으로 발악을 했다. 그도 책임이 있다며 떠나간 애인에 대한 원망과 불만을 털어놨다. 사실 그를 처음 본 느낌은 교화할 필요가 없는 부처님 같은 불성을 갖고 있는 너무 순진무구하고 천진한 젊은이었다. 거기다가 이후에 그가 보내준 수많은 편지를 보면서 문장력이 뛰어난 친구라는 걸 알았다.

나는 흥분된 그를 진정시키고 설득했다. “어머니 가슴을 저리게 만들면서 까지 목숨걸고 사랑했던 사이인데, 너를 배신했다고 해코지 할 일이 뭐가 있느냐고 조용히 참회하고 사나이답게 죄값
을 치르고 순응하라”고 다독였다. 그러자 그는 누그러지며 죽는날까지 매일 참회 기도를 했다. 아들의 사형만은 면하게 하려고 어머니가 피해자 아버지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자 그 아이의 아버지는 더욱더 기구한 사연을 떨어놨다. “60세에 어렵게 얻은 눈에 넣어도 안아픈 아들”이라며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건물 수위를 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분이었다고 한다. 너무도 딱한 사연들이었다.

김무경은 결국 사형이 언도됐다. 하지만 그는 여느 다른 사형수보다 더 안타깝고 슬프게 집행됐다. 보통 당시 사형 집행은 오전 10시에 시작을 한다. 그래서 정오가 되면 거의 집행은 끝난다.

점심 이후에는 사형이 집행되는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김무경은 점심식사가 방에 들어와 막 한숟갈 입에 넣는데 사형장으로 불려 나간 것이다. 아마도 집행되는 숫자가 많아서 밀려서 그러지 않았나 생각된다. 입술에 밥을 한술 떠 넣는데 사형장으로 나간 예는 드물다. 참으로 슬프게 간 경우다. 당시 언론에도 보도될 만큼 기구한 최후를 맞았다.

“지금이라도 내가 대신 죽을 수 있다면 내 아들 대신 이 자리에서 죽을 수 있습니다. ”고 할 정도로 그의 어머니는 절박한 마음으로 매달렸지만 김무경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나는 그가 떠난 뒤 그가 만일 분수에 맞는 여자를 사랑했으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걸 하는 안타까운 마음 때문에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김무경은 그동안 어머니 말이라면 한번도 거역하지 않을 정도로 효자였지만, 분수에 맞지 않는 인연을 만나 온 가족이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물론 전적으로 그의 잘못과 업연으로 생긴 일이었지만 말이다. 내가 만난 사형수중에서 그는 가장 심성이 착하고 천진해서 기억이 많이 난다. 당시 또래의 젊은이 같지 않고 정말 끔직한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돈을 갖고 오라고 엄마 목을 누르지, 왜 어린애 목을 눌러서 이런 불행한 일이 생기게 만드냐. 그러면 집이라도 팔아서 어미가 네가 돈을 줬을 것 아니냐”라고 오열하는 그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순진한 청년의 몸에 맞지 않는 어긋난 사랑이 이런 엄청난 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김무경 어머니가 삼중 스님에게 보낸 편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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