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대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오정순(64) 씨

오정순 씨는… 인천 인하대병원에서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로 14년째 활동하고 있다. 1년 365일 중 320일을 와상환자 머리 감겨주는 데 보낸다. 1주일동안 만나는 환자만 120명 정도. 그는 매일 아침, 자신의 허리 높이쯤 되는 이동식 세발도구를 끌고 병원 9층부터 17층까지 순회하며 환자들의 머리를 감겨준다.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을 가슴에 새기고 사는 그에겐 호스피스환자도 부처다. 사진=박재완 기자

입원 후 불자는 외톨이불교는 어디에

죽음은 삶과 분리되는 경험이기에 산 자에겐 늘 생경한 단어다. 하지만 적어도 죽음의 문턱에 선 이들에겐 눈앞의 현실이자 두려움의 상징이 된다. 그리고 그 문턱을 의사의 시한부 선고로 마주하게 됐을 때 찾아오는 허탈감은 설령 피붙이라 할지라도 온전히 공감하기 어려울 만큼 절망적이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이들은 버킷리스트를 쓰고 죽기 전 해야 할 일을 하나둘씩 해나간다.

한편으론 이를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몸짓으로 볼 수도 있겠다. 어디까지나 신체활동에 제약 없는 이들의 시선에서는 말이다. 여러 이유로 침대에서 거동조차 못하는 와상(臥牀)환자들에게 버킷리스트는 사치에 가깝다. 이처럼 죽음의 문턱 앞에서 무엇 하나 스스로 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해 한 대학병원에서 14년째 환자 머리 감기기 봉사를 하는 이가 있다. 인하대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오정순(64, 법명 무량심) 씨다.

호스피스환자도 나에겐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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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 씨를 만나기 위해 인천 인하대병원을 찾았다. 오전 내내 환자들의 머리 감기기 봉사를 마치고 직원식당 앞에서 만난 그는 아담한 체구에 검은 법복바지를 입은 평범한 겉모습의 불자였다. 봉사하느라 땀깨나 흘렸을 법한 그에게 힘들진 않은지 묻자 오 씨는 오늘은 세발(洗髮)봉사 대상자가 20명밖에 되지 않아 수월했다면서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와 대화는 2평 남짓한 병동 지하 법당서 나눴다. 먼저 오 씨의 하루 일과를 물어봤다.

우선 아침 740분쯤 병원에 도착해서 법당에서 3배 올리고, 샴푸와 도구를 챙깁니다. 공식적으로는 9시부터 봉사시간이지만 8시부터 시작해야 조금이나마 여유가 있어요. 제가 시간에 쫓기면 환자들도 그 손길을 느끼고 불안해하거든요. 그날그날 간호사실에서 정리한 명단을 받아서 점심까지 봉사를 하고요. 집에 돌아가면 쉬다가 집안일도 하고, 불교용품 살 일이 있으면 서울에 가고 합니다.”

오 씨는 매일 아침 자신의 허리 높이쯤 되는 이동식 세발도구를 끌고 병실을 순회한다. 환자의 머리를 침대 가장자리로 옮기고 머리를 감긴 뒤 제자리로 옮기는 것까지 모든 세발과정이 그의 몫이다. 이렇게 병원 9층부터 17층까지 오가며 오 씨가 1주일동안 만나는 환자는 120명 정도. 그는 이 생활을 1365일 중 320일가량 이어가고 있다. 그가 쉬는 날은 매주 월요일뿐. 이마저도 체력관리를 위해 운동을 하며 보내는 오 씨다. 주로 다른 봉사자와 짝을 이뤄 봉사를 하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봉사하는 사람은 오 씨밖에 없다. 그래서 동료가 일이 생겨 봉사를 나오지 못할 때는 환자 머리 감기기를 그가 홀로 도맡아 한다.

