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피했지만 도굴 대상된 불화·불상

구례 천은사의 도난 성보들1988년 도난된 구례 천은사 지장보살도(사진 위쪽). 동일로 추정되는 불화가 서울의 한 대학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사진 아래 참조) 현재 대학 박물관 소장 지장도는 화기가 지워져있다. 하지만 동국대 소장본 재산대장에 해당 불화를 그린 불화승이 색민 스님으로 기록돼 있어, 동일 불화임이 확인된다면 문화재적 가치는 매우 높다.

현대사에서 한국전쟁은 인적이나 물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힌 역사적 사건이다. 특히, 지리산이나 태백산 등지의 사찰이 북한군이나 빨치산들에게 이롭게 활용될 수 있다는 판단으로 상당히 많은 사찰이 우리 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북쪽에 있던 사찰들은 미국의 폭격으로 한순간에 폐허가 되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진 정부와 군부의 판단이 결국 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사찰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든 사례는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순천 송광사. 장성 백양사, 정읍 내장사, 평창 월정사, 남양주 봉선사, 구례 연곡사, 양평 용문사 등은 불교문화재의 보고였던 사찰이지만 전쟁 중에 폭격을 당하거나 화마로 인해 귀중한 문화유산이 사라진 대표적인 사찰들이다. 이는 사찰이나 성보들이 보호의 대상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을 부정한 것이고, 상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던 군인이나 민병대들이 실제적인 파괴의 주범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전쟁 피했던 구례 천은사
1970~2000년대 도굴로 몸살
지장보살도 등 4건 도난 신고

지장도, 불화승 색민 스님 조성
동일 불화 대학 박물관서 소장
근대 재산목록 비교 연구 필요

이런 가운데 빨치산들이 가장 많은 활동을 한 구례 화엄사와 천은사, 하동 쌍계사 등이 소실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전쟁의 포화에서 살아남은 사찰의 성보들은 1970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도굴범들이 성보를 훔치는 공간이 되었음이 이 땅의 아픈 역사라고 밖에 해석할 수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성보를 지키려는 많은 스님들이나 신도들의 노력으로 현재 한국미술사에서 불교문화재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지리산 3대 사찰의 하나인 천은사는 한국전쟁 중에 피해를 입지 않은 사찰이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서면서 상당히 많은 성보들이 도난당했다. 그러나 조계종 총무원에서 2016년 발간한 〈불교문화재 도난백서 증보판〉에는 목조나한상(도난 일시 1988.2.23), 지장보살도(1762년 作, 1988.7.14), 목조아미타여래좌상(1991.4.11), 신중도(2000.9.31) 밖에 없다. 문화재청에 신고된 도난문화재 품목에는 이외에도 위폐 2점과 인폐 2점이 적혀 있다. 위폐와 인폐는 나무로 만들어진 불패와 원패의 오기(誤記)로 추정된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3건의 재산대장을 상호 비교해 보면 없어진 성보의 현황을 파악해 볼 수 있다.

천은사는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지리산 서남쪽에 있는 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이다. 사찰은 828년에 인도 승려 덕운(德雲) 스님이 창건하였는데, 정원에 정신이 맑아지는 샘물이 있어서 처음에는 감로사(甘露寺)로 불리었다. 875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중건하고, 고려시대 충렬왕대에 ‘남방제일선찰(南方第一禪刹)’로 승격되었지만, 여말선초의 사찰 연혁에 관한 문헌은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 정확한 연혁은 알 수 없다.

임진왜란으로 사찰이 모두 전소되고, 전쟁이 끝난 1610년에 혜정(惠淨) 스님이 중창을 시작하고, 1679년에 단유(袒裕) 스님이 전각을 중건한 후에 천은사라고 사찰 이름을 바꾸었다. 1774년에 혜암(惠庵) 스님이 화재로 소실된 전각을 남원부사 이경륜(李敬倫) 등의 도움을 얻어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전각은 18세기 후반에 중건된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팔상전, 응진당, 칠성각, 삼성전 등이 남아있다.

구례 천은사의 도난 성보들1988년 도난된 구례 천은사 지장보살도(사진 위쪽). 동일로 추정되는 불화가 서울의 한 대학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사진 아래 참조) 현재 대학 박물관 소장 지장도는 화기가 지워져있다. 하지만 동국대 소장본 재산대장에 해당 불화를 그린 불화승이 색민 스님으로 기록돼 있어, 동일 불화임이 확인된다면 문화재적 가치는 매우 높다.

