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다송 저술 배경 확인되는 서간문

북산도인 변지화가 초의에게 보낸 서간문. 초의가 1838년경 금강산을 유람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겼다.

조선 후기 관료 변지화는 초의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북산도인(北山道人)이란 호를 썼으며 1832~1837년경까지 진도목사를 지냈고 홍현주(1793~1865)의 별서를 출입했던 사람이지만 그의 생애를 조명할 자료는 초의와 주고받았던 몇 수의 시문이 남아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그가 1832년경 진도목관으로 부임된 후 초의를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가 1838년 7월,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 “해옹(홍현주)의 정사에서 서로 헤어지고 나서 마음은 작은 배에 실려 남으로 가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변지화와 초의가 만난 시기는 이미 1831년경 해거도인 홍현주의 청량산방이었음이 드러난 셈이다.
이밖에도 두 사람의 교유 흔적은 〈초의시고〉에도 남아 있다.

초의와 동시대를 산 변지화
주고받는 시문 몇 수가 남아
동다송 첫 표제‘ 동다행’ 확인
佛·儒 교유, 초의 저술 영향


바로 1832년경 초의가 변지화의 시에 화답한 수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실제 이들의 교유는 1831년경에 처음 만난 이후 변지화가 진도 목관으로 부임한 1832년경이 후 더욱 내왕이 잦았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특히 1838년 7월, 그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는 전형적인 간찰 형식을 갖춘 편지인데 크기는 24.9×39.5cm이다. 이 편지의 상단에 “초의스님 앞에 삼가 올립니다(草衣上人雲榻回敬)”라고 썼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서술되었다.

한번 해옹(홍현주)의 정사에서 서로 헤어지고 나서 마음은 작은 배에 실려 남으로 가려고 합니다. 얼핏 풍문으로 듣자니 두현(斗峴)에 머물며 옥강정(玉江亭)에서(시를)읊조린다고 하니 나처럼 문체도 없고 이룸도 없는 사람은 곁에 자리할 수도 없으니 공연히 부러워할 뿐입니다. 제가 벼슬을 그만 두고 나니 모든 일은 뜬 구름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벽에 제(題)하길 ‘해향 천리로 잠시 관직에 나갔더니 인정이 다하자 이가 시큰거립니다. 한번 나의 집에 누우면 피안에 이른 듯하니 남은 생은 솥에 단약을 요리하련다. 달포 전에 새로 손자를 얻어 늙어 가까이 노니 그 즐거움 잡을 만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우스개로 부(賦) 일절을 지었습니다.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마음 가는 대로 뜰 가득 꽃을 심었네.
처음 품에 안은 건장한 손자,  보는 것으론 부족해
담장 끝 언덕, 사모(紗帽)한 이에게 술 가져오라 하네.

비록 곡조를 이루지 못했으나 애오라지 그대로 스스로 즐겁습니다. 경파(옥같이 아름다운 꽃)두 절은 반도 읽지 못했는데, 산 기운 서늘하고 맑은 샘 향기가 풀풀 종이에 피어나니 더러운데 앉아 있는 것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난번 넓은 대축(大軸)은 더욱 놀랠 절구임을 알겠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정말 다리 위에서의 이별은 사람으로 하여금 암담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또한 가을을 기다렸다가 풍악(금강산)을 유람하고 영남으로 가는지, 그런 후 대둔사(大芚寺)로 가셨는지요. 동쪽과 서쪽 끝에서 어떻게 손을 잡을 방법이 있을까요. 면할 수 없으니 돌돌.“ 하늘 끝에 미인을 사모한다(望美人天一方 )”는 여섯 글자는 돌아가 정양선생에게 말하시길 바랄뿐입니다. 전령이 서서 재촉하기에 다 말할 수가 없군요. 1838년 7월 12일 북산인 변지화 삼가 올립니다.
草衣上人雲榻回敬
一自海翁精舍分袂 意謂杯蘆浮南 仄聞住錫斗峴 唾玉江亭 如我無文無致者 不敢側席 而徒有健羨而已 僕自從解? 萬事如浮雲 故題壁 以海鄕千里 暫爲官閱 盡人情齒欲酸 一臥吾廬 如到岸 餘年料理鼎中丹 月前得新孫 楡景含飴 其喜可? 戱賦一絶曰
 官還于吏身還家
 隨意移栽滿院花
 新抱?孫看不足
 墻頭呼酒岸中紗
雖不成腔 聊以自樂 瓊?二絶 讀未半 山氣泉香 拂拂從紙上生 不知坐在塵埃中 比向日廣泮大軸 尤覺警絶 雖然 此別誠河梁 能令人得無?然耶 此亦待高秋 擬作楓岳遊 轉向嶺南 然 去大芚 東西涯角 那有奉握之道耶 免不得?? 望美人天一方 六個字歸語晶陽先生望耳 萬萬 使价立促 不能盡述 戊戌 七月 十二日 北山人 謹謝

이 편지에서 몇 가지 중요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으니 이는 1831년 홍현주의 별서에서 처음 만났다는 사실이다. 또한 초의가 1838년경 금강산 유람한 내용이 이 편지에서 확인된다. 당시 초의는 수홍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했는데 금강산을 유람하기 위해 상경한 초의를 위해 유산 정학연은 초의와 인연이 있는 명사를 불러 긴 여정을 떠나는 초의를 격려했다. 변지화도 이런 소문을 익히 듣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기에 “얼핏 풍문으로 듣자니 두현(斗峴)에 머물며 옥강정(玉江亭)에서(시를)읊조린다고 하니”라고 말한 것이다. 그가 말한 두현은 바로 마현이다. 유산 정학연이 거주하던 곳이다. 당시 초의는 수종사에 머물며 경화사족들과 즐거운 시회를 열어 서로의 높은 뜻을 공유했던 것이다.

