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런 고통 없이, 그런 집념 없이는 깨닫지 못해요
우리가 그런 고통 없이, 그런 집념 없이는 깨닫지 못해요
  • 대행 스님
  • 승인 2018.04.20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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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보배가 바로 나한테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마음공부를 좀 하도록 하기 위해서 수년 동안 불상도 때려 부숴 보고 별짓을 다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여러분과 이렇게 함께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런 고통 없이, 그런 집념 없이는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내 생활과 모든 인류와 전 우주를 이끌어 갈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뭘, 그거 그냥 하는 말이지.’ 하고 생각하시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실질이고 현실세계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이며, 우리가 꼭 해야만 할 일이 그렇게 많답니다.

생사에 관한 건도, 우리가 죽고 사는 문제를 거론한다면 여러분은 뭐, 그냥 ‘그런가 보다’ 하지요. 그러나 벌레가 껍데기를 벗고 알맹이로 화(化)하고 이렇게 하는 거를 보세요. 우리가 껍데기를 벗는다고 해서 아주 죽는 게 아닙니다. 악이면 악대로 선이면 선대로 다시 돌아 나오죠. 그런데 그 선과 악을 벗어나서 부처가 되고 법신이 되고 보신(報身)이 되고, 보신으로서 화해서 응신(應身)이 되고, 그래서 수많은 생명들과 둘 아니게 돌아갈 수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이 그대로 현실입니다.

어둡고 괴롭고 고가 많고 슬프더라도
모두가 내 탓이려니 하고 참고 견디는 그 아리따운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이 우주를 다 얻고도 남음이 있느니라.

그래서 나는 방편이라고 할 때 ‘방편 아닌 방편’이라고 했습니다. 해탈문 아닌 해탈문이고요. 이게 해탈문이라는 이름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이름을 떠나서 그 속에서 알짜가 나오거든요. 우리가 문을 찾아서 공부를 한다면 그 공부는 영원히 못할 겁니다. 마음은 체가 없을 뿐만 아니라 문도 또한 체가 없어서 봇장도 벽도, 멀고 가까움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멀고 가까운 게 없이, 한생각이면 한 찰나에 들고 나죠. 내가 이런 말을 잘하죠. 빛보다 더 빠르다고. 그렇게 해서 한 찰나에 모두 이끌어 갈 수 있고, 또 화하게 만들 수 있고, 바꿀 수 있고, 변하게 할 수 있고, 같이 접근할 수 있고, 둘 아니게 할 수 있는 문제를 모두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이날까지 사람으로 화해서 살아온 본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발전하고 벗어나서 자유권을 얻을 수 있어야만이 남도 자유권을 얻게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사생이, 물에서나 들에서나 공중에서나 이 지상에서나 모두, 생명들이라 하면 다 그래도 뭔가 살면서 경험하고, 그 경험한 대로 진화가 되고, 진화가 되는 반면에 또 바꿔지고 이렇게 해서 등장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반복되면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돌아가는데 우리가 거기서 뛰쳐나오지 못한다면 콩은 콩이지 팥이 될 수는 없어요. 생각하면 아주 기가 막힌 일들이죠. 이것이 현실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이요.