오정순 씨가 병원 복도에 게시된 환자 이미용·세발 안내문을 가리키며 하루 일과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환자들의 세발을 돕고 있다. 사진=박재완 기자

거동 어려운 환자 위한 봉사
1365일 중 320일 봉사 매진
인하대병원서만 14년째 자비행
한 주에 만나는 환자만 120
환자의 마지막을 씻겨드리는 일

불교 찾는 환자가 너무 많다
수십 년 신행한 불자도 입원하면
절은 나를 안 찾더라한 목소리
타종교의 끊임없는 환자 위문에
외로운 불자들 개종 수없이 경험

세발봉사가 필요한 이는 거동이 불편한 준(準)중환자부터 호스피스환자까지 와상환자들이기 때문에 60대 여성이 매일 이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다. 그것도 10년이 훌쩍 넘는 긴 시간동안 말이다. 무엇이 오 씨를 이토록 하루도 빠짐없이 봉사하게 하는 걸까.

오늘 내가 하지 않으면 더 이상 그 환자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다른 곳보다도 호스피스병동 봉사만큼은 빠지지 않으려고 해요. 환자분의 마지막을 잘 씻겨드릴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죠. 또 중환자들도 의식이 있어서 머리를 감기며 희망찬 얘기를 전하다보면 미세하지만 변화된 모습이 느껴져요.”

오 씨에겐 환자들도 부처다. 비록 환자들의 몸 상태는 온전치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머리를 감겨주며 그들이 편안하게 내생으로 떠나길 기원한다. 신심 깊은 불자면서도 누군가 어디서 봉사를 나오셨느냐고 물을 땐 병원 봉사자라고만 설명하는 오 씨. 자칫 종교가 다른 환자들이 부담을 느낄지 몰라 배려하는 것이다.

참회 끝에 건진 육신
오 씨가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시작하게 된 것은 40대에 겪은 건강악화가 계기가 됐다. 당시엔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가 병원을 옆구리에 끼고 살 정도로 자주 다닌 탓에 정작 자신은 병원을 멀리해 정확한 병명도 몰랐다는 오 씨. 그는 몸이 아픈 와중에 자신이 죽고 난 뒤 남을 짐을 고민해봤다. 평소 화장법이나 유흥에 관심이 없고, 미용실도 가기 싫어 직접 가위로 자신의 머리를 깎던 그였기에 살림살이는 별로 없었지만 막상 하나둘 세어보니 버릴 것이 넘쳐났다.

내가 죽은 뒤 모든 짐은 남은 사람들이 버려야겠구나. 이 또한 수고가 아닐까.’

그렇게 오 씨는 자신의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옷 몇 벌, 식구들과 함께 쓸 그릇과 수저 5. 지금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오래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정리해야할 짐이 많았어요. 그래서 검소하게 살려고 노력했는데도 제가 가진 게 너무 많더라고요. 그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어서 최대한 줄이고 또 줄였죠. 그러면서 점차 육신에 집착하지 않게 된 것 같아요. 죽음이 두렵지 않았거든요.”

그는 병치레를 하며 문득 어렸을 적 어머니와 함께 사찰에 다니던 시절을 떠올렸다. 기복신앙이 깊은 어머니였지만 그때 사찰에 들어서며 느낀 출세간의 고즈넉함이 생각난 것. 그 길로 오 씨는 절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새벽예불과 108배를 하루의 시작으로 삼았고, 집안 거실에는 촛대와 불단을 만들어 기도했다. 안거기간엔 선방까지 다니며 참선공부도 했다. 건강이 조금 나아졌을 땐 5대 적멸보궁과 봉정암을 삼보일배로 올랐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고, 밤새 기도한 뒤 밥 한 숟갈만 먹고 내려오기도 일쑤. 이런 그는 기도를 시작한 첫날부터 지금까지 참회기도만 올리고 있다.

전생에 내가 지은 업이나 죄가 있기 때문에 몸이 아픈 게 아닌가 싶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참회기도만 올렸고, 죽을 때까지도 그럴 거예요. 아들이 고3 수험생일 때도 입시기도는 안 올렸죠.(웃음) 전생에 내가 지은 죄와 현생에 나도 모르게 지은 죄를 참회하고 싶었습니다.”

수년간의 참회기도는 그에게 곧 가피로 이어졌다. 꿈에서 병이 자신의 몸 밖으로 나가는 걸 느낀 것이다. 그렇게 오 씨는 건강을 다시 되찾았다. 그리곤 밥만 축내다 이생을 마감하지 않고, 봉사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죽음을 앞두고 번민하는 이들이 마음의 안정을 느끼도록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게 된 계기다.