한편 변지화는 1838년경 진도 목사의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상황적으로 이 시회에 참석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초의에게 지은 시를 보내 자신의 뜻과 이상을 공유하고자 했으니 이는 “지난번 넓은 대축(大軸)은 더욱 놀랠 절구임을 알겠습니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서로의 향상을 빌었던 이들의 우정은 유불 교유의 아름다운 흔적이라 하겠다.

북산도인 변지화가 초의에게 보낸 서간문. 이를 살펴보면 초의의 명저 '동다송'의 저술 배경과 첫 표제가 '동다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양 신태희(晶陽申泰熙)는 해남 현감을 지냈던 인물로, 초의와 교유했다. 그의 생몰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무관 출신으로 변지화와도 가까이 내왕했다. 이들의 아름다움 교유의 흔적은 1837년경 변지화가 진도 목사로 재임할 당시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타난다. 변지화가 진도목사 시절 초의에게 보낸 편지는 “화원의 관리가 보내는 글(花源吏 謝狀)”이라 시작된다. 편지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화원리 사장.
묵은해가 바뀌어 새해가 되었습니다. 소식이 막히고 끊어졌지만 스님을 잊지 못하여 한갓 마음만 수고롭게 갈 뿐입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돌아가는 인편에 스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드릴 말씀은 새해 설날에 선체(禪體)가 진중하시다니 어찌 지극히 위로되고 후련해짐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내가 관문 밖에서 새해를 맞으니 나이가 더해짐에 감기까지 심해졌습니다. 나머지는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임기를 마치고 짐까지 다 쌌습니다. 그러나 한번 간다는 약속은 그 사이에 정양이 한양으로 상경하는 바람에 신의 잃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탄식한들 무엇 하겠습니까. 떠날 날짜는 다음달 10일로 이미 정해졌으니 초 2, 3일 사이에 기약하여 소매를 떨치고 약속을 실천할 계획을 세운다하더라도 일이 뜻과 같지 않은 것이 많으니 또한 그 일이 정확하다는 것을 보장하기는 어렵습니다. 〈동다행〉을 한양으로 보낼 때 사람을 시켜 급하게 등사하였기에 지금 보니 잘못된 곳이 많습니다. 질의를 표시해 놓은 것 이외에도 또 착오가 있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보냅니다. 잘못된 곳을 개정하시길 바라며 돌아오는 인편에 다시 보내주길 바랄뿐입니다. 나머지는 이만. 법식을 다 갖추지 못했습니다. 1837년  28일 북산노인(卞持華) 둔
花源吏 謝狀
歲換新舊 信息阻絶 懸望雲水 徒勞神往 非意轉便 獲承手滋 仍新元 禪體珍重 豈勝慰豁之至 俺關外逢新 齒添感? 餘何足道 苽已熟矣 李將治矣 然一造之約 間因晶陽之上洛 未免失信之科 何嘆何嘆 發行日字 以開月旬日已定 期於初二三間 奮袂踐約計 而事不如意者多 亦難保其的然也 東茶行送京時 使人急謄 今覽多誤 懸標質疑而此外 似又錯誤 故 爲付呈 幸望逐處改定 回便 還投是望耳 餘留 不備式 卄八日 北山老人 頓

이 편지는 〈동다송〉의 저술 배경을 밝힌 편지이다. 1837년에 초의는 홍현주의 요청으로 〈동다송〉을 저술했으며 초의에게 홍현주의 궁금증을 전달한 사람은 바로 변지화였다는 사실도 이 편지에서 확인되었다. 당시 변지화는 진도목사에서 임기를 마치고 한양에 올라갈 준비를 끝낸 상황이었고, 정양 신태희와 함께 초의를 만나러 간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못할 처지였다. 물론 이 약속은 정양 신태희가 상경하는 바람에 이행되지 못했던 것이지만 이를 못내 아쉬워한 것은 변지화였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 진도목사 임기를 마치게 될 줄은 몰랐던 듯하다. 한편 이 편지는 초의의 〈동다송〉의 저술 배경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한 편지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인 셈이다.

초의의 〈동다송〉이 처음 저술될 당시에 표제는 〈동다행〉이었다는 사실도 이 편지에서 밝혀진 것인데 그 내력을 살펴보면 이렇다.

초의는 〈동다행〉을 지어 변지화에게 보냈으며 변지화가 다른 사람을 시켜 〈동다행〉 필사하는 과정에서 잘못 필사된 것을 발견하였으며 이 외에도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그가 “〈동다행〉을 한양으로 보낼 때 사람을 시켜 급하게 등사하였기에 지금 보니 잘못된 곳이 많습니다. 질의를 표시해 놓은 것 이외에도 또 착오가 있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보냅니다. 잘못된 곳을 개정하시길 바라며 돌아오는 인편에 다시 보내주길 바랄뿐입니다”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이 편지는 〈동다행〉이 〈동다송〉으로 표제가 변경된 연유가 무엇인지를 밝힌 자료인 것이다. 이뿐 아니라 다도를 알고자 한 홍현주의 뜻을 초의에게 전달한 것도 변지화였으며, 완성본 〈동다행〉을 홍현주에게 전달한 이도 변지화였다는 것이다. 

바로 〈동다송〉는 변지화와 초의, 그리고 홍현주 등 당시 초의와 교유했던 경화사족들의 차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유불의 깊은 교유가 〈동다송〉을 저술하게 한 동인이었음을 밝힌 자료인 것이다. 자료의 중요성은 이처럼 명백하다. 한 장의 편지에서 조선 후기 차문화사의 근저가 되는 〈동다송〉의 저술 배경이 밝혀졌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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