지난번에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요즈음 사람들이 많이 죽고, 지나가던 벌레가 죽기도 하고, 지나가는 구렁이가 죽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 구렁이가, 뱀 하나가 인간으로 환토를 하려면 얼마만큼 고생을 해야 되는 줄 아십니까? 백날을 사람의 행동을 봐야 하고, 사람이 먹는 거를 다, 소상히 사람과 같이 습득을 해야 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사람이 먹는 간장을 다 삼켜야 된단 말입니다. 일곱 번, 세 번을 먹어야 된다 합니다. 이렇게 고통을 받고서 자기 몸을 벗는 것입니다. 그건 왜냐하면 바로 인간과 맞대면해서 자꾸자꾸 접하니까 그 생각 자체가 인간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고 인간과 같은 의식을 얻게 됨으로써 자기 몸을 벗고서 인간 환생을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왜, 태몽을 꾸면 뭐, 토끼를 봤다는 둥, 개를 봤다는 둥, 돼지를 봤다는 둥, 구렁이를 봤다는 둥, 소를 봤다는 둥, 인간을 봤다는 둥 그러죠? 그렇지 않으면 꽃나무를 봤다든가, 또는 배나무를 봤다든가 하는데, 배나무나 꽃나무나 이런 것은 육식 동물로서 생활을 하지 않은 영혼을 말하는 겁니다. 육식 동물로 생활을 하지 않고 채식을 하고 살던 그런 영혼은 꽃이나 과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쁘다 좋다 이걸 떠나서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구렁이는 무슨 뜻이냐? 구렁이는 우리가 평상시에 자고 깨고 먹고 생활하는 그 용(用)을 말하는 거죠. 즉 말하자면, 태몽을 꾸었다 하면 액면 그대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대로니까. 그래서 태몽을 꾸는 어머니의 생각 자체가 크냐 작으냐에 따라서 그대로 그 어린애가 나와서 진출을 하게 돼 있어요. 그 영혼이 오는 것만이 아니라, 와서 한생각에 바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그런 문제가 등장을 하는 거죠. 용(龍)이라고 해서 뱀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또 큰 자손이 된다 이런 생각만 하지 마시고, 용이라는 것은 평상시에 아주 활력적인 생활을 하던 영혼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면 인간 사이에 아주 빛이 돼서 살 수 있는 그런 영혼이 될 겁니다. 우리가 소나 돼지를 봤다고 해서 그냥 액면 그대로 돼지다, 소다 이러지 마시란 얘깁니다. 소가 보였다 하면, 남한테 인정을 베풀고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모두 남을 주었던 영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뭘 봤다 할지라도 그걸 액면 그대로 보지 마시라 이런 뜻입니다.

아주 슬픈 영혼도 있고 즐거운 영혼도 있고, 아픈 영혼도 있고 애달픈 영혼도 있고, 그 영혼이라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눈을 보면 그냥 눈물이 핑 돌기도 합니다. 우리가 나쁜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나쁜 생명들이 어딨겠습니까? 살다가 보면은…, 허허, 문득 그 생각이 또 나네요. 장희빈이 악하다고 했는데, 악하게 만들어서 악하게 모두 당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당한 놈도 없고 준 놈도 없이 그냥그냥 서로가 다 나빠진 거죠.

애당초부터 나쁜 사람이 없어요. 환경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환경에 따라서 그렇게 된다는 거죠, 살다 보니까. 먹고살기 위해서 그렇게 되는데 부처님이 가르치신 것은 “아무리 배고프고 춥다 하더라도 마음만은, 마음만은 근본을 지켜라. 인간의 진짜 진실한 마음을 상실치 말아 다오. 그것을 상실하면은 세세생생 구르면서 조금도 벗어날 길이 없다. 어둡고 괴롭고 고가 많고 슬프더라도 모두가 내 탓이려니 하고 참고 견디는 그 아리따운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이 우주를 다 얻고도 남음이 있느니라.” 하신 거죠.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팔만대장경을 달달 외우고 아무리 이론적으로는 막히는 데가 없다 할지라도 실천하지 못하면 소용없는 거죠. 모두가 실질적인 내 마음의 행동에 따라서 주어지는 거니까요. 앵무새와 같이 말을 잘한다 하더라도, 내 몸 떨어지고 입 떨어지면 말도 떨어지는 것이지,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요. 그러나 내 영혼 그 자체의 진실한 근본을 진짜로 믿고 나간다면 바로 자유인이죠. 알고 보면 서로가 똑같은 지경입니다.