지난해 인하대 직원불자회와 함께한 연등 만들기 체험행사. 병원직원을 비롯해 환자와 가족 등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자신만의 연등을 만들고 즐긴다. 오정순 씨 제공

죽음 앞 외톨이 된 불자들
불교엔 호스피스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2000년대 초, 오 씨는 기독교회관을 찾아가 호스피스 봉사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교육을 수료한 뒤 모 병원에서 처음 세발봉사를 하려던 오 씨는 불자라는 이유만으로 배척당했다. 이미 병원의 모든 봉사자들은 기독교인이었고, 그들의 텃세는 그가 혼자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봉사자 1명이 빠져 빈자리가 생기면서 오 씨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어느 날 환자의 머리를 감겨주던 오 씨는 환자 베개 밑에 염주가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환자에게 왜 베개 밑에 염주를 숨겨놓았는지 묻자 기독교인 봉사자들이 머리를 감겨주면서 자꾸만 하느님을 믿어야 된다고 강요해서 그랬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환자의 이 말은 오 씨의 가슴을 쿡쿡 쑤셨다. 그 때 오 씨는 불교호스피스가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일인지 되새길 수 있었다.

처음 봉사를 시작했을 때 기독교인이 40명이었어요. 불자는 저 포함 3명뿐이었죠. 불자들이 호스피스 봉사에서 인정받기까지 참 어려운 일이 많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힘들다고 돌아설 때 불자들은 묵묵히 제 할 일을 다했죠. 결국 종교가 다르던 환자들도 덕분에 편안하게 떠난다고 얘기해요. 불자 환자들은 끝까지 불교를 믿을 수 있게 지켜줘서 고맙다고 하고요. 다만 아쉬운 건 병원에서 불자 환자들이 얼마나 외로운지 불교계는 관심 없다는 사실이죠.”

병치레가 일깨워준 佛心
40대 큰 병 앓은 뒤 참회기도만
죽음 앞둔 이들 위한 봉사 결심
응무소주이생기심가르침 새겨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습니다

오 씨는 병원에서 봉사하면서 죽음을 앞두고 개종하는 불자들을 셀 수도 없이 많이 만났다. 그들의 개종 이유는 단순했다. 절은 제 발로 찾아가는 곳일 뿐 절이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30년 그리고 50년을 절에 다니며 신행을 한 불자들도 병원에 입원한 그 순간부터 외톨이가 됐다. 교회에서는 교인 환자를 위해 수시로 음식과 반찬을 해주고, 성당에서는 함께 기도하러 사람들이 몰려왔다. 죽음 앞에서 외톨이가 된 불자들이 마치 도를 깨친 선사들처럼 꼿꼿하게 버틸 순 없는 일이었다.

평생을 불자로 살다가 삶의 끝에서 개종하는 분들이 많아요. 문제는 환자 한 사람이 개종하면 식구들도 따라 개종하거든요. 불교계가 포교대상이다 뭐다 하면서 상을 뿌릴 게 아니라 포교국장이든 총무원 스님이든 병원만이라도 돌면서 법회해주면 그게 훨씬 큰 도움이 됩니다. 신부·목사·수녀님들이 교인에게 영향력이 크듯이 불자 환자들에겐 스님들이 신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입니다. 재가불자들의 활동만으론 한계가 있어요.”

오 씨는 처음 불교에 귀의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매일 참회기도를 올리며 지낸다. 사진=박재완 기자

욕심 없는 스님 없나요?”
오 씨는 지금의 인하대병원에 앞서 다른 병원서도 봉사를 했다. 그 경력을 더하면 20년에 조금 못 미치지만 이처럼 긴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남편인 황광연(65) 거사의 지지 덕분이다. 개신교 집안서 자란 황 씨는 결혼식 주례를 목사에게 부탁할 정도로 오래된 교인이었다. 그는 오 씨가 아픈 몸을 이끌고 절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워 따라 나섰다가 절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황 씨는 시간이 흐른 뒤 하루도 빠짐없이 호스피스 봉사에 매진하는 아내를 보면서 내 부인이지만 부처님의 행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결국 자신도 함께 봉사에 나섰고, 이는 불교대학을 다니며 불심에 싹을 틔우는 계기로 이어졌다. 황 씨는 매주 토요일에 환자들 발마사지 봉사를 하고, 일요일엔 병원법회를 주관하며 집전까지 맡고 있다.

