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4차산업] ⑦ 나노기술과 불멸에 대한 욕망
[불교와 4차산업] ⑦ 나노기술과 불멸에 대한 욕망
  • 이상헌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교수
  • 승인 2018.04.13 15: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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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에 대한 욕망은 고통을 낳는다

인류의 역사상 요즘처럼 사람들이 건강과 장수를 위해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고, 그러한 투자의 보답으로 남보다 더 건강하고 더 오래살 수 있다는 믿음과 기대를 강하게 가지고 있던 때가 있었을까? 인간은 반드시 늙고 병들고, 종국에는 죽는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려는 경향이 만연해 있다. 노화와 죽음의 문제를 세부적인 문제들로 해체함으로써 얼마든지 늙는 것을 막고 죽음을 지연시킬 수 있다고 인간 대중들은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조깅을 하거나 요가를 하거나 운동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거나 좋은 지방을 섭취하려고 애쓰고, 먹거리를 선택할 때 원산지나 성분표시를 세심히 살피고, 몸에 좋다고 하는 차를 마시고, 종합비타민이나 건강보조식품을 매일매일 챙겨 먹고, 슈퍼푸드(superfood)에 대한 기사를 꼼꼼히 챙겨본다. 건강에 관련된 매체뿐만 아니라 어떤 매체에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에 대한 정보들이 넘쳐난다. 이러한 정보를 접하다 보면 건강이나 죽음이 정말로 우리 손에 달려 있는 것이라는 착각을 유발하기도 한다.

불로장생에 끊임없는 추구
유사 이래 인간은 불로장생을 기대하고 불멸을 흠모하였다. 세계 각지의 신화와 종교는 거의 모두 불멸에 대한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신화와 종교 속에 등장하는 신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불멸이다. 그리스신화의 신들은 보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노하고 기만하는 등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행동을 한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권능을 이용하여 모범적이지 않은 인간들이 하는 행동을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신과 인간이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리스신화의 신들은 인간과 달리 불멸한다. 그래서 머리를 쪼개도 죽지 않는다.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Athena)는 올림푸스 신들의 왕인 제우스의 머리를 가르고 태어났다.

영생위한 마음이 기술발전 이뤄
육체적 젊음 외 정신의 젊음 필요
‘무상’ 알 때 새로운 자유 열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바빌로니아 왕국을 건설한 수메르인들의 신화 속 최고 영웅 길가메시(Gilgamesh)는 영생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길가메시 신화는 거꾸로 인간에게 불멸은 도달할 수 없는 허황된 꿈에 불과하며 죽음은 인간의 운명임을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집트 문명의 상징처럼 알려져 있는 피라미드와 미이라는 불멸에 대한 고대 이집트인들의 열망을 나타내준다. 이집트 신화의 대표적인 신화인 오시리스(Osiris) 신화는 영생에 대한 갈망의 표현인 미라의 기원을 설명해준다. 미이라는 죽은 자가 저승에서 부활하여 영생을 누릴 수 있게 해달라는 염원을 담은 의식이다.

중국의 진나라 황제가 불로초를 얻기 위해 사방으로 선남선녀를 파견한 이야기는 나무도 잘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제주도에 가면 정방폭포 암벽에 새겨진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귀를 볼 수 있다.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찾아 제주에 왔던 서복(서불)이 다녀간 기록이라고 한다. 서귀포라는 지명도 서복이 글귀를 새겨 놓고 서쪽으로 돌아갔다고 해서 생겨난 명칭이라고 한다. 중국의 도교에는 불로불사의 영약인 금단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불멸에 관한 인간의 욕망은 수많은 소설과 영화에서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최근에는 과학기술을 통한 불로장생과 불멸에 대해 대중의 관심이 높다. 2005년 개봉된 영화 <아일랜드>는 인간 복제 기술을 이용해서 젊음과 건강을 유지하며 생명을 연장하는 기술을 소재로 했다. 2015년에 개봉된 영화 <셀프리스>에서는 노쇠한 몸을 건강한 사람의 몸으로 교체함으로써 불로장생할 수 있는 기술을 상상적으로 보여준다. SF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서는 인간의 몸을 기계 몸으로 교체함으로써 질병에 대한 걱정이 없이 건강하게 오래도록 살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우리가 사이보그가 됨으로써 거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노기술을 통한 불멸의 추구
최근에 등장한 과학기술 가운데 불멸성에 대한 추구와 가장 관련이 깊어 보이는 것은 역시 나노기술(nanotechnology)이다. 나노기술은 불멸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기술은 아니지만 나노기술에 대한 미래적 전망 속에 불멸을 가능하게 할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다.

나노기술은 1-100나노미터(10-9미터)의 극미세 단위의 물질을 다루는 기술이다. 20세기 최고의 발명품 가운데 하나는 개인용 컴퓨터의 탄생을 가져온 마이크로 칩이다. 칩은 마이크로 수준에서 물질을 다루는 기술의 산물이다. 나노 기술은 이보다 1000분의 1 작은 규모에서, 이른바 분자 이하의 단위에서 물질을 다루는 기술이다. 이렇게 초미세 수준에서 물질을 다룸으로써 우리는 자연에서 발견되지 않는 물질적 특성을 지닌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중세 시대 연금술사들의 꿈이 일부 과학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나노기술은 우리는 지금까지 알고 있는 어떤 물질보다도 강도가 높고, 탄성이 월등히 크고, 전기 전도성이 뛰어나고, 훨씬 더 가벼운 물질 등을 만들어낼 수 있다. 대표적인 나노구조물인 탄소나노튜브(carbon nanotube)는 인장력이 매우 뛰어나서 이것을 이용하면 지상과 우주정거장을 잇는 우주 엘리베이터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까지 가능케 한다. 또 스마트 나노물질로 표면 처리되어 청소가 따로 필요 없는 마룻바닥이나 벽면도 상상해 볼 수 있다. 나노기술이 응용되어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분야는 에너지, 의료, 군사, 생명공학, 정보통신 등 매우 다양하다.