부처님이 위대하기만 한 거는 아닙니다. 그것은 어떠한 뜻에서 그러냐. 여러분이 아버지고 어머니라고 위대하시기만 합니까? 걸레처럼 닦아 주고 씻어 주고, ‘내 몸은 더럽더라도 네 몸은 깨끗해라.’ 하고 그냥 닦아 주고 하는 그런 길잡이와 같이, 즉 말하자면 부처님 같은 마음이죠. 허허허…. 그러니 부처님이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자식을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 그 마음이나, 자기를 다 주고 희생해 가면서 자식을 낳아서는 또, 내 몸을 자식한테 먹고 자라라고 다 주는 그런 어머니! 그런 아버지! 그러나 하늘과 땅이 둘이 아니듯 아버지와 어머니는 둘이 아닌 까닭에, 그 가운데서 자손이 났다 할지라도 그 자손을 크게 이루시려면, 또는 자기를 낳아 준 부모들을 크게 한도량에 건지시려면 내가 첫째, 한마음으로 구성된 그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다복하게 이끌어 가는 그런 사람이 돼야 됩니다. 우리가 그냥 말만 배우고 웃고 즐기고 이래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항상 여러분한테 말하기를 “마음은 체가 없어서 모두가 자식이다 부모다 또는 나다 형제다 하는 가설이 다 돼 있다.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 가설이다.” 했습니다.

한 25년 전인가? 아마 한 30년은 못 됐겠죠. 어떤 어려운 과수원 집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바람 쐬러 나간다고 나가다 보니까 그 과수원까지 돌게 됐어요. 그래 그 과수원 집에서 나물해서 밥을 얻어먹고 돌다 보니까, 그 집에서 “스님!” 하면서 말하는 겁니다. “이게 3년을 내리 두고, 해마다 꼭 요만큼씩하게 (검지손가락 절반 정도를 짚어 보이시며) 사과가 열려서 지금 학교에 등록금도 못 내고 우리 식구가 다, 아주 그냥 죽을 지경입니다.” 이러거든요. 왜 그럴까요?

여러분,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보지 못하셨죠? 인간들 사느라고 급급하지, 일체 생물이 어떻게 사는지, 우리들하고 생활이 같은지, 그거 한 번도 생각해 보시지 못하셨죠? 그런데 가서 보는 순간, 모두 꽃같이 일어나는 겁니다. 꽃같이, 꽃 같은 마음, 그 불꽃같은 마음이 말입니다. 불꽃같은 마음이 일어나더니만 여기저기 사방에 다 구름같이 모이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걸 무시할 수는 없는 겁니다. 모두 한마음으로 그저 불꽃같이, 그냥 연기처럼 아주 자욱하게 모이는 겁니다.

그래 나는 즐거워서 두리번두리번하고 쳐다보고 있노라니까 아, 옆에서는 자꾸 말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이더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과나무와 사과나무끼리, 끼리끼리 모두 모여서 애당초에 사과나무가 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그 마음들이 불꽃같이 일어나니까 이제 사과가 많이 열릴 거요.” 이랬어요. 그랬더니 그 해에 가지가 휘어지도록 열렸으면서도 사과 하나가 이만큼씩 하게 (양 손을 벌려 모아 보이시며) 열린 거예요. 그래서 그 해에 빚을 다 갚았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그 먼 데를, 첫 번째 판 거를 조금 넣고 사과하고 같이 토굴로 가져왔습디다. 그렇게 가져온 거를 큰절로 가지고 올라가라고 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보면 느껴지고, 들으면 느껴지고 그렇게 알아지는 거 아닙니까? 알아지는 그 생활 자체가 그대로 여여하면 됩니다. 그대로 우리가 믿고 여여하면요. 그렇게 아예 한마음으로 그냥 하면 그 세계가, 삼 세계(三世界)가 바로 삼보가 되는 겁니다. 하나의 삼 세계가 삼보가 되는 것입니다. 삼보가 한데 합쳐서 일심(一心)이 되는 것입니다. ‘삼보’ 하면 과거 현재 미래를 한데 합친 것이 삼보입니다. 그래서 일심으로써 꼭 알아야 될 것은 ‘큰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보배가 바로 나한테 있다. 그래서 삼보가 내 한마음 속에 있으니 부처님과 일체 만물만생이 어찌 따로 떨어져 있으랴. 한도량에 있는 것이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육신, 육바라밀이라고 해도 됩니다. 육신에서 나오는 여섯 가지에 관한 건을 모두 따로따로 할 양으로 애를 쓰면 얼마나 더디겠습니까? 보시(布施)라든가 지계(持戒)라든가, 인욕(忍辱)이라든가 정진(精進), 선정(禪定) 이런 문제를 다 각각으로 생각을 한다면 얼마나 멀겠습니까? 그러나 내 몸뚱이 속에는 그 여섯 가지뿐만 아니라 천차만별로 있습니다. 왜 여섯 가지뿐이겠습니까? 여섯 가지를 정해 놓는다면 더 이상은 못합니다.