제가 이렇게까지 봉사할 수 있었던 건 다 남편과 자식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또 봉사를 하다 보니 환자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에 맞춰 노력하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죠. 얼마 전 사달만 없었더라면.”

갑자기 오 씨의 말끝이 흐려졌다. 최근 좋지 않은 일을 겪은 모양새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서너 번을 더 물은 뒤에야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몇몇 스님들이 병원법당이 돈이 되는 곳이라 생각해 탐을 내고, 결국에는 병원서 행패까지 부렸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느 스님은 오 씨가 병원법당 시줏돈으로 호의호식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조계종 총무원에 배포했다. 또 다른 스님은 환자들을 대상으로 재를 지내라고 종용하면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이처럼 법당에 스님이 없어 늘 아쉬워하던 오 씨에게 접근한 대다수의 스님들은 환자보다 돈에 관심을 뒀다. 결국 논란이 확대되고 실제 병원 내에서 스님과 봉사자들 간의 물리적 충돌까지 발생하자 병원법당은 지난해 4월 임시 폐쇄됐다. 다행히 법당의 완전 폐쇄는 막을 수 있었지만 봉사자들에게 생긴 마음의 상처는 제대로 아물지 못했다.

욕심 없는 좋은 스님 모셔보려고 한 일들이 안 좋게 끝났죠. 전 시줏돈이 얼마가 됐든 전부 환자를 위해 써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있기 때문에 들어온 돈이니까요. 심지어 시줏돈이 부족할 땐 제 사비를 털어서라도 법회 비용을 마련합니다. 그런데 이 일들을 조계종 호법부까지 찾아가 해명하게 되니 차라리 그만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한 차례 홍역을 치른 오 씨는 이후 한동안 봉사를 마친 뒤 도망가듯이 곧바로 집에 돌아갔다. 다른 사람들이 불교를 어떻게 바라볼지 너무 창피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봉사를 그만두거나 병원법당이 폐쇄되지 않도록 노력한 이유는 분명했다. 한 번 법당 문을 닫으면 다시 여는 게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럼에도 홍역에 따른 피해는 만만치 않았다. 불자 봉사자들이 절반은 줄었고, 인하대병원 직원불자회 활동 위축이 뒤따랐다.

성모병원서 봉사할 때 미사에 참석해봤습니다. 그곳에서는 봉사자를 위해 자긍심을 갖도록 격려해주더군요. ‘당신은 최고의 사람이다’ ‘봉사는 가장 좋은 일이다말하며 지지해주더라고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불교계에 뭐라고 지적할 건 아니지만 적어도 사기 꺾는 일만 없도록 해줬으면 해요. 남편이 그러더군요. 윤회를 안 믿으니까 그런 못된 행위를 하는 거라고. 저도 계속 나이가 들고 언제까지고 지금처럼 봉사할 순 없어요. 정말 공심으로 병원법당을 맡아주실 스님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2시간 넘도록 오 씨와 대화를 나누면서 한 가지 놓친 게 생각났다. 바로 그가 마음에 새기고 사는 부처님 가르침이었다. 오 씨는 <금강경>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을 꼽았다. 이 가르침 덕분에 난치병어린이 돕기 성금모금 3000배 행사에 참여하고, 안거기간엔 100일간 매일 1000배를 올릴 수 있었다는 오 씨. 자신을 내려놓고, 다스리고, 담금질하기까지 <금강경>의 가르침은 그의 삶 전반에 깔려있었다.

흔히 사람들은 병원에 있는 게 환자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우리는 모두 예비환자입니다. 다만 언제 발병하고, 언제 죽을지 모를 뿐이라는 차이만 있죠.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곤 하지만 죽음 앞에 직접 섰을 땐 평온하기 쉽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반듯하게 잘 살아야 하고, 이것은 곧 잘 죽는 일로 이어질 겁니다.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내기만 한 저도 언젠가 이생을 떠나게 되겠지만 그때도 머리를 어루만져주는 손길이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제법 찬 바람이 불면서 영화 버킷리스트(2007)의 대사가 떠올랐다. ‘죽으면서 눈은 감겼지만 가슴은 열렸다.’ 오 씨의 손길은 환자가 눈을 감은 이후엔 닿지 않지만 적어도 마음의 빗장을 푸는 자비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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