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몰입해서 오직, 오로지 놓아라!
나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몰입해서 오직, 오로지 놓아라!
  • 대행스님
  • 승인 2018.04.13 1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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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족하게 다 그렇게 있으니까 진실하게 통신이 되게 해야

 

마음의 문 활짝 열려면

질문 스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내 안의 심봉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청년입니다. 내 안의 근본에 모든 것을 맡겨 놓는 공부를 해 나가다 보니 근본이 분명히 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건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안의 근본을 발견하고 싶은데 저의 근본과 저 사이의 칸막이를 활짝 젖히려면, 마음의 문을 활짝 열려면 어떻게 공부를 해 나가야 하는 것인지요.

답변 주인공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허공이라 하면 찬 거나 뜨거운 거를 모를 텐데 아무리 비어서 허공이라 할지라도, 허공 같다 할지라도 그 있다는 생각 때문에 아주 면밀하게 크고 작다, 짜고 싱겁다 하고 사계절을 알 수 있는 겁니다.

있다는 생각, 또 없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렇습니다. 없다는 생각이라든가 있다는 생각이 다 동일합니다. 그 생각 자체가 나는 것이, 바로 그 생각 속에서 수없는 생각을 해내는 그것이 바로,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때와 용도가 생기면 그냥 나오는 거죠. 신기하지 않아요? 참 신기하죠.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그냥 용도가 닥치면, 예를 들어 누가 찾으면, “여보!” 하고 부르든가 “아버지!” 하고 부르든가 하면서 찾는다면 아주 여여하게 해내는 그 자체가, 찰나찰나 해내는 마음 자체가 바로 우주를 살릴 수도 있다 이런 소립니다.

우리가 하루 이십사 시간 살아나갈 때에 ‘한다, 안 한다’ 생각을 하고 삽니까? 한다, 안 한다 생각 없이 삽니다. 그러다 닥치면 그냥 닥치는 대로 받아들이고 넉넉하게 해내고 합니다. “아버지!” 하면 아버지 노릇, “얘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친구로서 여여하게 해내고, 거기서 그냥 상대방 사람의 용도를 보고 그 사람의 과정을 벌써 익힌 사람이라 그냥그냥 여여하게 나오죠, 모두가 다.

그러니까 나를 내가 찾는다, 내가 나를 찾아야 한다 하는 걸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내가 나를 찾는다고 해야 합니까? 그러면 나의 그림자를 두 개를 놓고 하나는 찾고 하나는 찾는 사람에게 보여 줘야 할 겁니다, 아마. 그래서 찾는다가 아니라 그냥 “놔라” 이랬습니다. 둘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드리는 건 나를 찾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말하는 놈이, 보는 놈이, 듣는 놈이 바로 그놈이니까요. 한 놈이니까 “나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몰입해서 오직, 오로지 놓아라.” 이러는 겁니다. 오로지 거기에다 몰입해서 놓으라는 겁니다. 놓는 작업을 하게 되면 스스로 들고 나는 것이 그대로, 들고 남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자동적으로 “아버지!” 하면 그대로 아버지 역할을 해내듯이 스스로 들어오고 스스로 또 내는 거죠. 그렇게 여여하게 작용을 하는 겁니다.

반야심경에 “고정됨이 없이” 이렇게 했죠. “고정됨이 없어서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다” 이렇게요. 바로 여러분이 공했기 때문에 고정됨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보고 듣는 거, 말하는 거, 가고 오는 거, 만나는 거, 차를 타는 거…. 시발점이 종점이고 종점이 시발점이니까 종점도 없는 거를 알라는 겁니다. 하여튼 이렇게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그대로 하나로 한 군데서, 한 군데라고도 할 수 없는 데서, 쥘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데서 그 많은 모두가 나온다는 거를, 자동적으로 여여하게 나고 든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열어젖힐 칸막이가 따로 없는 겁니다.

나를 이끌어 가는 선장은 나한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선장과 내가 상봉을 해야만 자리가 잡히는데 자리가 잡히려면 심봉이 있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고서 자꾸 입력을 해야 완벽하게 자리를 잡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실천에 옮기게 됩니다. 조그만 거든 큰 거든 실천에 옮기는 분들도 많이 계시리라고 봅니다. 어쩌다 한번 실천을 하게 되고, 어쩌다 한번 느끼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떻게 생각하면 문이 열리는 것과 같은 겁니다. 차차 그렇게 하다 보면 문이 활짝 열리게끔 됩니다. 더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질문 사람들은 살면서 가끔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라고들 합니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남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느 날 저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했다가 기독교 신자인 지인으로부터 경멸의 눈초리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자식이지 누군 누구야?” 하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과연 나의 존재는 무엇일까요?

답변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모습은, 마치 다섯 개의 손가락이 모두 각각 다른 이름과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독립된 개체라고 할 수 없이 한 손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들도 누구 한 사람 빠짐없이 제각기 생겼고 제각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거대한 한 뿌리에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공생·공심·공용·공체’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늘 말을 합니다만, 우리 육신을 끌고 다니는 장본인은 나무뿌리와 같습니다. 나무뿌리에서 수분, 철분을 흡수해서 올려보내고 위에서는 공기력과 태양력을 흡수해서 내려보내는 것이 정맥 동맥이 돌아가듯 나무를 성장시킵니다. 푸르르게 살도록 말입니다.