그러니까 아예 스스로 한마음에다 모든 거를, 선도 감사하게 놓고 악도 그렇게, ‘악하게 되는 것도 그 속에서 나온 거니까 선하게 나오는 것도 너다.’ 하고 선과 악을 다 놨을 때 비로소 스스로 생산이 돼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거는 콩이나 팥에다 목적을 두는 게 아닙니다. 콩과 팥, 일체를 모두 다 한데 합쳐서 생산이 돼서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은 보현도 되고, 법신도 되고, 부처도 되고, 관세음도 되고, 지장도 되고, 칠성도 되고, 아촉도 되고, 아미타도 되고, 미륵도 되고 전부 다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한마음 속의 자생중생들에게 항복을 받아야, 조복을 받아야 일체 중생들을 나 아님 없이 조복을 받게 할 수 있느니라.” 이러셨어요.

그래서 ‘이 마음공부 하는 데에 끝닿은 데 없이 이게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한테 어떻게 꼭 집어서 알려 드리나.’ 그렇게 생각할 땐 참 답답해요. 방에서도 이렇게 뒷짐을 지고 거닐다가 문득 그 생각이 나면요, ‘아이고 참, 이거는 어떻게 까 보일 수도 없고 이거를 어떡하면 좋은가.’ 그러죠.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거를 모르고, 급한 것도 모르고, 그냥 급하게 죽을 줄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고 그냥 애들이 뛰는 거와 같아요. 그러니 글쎄,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만이 여기까지 이르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아침이면 저기 가서 한 삼십 분 동안 걷습니다.

그렇게 걸으면서도,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그러죠?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고 그러던가 뭐, 하하하…. 그렇듯이 하여튼 나무 한 그루를 봐도 풀 한 포길 봐도 모두가…. 그러니까 먼저 생각나는 거는 나한테 제일 가까운 사람들이겠지요. 그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만이 그 사람들 배 속에 있는 그 헤아릴 수 없는 중생들을 다 제도할 수가 있겠느냐는 얘깁니다. 한생각이면 제도가 되는 건데. 아주 정말, 내가 이 소리는 안 하고 사는 사람인데요, 참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오래 살아야지’ 이런 생각도 할 수 없고, ‘빨리 죽어야지’ 할 수도 없고, 하하하….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궁리궁리하다 보니까 ‘응, 모두 내가 돼 주면 되겠구나. 내가 꼭 보이는 것만 그렇게 줄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이 되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이 영혼의 근본, 이 마음은 허공에 꽉 차게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수효를 막론해 놓고 다 내가 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안심을 했어요. 죽어도 바로 그네들이 나니까, 내가 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또 살아서 그렇게 경험을 해 보지 못한다면 아니 되기 때문에, 옛날부터 자기 자생으로서 조복을 받아 가지고, 화해서 바깥의 모든 거를 조복을 받아 가지고, 응(應)해서 모두 이렇게 응신이 되어 나가서 내가 돼 보니까 ‘아, 죽었다 살았다 할 게 없이 그냥 여여하구나.’ 하는 거를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알았다는 겁니다.

