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조있는 佛·儒 교류 보여준 善緣

다산 정약용의 장남 유산 정학연이 1846년 2월 28일 초의에게 보낸 서간문. 서로의 안부를 묻는 애틋함이 담겨 있다. 또한 당시 대흥사의 명명높은 승려인 수룡색성의 열반 연도를 가늠할 수 있는 내용도 기재돼 있다.

유산 정학연(酉山 丁學淵, 1783~1859)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의 장남으로, 초의와 추사 김정희(1786~1856)를 연결해준 인물이다. 강진 다산초당에서 처음 만난 정학연과 초의는 평생 돈독한 우정을 나눴다. 특히 처음 한양을 찾았던 초의에게 적극 도움을 주었던 정학연은 1830년경 2번째 상경 길에도 물심양면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실제 초의가 경화사족들과 폭넓은 교유를 확대했던 계기는 정학연이 마련해 준 것이라 하겠다.

이들은 각기 수신과 수행을 실천하며 지향했던 목표를 이루고자 했다. 유자(儒者)와 승려라는 신분을 초월한 이들의 우정은 조선 후기 격조 있는 유불의 교유라 할 수 있다. 이들을 돈독하게 한 매개물은 시와 차, 편지이다. 뜻을 공유하고 서로의 향상에 도움이 되었던 이들의 인간적 우정은 대를 이어 이어졌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선연(善緣)이라 할 수 있다.
실로 정학연이 살던 마현과 초의의 수행처 대흥사는 천리나 되는 먼 길이다. 인편이 있을 적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서신과 시통(詩筒)을 보냈던 사람들이다. 서로의 향상을 격려했던 이들의 자취들은 화답했던 시문과 편지에 또렷한 자취를 남겼다.

다산의 장남인 유산 정학연
평생동안 초의와 교류 ‘돈독’
추사와 초의를 연결한 인물
1846년 2월 末 보낸 편지엔
서로 안부 묻는 애틋함 담겨
수룡색성 열반연도 가늠 가능

정학연이 1846년 2월 28일,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는 서로를 아끼는 따뜻한 안부뿐 아니라 수룡 색성(袖龍性, 1777~ 1845)이 열반했던 연도를 밝힐 근거를 남긴 자료라는 점이다.
 
수룡은 대흥사 승려로, 아암의 제자이다. 범해의 〈동사열전〉에 의하면 전라남도 관촌 출신으로, 어려서 대흥사로 출가해 모윤의 제자가 되었다. 조선 후기 대강백이었던 아암 혜장(兒庵惠藏 1772~1811)에게 〈주역〉을 배웠고, 〈정법안장〉을 전수받았으며 수룡이란 법호를 받았다고 한다. 〈동사열전〉에는 북암에서 8월 15일에 입적했다고 했을 뿐 열반 연도를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수룡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다른 자료에서도 그의 열반 연도를 추측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가 주로 강진 만덕사에서 수행했던 대흥사 승려였음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다산의 전등계 제자인데 이런 사실은 정학연의 편지에 “어느 날 내직內直(다산)께서 상원(上院)과 여암(如菴) 사이에 오셨을 때에 스님들과 불자(拂子)를 세우고 편안히 담소했던 것은 이사람 뿐이었습니다”라고 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이번에 소개할 정학연의 편지에는 다산과 수룡의 관계를 “수룡 스님이 입적하셨다니 천리에서도 마음에 상처가 큽니다. 이 노스님께서 일찍이 산방(山房) 야사(野寺)에서 아버지를 모신 사람이라 그립고 아낌이 출중합니다. 옛 친구가 돌아갔다니 어찌 슬퍼 탄식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한 대목이 보인다. 이는 바로 만덕사의 산내 암자에서 머물던 다산을 곁에서 모신 이가 바로 수룡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한 셈이다.