또 비유컨대 콩을 심어서 콩나무가 됐다면 콩씨로 있던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겠죠? 콩씨가 콩나무로 화했으니까요. 여러분 모습이 콩싹이라면 그 콩싹은 또 콩씨를 열리게 합니다. 현재 여러분이 가지고도 과거로 돌아가서 콩씨를 찾는다면 아마 백 년이 걸려도 못 찾을 겁니다. 그래서 콩나무가 없어도 콩이 없고, 콩이 없어도 콩나무가 없는 것입니다.

거사님께서 이 세상에 나오질 않았다면 뭐가 있겠습니까? 상대성 원리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도 있고 종교도 있고 또 불교도 있다고 하는 거지, 내가 없는데 뭐가 있겠습니까? 태어나 살면서 고정되게 보고만 있으면 목석이라고 하고 고정되게 듣고만 있으면 귀머거리라고 할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고정된 게 하나도 없으니 그대로 내가 한 바가 없이 여여하구나.’ 하는 거죠. 윗눈썹과 아랫눈썹이 그렇게 가까이 있으면서 함께 작용을 하는 것과 같은데 너무 가까워서 그런지 자기를 못 보는 겁니다. 그대로 여여하게 살면서도 마음으로는 집착과 관습과 모든 얽힘을 붙들고 부자연스럽게 만들어 놓는 거죠. 사방이 다 터졌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누구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 ‘그렇게 내가 누구인가 하고 생각나게 하는 그놈만이 내가 누구인지를 진정으로 알게 할 수 있다.’ 하고 밀어 넣으세요. 어느 누가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자기를 수억겁을 거쳐서 이끌어 온 장본인, 주인공만이 진정으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항상 내 마음 안에서 들고 나는 모든 생각들은 주인공이라는 용광로에 다 집어넣으시고 마음 편안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내가 누구인가?’하는 생각이 들면
그렇게 내가 누구인가 하고 생각나게 하는 그놈만이
내가 누구인지를 진정으로 알게 할 수 있다고 밀어 넣으세요.

환희심이 며칠 안 가고 사라져요

질문 스님 법문을 들을 때면 환희심이 넘치고 그 충만함을 이루 말할 수 없는데 며칠이 지나면 아무것도 잡히지 않고, 다시 망상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현상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첫째 주 법회 때 법문을 들었을 때도 다른 불자님들의 질문이 모두 저의 질문인 것처럼 절실하게 느껴졌지만, 해답을 알고도 그때뿐이고 답답함은 여전하니 어떻게 하여야 제대로 관하는 것인지 그 길이 보이질 않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하는 걸까요?

답변 인간에게는 이미 마음을 마음대로 쓰면서 자유롭게 살라고 허락이 돼 있습니다. 마음을 마음대로 쓰는 자유자재권이 붙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마음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이것은 한다, 저것은 못한다, 또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가 없다, 할 수 있다 하는 결론을 미리 지어 버리고 맙니다. 생각이 그렇게 붙어 돌아가면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데 말입니다.

근본이라는 것은 에너지요, 영혼이라는 것은 그 에너지를 담아 가지고 있는 통과 같습니다. 그 통은 마음을 내게 하되 마음을 어떻게 내라 하는 것은 없습니다. 또 마음은 자기 몸을 다스립니다. 그러나 몸을 다스리는 데는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몸속에 있는 팔만사천의 자생중생들이 내 마음의 신하가 돼서 움죽거려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이 업으로 인해서 자기가 지은 대로 나오는 것에 속아서 자꾸 떠밀려서야 되겠습니까. 자기 속에서 보는 거와 듣는 거와 냄새 맡는 거와 감각, 지각을 모두 소유하고 있으니까 ‘이렇게 나오는 것이 잘된 건가, 안 되는 건가.’ 하고 안팎을 다 보고서는 ‘잘못된 것도 그 속에서 나온 거니까 잘되게 하는 것도 너밖에 없어.’ 하고 다시 맡긴다면 그것이 정신계로 직접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무명도 업보도 다 제거하는 직결의 문입니다. 그리고 마음 편안한 살림살이를 가져오는 문입니다. 생명의 수명을 좀 길게 한다거나 짧게 한다거나, 자유로운 마음을 갖게 하는 것도 역시 거기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직결문을 두고도 ‘나는 죄가 많아서, 나는 뭐가 어떻고, 안되고, 이런 거는 되고…’ 이러는데 그건 여러분의 살아온 관습 때문입니다. 마음이란 체가 없어서 우주 바깥에도 한 찰나에 갔다가 올 수 있는 겁니다. 왜 마음이 이 지구 바깥을 못 벗어납니까. 우리가 연못 속에서, 우물 속에서 여기가 제일이라고 하면서 바다로 못 나가는 것뿐입니다.