우리가 경험해 보지 않고는 절대로 하려는 생각이 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자기가 소중한 줄 알아야지, 자기 몸뚱이가 지수화풍이라고 그래서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다면 절대로 안 됩니다. 내 몸도 내 몸이 아니라 바로 자생중생들이 수없이 살고, 바깥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사는 집인데 그 중생들의 수효를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자기 몸뚱이 속에 있는 자생중생들만 해도 헤아릴 수가 없는데, 내 식구들의 자생중생들을 전부 포함하면 얼마나 많겠습니까? 헤아릴 수도 없겠지요. 내 자생중생들의 마음으로 인해서 이 집이 (몸을 가리키시면서) 성립된 거거든요. 이 집이 생긴 거거든요. 이 집이 생겼으면 그 자생중생들의 심부름꾼이자 관리인이자 집합소이지, 어째서 그것이 ‘나’냐고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색(色)이 즉 공(空)이다. 공이 즉 색이니라. 그러니 둘이 아니다. 그대로 더불어 사는 한 공체(共體)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공심(共心)이자 공체(共體)이자 공용(共用)이자 바로 공식(共食)이자 공생(共生) 아닙니까? 이것이 ‘나’라고 내놓을 건덕지가 하나도 없어요. ‘나’라고 내놨다 하면 손해가 가요. 여기 수만 명이 이렇게 한데 합쳐서 살고 있는데, 그걸 바다라고 합시다. 바다가 이거는 내 물이고, 그거는 내 물이고, 저거는 내 물이라고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물을 떠 가도 ‘아, 떠 가나 보다.’ 할 뿐이죠, 줄지 않고 더불어 살기 때문에. 바다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의 마음이 바다라면 내 마음을 한 번 주고 두 번 준다 해도, 상대방이 떠 간다 하더라도 줄지 않는 거다 이거야. 마음이 바다와 같아서, 더불어 살기 때문에, 공체이기 때문에, 공심이기 때문에, 공생이기 때문이다 이겁니다. 그 공생으로 살고 공체로 사는 그 속에서 어떻게 ‘내’가 업이 있고 번뇌가 있고 병고가 있고 가난이 붙고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는 얘깁니다.

이건 여러분이 신기하고 묘한 그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어요. 내가 살아오던 관습에 의해서 이날은 손이 있으니까 이사를 못 간다고 생각을 하면 진짜 손이 있게 되고, 이 세상에 태어날 때와 돌아가는 날, 이사 가서 좋은 날을 내가 택하면 그냥 법이다 생각을 한다면 그대로 법이 됩니다. 그건 왜냐하면 공동체이기 때문이에요. 혼자 살 수 없어요. 이 몸뚱이도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더불어 같이 살고 있죠. 그런데 나라고 하고, 내가 산다고 하고, 내가 벌었다 하고, 내가 즐겁다고 하고, 내가 고통이라고 한다면 고(苦)가 있는 대로 착착 붙죠.

‘고’ 하면 수천 가지가 한데 합쳐진 거예요. 고통이라는 건 새록새록 많은 거죠. 그 고통을 혼자 짊어지게 되면 그냥 혼자 나타나는 거죠, 그 고통이 말도 할 수 없이. 그러나 더불어 같이 하기 때문에 주인공이에요. 잘 생각해 보세요. 같이 사는 생명들인데 내가 혼자 산단 말은 안 해도, 내가 혼자 사는 것처럼 하고, 내가 산다고 하고, 잘했어도 자기가 했고 못했어도 그렇고,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모두? 그런데 그거를 바꿔 보세요. ‘으응, 더불어 같이 이렇게 했구나.’ 이렇게요.

그러니까 자기 몸뚱이도 빼놓지 않고 주인공이에요. 더불어 같이 한 거니까 같이 한 그 속에서 그것을 해결을 해야죠? 자기 혼자가 아니니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같이 더불어 살고 있는 동체 속에서 그렇게 했으니까 같이 해결해야죠, 네? 같이 잘못했으면 같이 해결을 해야지, 내가 혼자 했다고 이렇게 꺼덕거리니까 ‘흥, 너 혼자 했으면 너 혼자 맡아라.’ 이러곤 그냥 다 안겨진단 말입니다. 안겨지니까 꼭 고통을 받아야죠.