의료 분야는 나노기술의 최대 성과가 기대되는 영역이다. 이른바 나노의학은 의료 분야의 혁신을 불러 오고, 장기적으로 의료혁명을 불러올 것으로 기대된다. 약이 필요한 곳에만 약물을 전달할 수 있게 약물전달 체계를 혁신함으로써 약의 효과를 향상시킬 수 있으며, 질병에 대한 정밀 진단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질병의 경보 체계를 개선할 수 있다.

그리고 나노의학의 마지막 단계는 분자 수준에서 세포를 치료하는 나노봇이다. 오래 전에 파인만(Richard Feynman)이 한 연설에서 ‘기계 외과의사’처럼 작동하는 ‘미세 기계’를 언급함으로써 나노봇의 개념을 제시하였다. 마빈 민스키(Marvin Minsky)는 ‘모세관을 따라 이동해서 살아있는 세포로 들어가 치료하는 극소 기기’를 드렉슬러의 접근법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만일 드렉슬러의 기대대로 된다면,‘질병을 치유하고, 노화를 되돌리고, 우리 신체를 과거보다 더 빠르고 강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노의학’의 저자인 로버트 프레이타스(Robert Freitas)는 적혈구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산소를 공급할 수 있는 인공적혈구, 인체에 침입한 병원체를 우리 몸의 면역체계보다 더 잘 발견하고 파괴하는 인공 대식세포, 신체 안에서 수술을 하는 수술용 나노봇, 필요한 세포에 정확하게 약물을 전달하는 인공제약세포 등에 대해 언급하면서 나노의학의 무한한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프레이타스의 예상대로 세포를 수복하는 나노봇이 등장한다면 인류는 불멸을 얻게 될 것이다. 나노봇 덕분에 우리가 막아낼 수 없는 질병이 없게 되며, 웬만한 신체적 손상은 손쉽게 회복될 것이다. 세포를 언제나 최상의 상태로 유지함으로서 끝없이 젊음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기술을 통한 불멸 추구에 대한 불교적 반성
최근 이른바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거론하고 있는 기술을 통한 불로장생과 불멸에 대한 추구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공학적으로 접근한 결과에 의존한다. 죽음을 과거처럼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기술적 혁신을 통해 인간의 수명을 늘릴 수 있다는 믿음에 암암리에 사람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 라이너스 폴링이 생명을 분자들 간의 관계로 본 견해를 생각나게 한다. 이런 사고는 인간의 몸을 기계라고 이해한 데카르트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18세기 프랑스 사상가 콩도르세 또한 과학의 진보를 통해 인간의 수명이 무한히 연장될 수 있다고 믿었다.

나노기술을 활용해 불멸을 추구하는 태도에 대해 불교적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먼저, 죽음에 대한 이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양의 근대적 사고는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이해하는데, 그런 사고의 바탕에는 삶의 일회성에 대한 기독교적 가정이 깔려 있다. 불교적 사고는 죽음을 일회적 모순으로 파악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사윤회의 한 고리로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고 본다. 완전한 소멸로서의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인간의 무상성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없으며, 어느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생과 사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모든 존재는 생과 사를 거듭한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나고 죽는 것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본성이다. 그래서 생과 사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이러한 무상성을 이해한다면 죽음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불멸에 대한 욕망도 사라질 것이다.

나노기술을 통해 추구하는 불멸은 무엇의 불멸인가? 그것은 신체의 불멸이다. 육신의 생명을 끝없이 이어가고 지속시키고자 하는 욕망이다. 신체의 불멸은 곧 욕망의 불멸을 뜻한다. 권력이건 돈이건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더 오래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진시황이 다리 밑에 기거하며 하루에 한 끼니를 먹기 어려운 처지였다면 불로초를 구했겠는가? 그런데 불교에서 최고의 목표는 윤회의 사슬을 끊어 번뇌와 고통으로 부터 벗어나는 해탈에 있다. 불교는 끝없이 변화하고 생멸하는 생의 연속성에서 해방되고, 육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영원토록 오래오래 육신을 유지하고 욕망을 따라가는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불멸에 대한 욕망은 지금, 여기를 영속적으로 붙잡으려는 것이다. 연기하는 모든 것에는 자성이 없어,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한 것이다. 그러므로 양극단의 어느 하나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불멸에 대한 추구는 무상한 인생에서 한 상태를 붙잡으려는 무모한 시도이다. 모든 존재는 그 업에 따라 윤회하는 것인데, 기술적 수단을 강구하여 현재의 상태, 혹은 가장 선호하는 상태를 유지하고 고정시키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성취될 수도 없을 듯하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 보면 찰나에 불과한 한 순간의 상태나 형태를 붙잡으려는 시도가 성공할 수 있을까? 제법무아(諸法無我), 흔히 나라고 불리는 것을 포함하여 고정불변의 실체란 없다. 불멸에 대한 추구는 바로 없는 그것을 붙잡으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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