따라서 그의 편지는 자신과 초의와의 관계뿐 아니라 수룡과 다산의 관계는 물론 1846년경 자신의 정황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개인 간에 주고받은 안부나 요청 등을 담고 있는 편지가 새삼 중요한 정보를 담은 직접 사료라는 점을 유산의 편지에서 거듭 확인하게 된 셈이다. 그의 편지를 살펴보면 그 크기는 32.0×42.1cm정도이며 서첩 속에 들어 있던 자료로 피봉이 망실되었다. 유산 글씨의 특징이 잘 드러난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룡 스님이 입적하셨다니 천리에서도 마음에 상처가 큽니다. 이 노스님께서 일찍이 산방(山房) 야사(野寺)에서 아버지를 모신 사람이라 그립고 아낌이 출중합니다. 옛 친구가 돌아갔다니 어찌 슬퍼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다비는 마쳤는지요. 모든 일이 끝이로군요. 봄추위가 품을 파고듭니다. 이런 때 (초의)스님은 맑고 강건하시고 용상도 모두 편안하지요. 철우노사의 수행의 근황은 어떻습니까. 소식을 듣지 않은지가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때로 망연히 노심초사하여 잊지 않았습니다. 늙은 저는 4년 동안 괴이한 병이 들어 머리가 부도의 정수리처럼 되었고 이빨은 마치 썩은 흙 장승같으며, 눈은 해골 구멍같이 광채를 다 잃어 일말 싸늘한 시체 같습니다. 수룡스님의 앉자 망탈(忘脫)한 좌화(坐化)것과 견준다면 도리어 뒤진 감이 있지만 스스로 가련해한들 어쩌겠습니까. 어떻게 사뿐히 걷는 서하객(徐霞客)과 같겠습니까. 어느 날 내직內直(다산)께서 상원(上院)과 여암(如菴) 사이에 오셨을 때에 스님들과 불자(拂子)를 세우고 편안히 담소했던 것은 이사람 뿐이었습니다. 편지를 대하니 눈물이 흐를 뿐입니다. 분원(광주분원)의 자기창에서는 묘한 그릇을 만듭니다. 스님께서 쓰실 정병(淨甁)과 바루(飯鉢)를 찾아 둔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인편이 마땅치 않아 보내지 못했습니다. 다시 어찌 해야 할지요. 마침 紺泉(윤종심)이 파수(水)를 건너간다고 하니 산란한 마음으로 몇 줄 편지를 씁니다만 어느 날 스님께 도달할 수 있을 런지 모르겠습니다. 나머지는 이만. 서식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1846년 2월 28일 유산 정학연 병부 화남
袖龍笙寂 千里傷神 此老曾侍先人於山房野寺者 而眷愛出衆矣 舊交零落 寧不悲歎 已茶毗否 萬事已矣 春寒入懷 此辰 法履淸健 龍象皆安 鐵牛老師禪? 更如何 漠未聞消息 有時?然 勞心無以忘矣 老物怪疾四年 頭如浮圖頂 齒如朽?人 眼如??孔 神彩都亡 一末冷屍 比袖龍坐化 還遜一籌 自憐 奈何 何由快步 如徐霞客 一日內直到上院如菴之間 與師輩?拂穩談 此生已矣 臨紙然耳 分院瓷廠産妙瓷 覓師輩淨甁飯鉢 置之已久 而無以因風吹送 亦復奈何 適因紺泉渡行 數行書 未知何日達梵展 都留 不究書式
 丙午 二月 卄八日 酉山病夫 和南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편지는 수룡의 열반 연도를 가늠할 자료이다. 범해의 〈동사열전〉에 8월15일에 열반했다고 했으니 적어도 이 편지를 쓴 1846년 2월 이전에 이미 수룡은 열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정학연이 수룡의 열반 소식을 들은 해가 1846년경이고 실제 수룡이 열반한 해는 1845년 8월15일이라 짐작된다.

한편 1846년경 정학연은 중병을 앓고 있었으니 바로 “늙은 저는 4년 동안 괴이한 병이 들어 머리가 부도의 정수리처럼 되었고 이빨은 마치 썩은 흙 장승같으며, 눈은 해골 구멍같이 광채를 다 잃어 일말 싸늘한 시체 같습니다”라고 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미 1842년 경부터 병환을 겪고 있었고 1846년 경의 병세는 더욱 깊어져 “싸늘한 시체”와 같다는 정황을 초의에게 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임에도 그가 초의를 생각하는 마음은 지극했다. 당시 그는 경기 분원 자기창의 관리 소임을 맡고 있었다. 초의를 위해 “정병(淨甁)과 바루(飯鉢)를 찾아 둔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인편이 마땅치 않아 보내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런 마음의 증표는 초의를 위해 늘 성의를 다하는 정황을 나타낸 것이다. 더구나 정병과 바루는 승려였던 초의에게 긴요한 물품이며 광주 분원에서 생산된 물품은 왕실에 납품된 귀품이다. 좋은 물건을 보면 초의를 생각했던 이들의 우정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 편지에서 언급한 서하객(徐霞客 1586~1641)은 바로 명나라 말기의 지리학자이다. 강소성 출신으로 광조라는 사람이다. 1636년 51세 때 절강ㆍ강서ㆍ호남ㆍ광서ㆍ귀주ㆍ운남 등지(等地)의 지리(地理)를 조사했다고 한다. 근래에 그를 뛰어난 지리학자로 주목한 바가 있으니 서하객처럼 건강하게 천하를 주유하고 싶은 뜻을 반영한 것은 아닐까. 아무튼 병중에 있었던 그의 심사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인 셈이다. 