어떤 사람이 차를 타고 갔는데 꼭 구를 것만 같고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들더래요. 그러는데 무슨 마음이 생겼느냐 하면 ‘더불어 같이 주인공이, 그렇게 자빠지게 하는 것도 너니까 괜찮게 하는 것도 너다. 에이그, 죽이든 살리든 네가 알아서 해.’ 하고 그냥 타고 가다 보니까, 정말 이 차가, 그러니까 운전수가 술을 먹고 운전을 하다가 그냥 내리굴렀대요. 굴러서 차는 바스러졌는데 운전수도 자기도 또 같이 탄 사람도 하나도 다친 데가 없이 사람은 아주 그냥 감쪽같이 멀쩡했답니다. 그냥 사람은 내던져 놓곤 차만 굴러가서 박살이 났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일어나서는 아까 했던 생각이 기억나서 웃었다는 겁니다. ‘야, 사람은 내던져 놓고 차만 갖다가 박아 놨네.’ 이러고요. 그러고 이차로는 감사하다고 생각을 했대요. 그런 거와 같이, 우리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그랬죠? 우리도 이 마음이, 그 의식 자체가 하나로 뭉쳐야 해결을 해도 그냥 해결을 하지, 내가 개별적인 생각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한번 침착하게, 자기 몸뚱이를 놓고 생각을 해 보세요. 자기 몸뚱이가 위성이기도 하고, 블랙홀이기도 하고, 우주이기도 합니다. 나 하나를 터득을 하면요, 다 터득이 돼요.

우리가 결국은 육신이 있기 때문에 육바라밀이 있고, 내가 있기 때문에 삼보가 있고 삼심이 있어서, 삼심이 일심이 되고 이러는 거예요. 과거에도 내가 살았고 현재에도 내가 살고 미래에도 내가 살 거예요. 그러니 이것을 밤과 낮에 비유해서, 밤이면 저승이고 과거, 낮이면 이승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저승과 이승이 어떻게 둘로 나누어졌을까? 밤에 잠을 자야 낮에 일을 하고, 그러니까 밤이 오는 것이 바로 과거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낮이 오는 것이 현실이에요. 그래서 밤과 낮이 한데 합쳐져야만이 생과 사도 같이 구르면서 이게 진리의 끈이 되죠. 진리의 끈이 됨으로써 그냥 끝없이 돌아가듯이요. 그래서 조금 아까 무엇을 어떻게 했든 무엇을 들었든, 모두 벌써 과거로 돼 버렸어요. 과거가 돼 버렸다고요. 그런데 과거로 생각을 하지 말고, 내가 현실에 있으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과거는 벌써 없어졌지요. 그러니 과거도 현실이요, 미래도 현실이란 말입니다. 현실의 내 한마음이 바로 삼심이요, 그것이 한데 합치면 삼보가 되고,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자기 전체 한마음으로써 더불어 같이 한가운데 삼보를 중시한다 이런 뜻입니다.

내가 없으니까 상대가 없죠. 내가 없다면 삼보도 없고, 상대도 없고, 세상도 없고 모두 없는 거죠. 그러니까 나로부터 삼보에 귀의하라, 나로부터. 나에게 삼보가 있는 것이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가만히 있다면,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다면 그때 부처인 것입니다. 내가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드리지만, 생각을 하고 움죽거리겠다 하면 법신이자 화신이고, 화신이자 보신이에요. 보신이자 또 금방 화해서 응신이 돼 버리죠. 그래서 예전 공부한 선지식들께서 ‘그대로 여여하다’ 이런 소리를 하시죠. 그러니까 이거니 저거니 이거니 저거니 할 거 없이 “그대로, 생활 자체에 그대로 살아나가고 그대로 굴러 돌아가는 것이 그대로 부처님 법이자 너희들의 법이고 생활이 그냥 여여하구나.” 이런 겁니다. 질문하실 분 있으면 질문하세요. 지금 생각을 하니까 괜히 내가 여러 말을 했네요. 질문들 하시라고 그럴걸, 아이구!

※위 법문은 1995년 4월 2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 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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