1988년 7월 14일에 사찰에서 도난당한 지장보살도는 1762년에 제작된 불화로,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을 삼존으로 배치하고, 옆으로 육광보살(六光菩薩)을 각 3위씩 그린 간단한 구도의 작품이다. 지장보살은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한 자세이고, 스님과 같이 머리는 민머리에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들어 올린 채 보주를 들고 있고, 왼손을 무릎 위에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을 취하고 있으며, 그 옆으로 육환장이 세워져 있다. 설채법은 적색, 군청, 녹색을 주조색으로 본존의 신광과 천의에 하엽(荷葉) 계통의 문양을 그린 것이 특징적이다.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은 백색으로 안면을 칠하고, 먹 등을 사용하여 음영을 나타낸 반면, 지장보살과 육광보살은 황색조의 안료로 칠을 하였다. 지장보살의 복식에만 금박을 사용하고 그밖에 황색은 석자황 계통의 안료를 혼용하여 마치 금을 사용한듯 한 효과를 냈다. 복식의 외면부를 장식하는 다양한 패턴의 문양 표현이 특이하고, 얼굴의 표현, 문양과 안료의 조합, 채색 구름 등이 호남을 중심으로 활동한 불화승들의 양식적인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불화가 서울의 모 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 불화는 ‘조선시대 불화전’(1990년)과 ‘내세에의 염원’(2013년)에 개최된 특별전을 통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이 두 작품은 지장보살의 오른손 뒤쪽의 신광 일부에 물이 흘러내려 오염된 상태가 동일하고,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재산대장 3건 중에 1932년 11월 30일 조선총독부 관보에 실린 소장품 목록에 “지장정(地藏幀) 1점 견제(絹製) 괘도(掛圖) 세로 7척5촌, 가로 8척7촌”, 동국대 중앙도서관 소장본에 “지장보살상정(地藏菩薩像幀) 1점 견지(絹地) 집합(集合) 세로 7척5촌, 가로 8척7촌 색민(色旻) 천은사”라고 적혀 있어 규격은 가로 8척7, 세로 7척5촌(가로 263.6㎝, 세로 227.35㎝)이라 서울 모 대학박물관 소장 지장보살도(가로 278.5㎝ 세로231.5㎝)와 크기가 유사하다. 뿐만 아니라 존상들의 자세와 옷에 그려져 있는 문양이나 설채법 등이 동일하다. 그러나 대학박물관 소장 지장보살도는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정도로 유물 설명을 쓴 것으로 보아 화기(畵記)가 지워졌거나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이 동국대 소장 재산대장에 필서된 내용과 같이 불화승 색민 스님이 조성한 작품이라면 그 문화재적 가치는 아주 높아서 국가지정문화재로의 지정이 가능하다.

불화승 색민은 1741년에 전남 곡성 도림사 불화부터 1775년 장성 백양사 불화까지 34년 동안 21점의 불화를 그린 스님이다. 색민 스님은 18세기를 대표하는 화승(畵僧) 의겸(義謙) 스님의 화풍을 계승한 인물로, 1745년부터 의겸 밑에서 나주 다보사 괘불도(1745년), 부안 개암사 괘불도(1749년), 화엄사 삼신불도(1757년)를 조성하였고, 1749년에 구례 천은사 칠성도에서 의겸 다음으로 이름이 적혀 있다. 그 인연으로 1762년에 천은사 지장보살도를 수화승으로 참여하여 그린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색민 스님은 1764년에 해남 대흥사 불화 조성에 수화승으로 참여하였고, 1755년에는 〈순회세자상시봉원도감의궤〉 비석소 화승(畵僧)과 1761년에 장흥 보림사 신법당 단청 조성에 참여하였다. 따라서 천은사 지장보살도는 작품성뿐만 아니라 18세기 후반 불교회화사 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이외에도 천은사에서 도난당한 목조나한상(1988년 2월 23일)은 1693년에 조성된 작품으로, 17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조각승 색난이 만든 강진 정수사, 구례 화엄사, 고성 옥천사 등에 소장된 목조나한상과 양식적인 특징이 동일하여 조성 작가의 추정이 가능하다. 도난 신고된 나한상의 숫자가 달라서 구체적으로 어떤 상들이 도난당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데, 이는 해당 사찰에서 지금이라도 사진을 구해 문화재청에 보완신고가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외에도 1991년 4월 11일에 도난당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도난 신고된 자료에 사진조차 없어서 어떤 유물인지 특정할 수 없다. 또 2000년 9월 31일에 도난당한 신중도는 작년에 간행된 도난백서에 처음으로 사진이 공개되었다. 천은사에 소장된 신중도는 1930년대 작성된 재산대장에 2점이 적혀 있는데, 동국대본 재산대장에는 “신중정(神衆幀) 1점 포본(布本) 종 6척4촌 횡 6척4촌 금암”과 “신중정(神衆幀) 1점 견본(絹本) 종 5척 횡 2척7촌 민휘”로 적혀 있고, 현존하는 신중도 화기를 살펴보면 “道光十三年癸巳五月日좦敬造神衆幀于七佛寺奉安于泉隱大法堂좦證明 退隱大禪師 鳳儀 別座 晶倫좦金魚 錦庵片手天如좦圓潭乃元좦定旺좦禹贊좦益贊…持殿 斗民좦太淵좦時住持 永俊좦前啣秩…”으로 1833년에 칠불사에서 조성되어 천은사 대법당에 봉안하기 위해 금어(金魚) 금암(錦庵), 편수(片手) 천여(天如) 등이 제작했다는 화기가 남아있어 도난당한 신중도는 불화승 민휘가 조성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재산대장에 ‘종(縱) 5척, 횡(橫) 2척7촌(세로151.5㎝×가로81.8㎝)’인 신중도는 화면을 네 단으로 나뉘어 하단과 중단 중앙에서 화려한 갑옷과 투구를 걸친 위태천이 양손으로 무기를 잡고 있다. 2단과 3단에는 신장과 천녀 등이 서 있고, 가장 상단에 제석과 범천이 서 있는 구도로 19세기에 주로 그려진 전형적인 신중도의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런데 불화승 민휘는 18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작가라서 그런지 양식적으로 좀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3건의 재산대장 중에 가장 자료적 가치가 큰 것은 동국대 중앙도서관 소장본이다. 현재 도난신고된 성보문화재에 관련된 내용은 아래 표로 정리했다.

따라서 20세기 전반에 작성된 사찰의 재산대장을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정리하면서 개별 성보를 비교한다면 한국전쟁 이후 도난된 성보문화재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다. 또한 역사학 또는 미술사를 전공했던 선학(先學)들이 사찰을 조사하면서 촬영한 1970~80년대 사진이라도 공개된다면 박물관이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성보문화재의 출처를 정확히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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