한편 정학연의 이 편지는 감천 윤종심(紺泉 尹鍾心, 1793~1853)이 패수를 건넌다기에 그 편에 보낸다는 것이다. 윤종심은 바로 다산초당 시절 다산에게 강학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의 초명은 윤동(尹?)이었다. 다산의 외척으로 초의와도 깊이 교유했다. 특히 초의의 문하에서 그림 공부를 하던 소치 허련(1809~1893)이 윤두서의 가장본을 빌려 볼 수 있었던 것은 윤종심 뿐 아니라 윤종영, 윤종정 등 윤두서 후손들과 친밀하게 교유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산초당에서 공부하던 시절 서로 알게 된 이후 깊이 교류하여 다산이 해배되어 강진을 떠난 후에도 이들의 교유를 이어갔다.

한편 정학연은 초의가 어려움에 처했던 1858년에도 도움을 주었던 사실이 확인되는데 이는 그가 1858년 전주 감영으로 보낸 편지이다. 당시 초의는 1857년 상경하여 추사를 조문하고 그 해 겨울을 추사 댁에서 머물다 대흥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초의는 대흥사로 돌아갈 비용이 없었던 터이다. 바로 이때 초의를 위해 전주 감영에 편지를 보낸 인물이 정학연이다. 그 편지의 일부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중략〉초의는 호남의 이름 있는 승려입니다. 일찍이 소문을 들어 아시는지 어떤지를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초의 노인은 바로 전주 영하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다행히 곧 불러 들여 면회를 허락하시고 친히 그 곡절을 물으신다면 살필 만한 것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많은 말에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초의를 불러 보신 후에 약간에 여비를 도와주시면 좋겠지만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작년 여름 병이 있는데도 상경한 것은 추사를 조문하기 위한 것이고 하나는 초의의 선사(완호)의 비를 새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일이 여의치 않아 가을에 돌아가지 못하고 추사 댁에서 겨울을 지내고 지금 비로소 남쪽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그 행색이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이 텅 비었다고 하니 가련하고 마음에 걸립니다. 봉제할 것(奉提)은 불과 3~4량이면 대흥사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중략...草衣之爲湖南名僧 曾未聞知否 今草衣老人 方在營下 幸卽招入賜顔 親問其委折 則可諒得矣 不在多言耳 草衣招見後 略助其行費 則甚好甚好 未知如何 昨夏扶病上京者 一則弔秋史也 一則爲其先師碑刻事 而事不如意 秋間未歸 過冬於秋史宅 今始南歸 其行色囊乏一錢云 可憐可念 所以奉提 不過三四兩 可抵寺云耳)

1857년 초의가 상경한 연유는 완호 스님의 탑명 글씨를 받기 위함이고 또 다른 연유는 추사를 문상하기 위함이었다. 실제 추사가 돌아간 것은 1856년이었지만 실제 초의가 상경한 것은 그 다음 해인 1857년이다. 겨울 한철을 추사 댁에서 머물다가 다음해 봄에 대흥사로 돌아가는 길에 전주에서 노잣돈이 떨어지는 어려움을 겪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이가 바로 정학연이었다. 얼마 후 전주 감영의 도움으로 대흥사로 무사히 돌아갔으리라 짐작되지만 이 편지는 당시 사찰의 재정 형편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초의의 막역한 후원 세력인 추사가 돌아간 후 초의의 현실 상황도 그리 녹녹하지는 않았으니 아! 시절인연의 소중함은 이런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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