모습이 있는 거는 움죽거리는 대로 한계가 있지만 마음이라는 건 한계가 없습니다. 에너지 주머니, 마음 내는 거, 마음 내게 하는 거, 마음은 육체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포함되어서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을 낼 때에 잘못된 거라면 현재 의식의 나는 모르지만 ‘당신만이 올바르고 잘되게 할 수 있어.’ 하고 거기다 놓고, 또 잘되는 건 감사하게 놓아서 새 물로 바꿔 쓰란 말입니다. 안 되는 거는 구정물과 같지만 체가 없는 거고, 되는 것도 체가 없어서 그것이 훌떡 돌아서 현실에 새 물로 바꿔 쓰게끔 나온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왜 자기 주인공을 믿지 못합니까? 근본을 믿어야 마음을 내 주고 마음은 육체를 움직이면서 지혜를 넓히고 다스리면서 나가지 않겠습니까?

이러니저러니 생각을 하고 인식을 하는 대로 내버려 두지 말고 ‘이렇게 인식하게 하는 당신만이 지혜를 넓혀 가고 이 심부름꾼을 밝게 이끌어 갈 수 있지 않은가.’ 하고 관하신다면,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들이 오히려 나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경제적 발원은 결국 기복인지요

질문 진정 원하는 것을 바라며 기도를 하는데, 내 주관적인 판단으론 절실하지만 남이 볼 땐 경제적인 바람으로만 보이는 발원이라면 결국 기복적인 것밖에 안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 기복으로만은 발원하지 않으려고, 그저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사하게 해 주십사 하고 기도하고 있지만 절실한 것은 경제적인 문제거든요. 그리고 내 마음속의 주인공에게 많이도 말을 하지만, 닥쳐 있는 현실에 거짓말도 하고 내가 나를 속인 적도 많아서 주인공 찾기가 너무 민망할 뿐입니다. 아직도 어둠 속에 헤매는 제게 길을 좀 일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원심을 낸다고 하죠. 즉 말하자면 한마음이 되는 거죠. 한마음으로 구성해서 통신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보통 그냥 공부하는 거 같지만, 이거는 심성의학이기도 하고 심성과학이기도 하고, 심성 천문학이기도 하고, 심성 천체물리학이기도 합니다. 원을 낸다는 말은 한마음이란 뜻입니다. 한마음을 내 가지고 보니깐 바깥 경계도 한마음으로 돌아가더란 얘기예요. 안에서 한마음이 다 한다는 것을 나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원자에서 입자로 화해서 한마음으로 다 조절을 한다.” 이렇게요.

그러니까 내가 한마음을 냈는데 그것이 어떻게 비는 겁니까? 내 마음 속으로 하는 거는 비는 게 아니라, 바깥으로 찾고 비는 것이 기복입니다. 내 안에 있는 주인공에 관하는 거는 한마음으로 중심에 원을 세우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을 세운 그 마음 한 생각이 입자로 화해서, 즉 말하자면 통신이 되면, 첫째 한 찰나에 대뇌를 통해서 중뇌에서 책정을 합니다. 그래서 사대로 통신이 되면 그 모든 입자들이 다 한마음으로 구성이 돼서 제각기 또 벌어집니다. 여기는 이렇게 돼야 하고, 저기는 저렇게 해야 하고…, 제각기 말입니다. 똑같은 일을 하러 가는 게 아니라, 말을 해서 될 일이면 그렇게 하고, 물질로 갖추어져야 될 일이면 또 그렇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움죽거려야 될 일이면 또 그렇게 해서 전부 각각 나가서 소임을 마칩니다.

그런데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즉 얼른 쉽게 말하자면 마음 속에서 입자가 나가서, 보살 응신이 나가서 모든 거를 다 해결하고 둘이 아니게 또 들어와야 될 텐데 마음이 불안하고 못 미덥고 하니깐 이것도 저것도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살 궁리를 하지 마시라 이겁니다. 살 양으로 애쓰지 말고 죽으려고 애쓰지도 말라는 겁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우리가 천부적으로 일체를 다 구족하게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다 구족하게 가지고 있단 얘기입니다. 내가 그렇게 잘해서가 아니라 내가 구족한 것을 알고서 여러분한테 일러 드리는 겁니다. “구족하게 다 그렇게 있으니까 통신이 되게 해라.” 이러는 겁니다. 자신 안으로 진실하게 말입니다.

영가가 보이고 대화도 나눈다는데

질문 저의 도반 중 어떤 사람은 영가들이 자주 보이고 영가와 대화도 나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공부를 아주 잘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영가가 들어 몹시 괴로워하던 중 선원과 연결이 되어 마음공부를 하고 이젠 괜찮다고 합니다. 과연 영가를 보는 사람이 공부를 잘하는 것인지요. 그리고 아직 마음공부를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영가가 들어와 괴롭히는 경우는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요. 어떤 사람은 영가들과 계속 그렇게 교류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영가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는데 그런 공부가 왠지 저는 진짜 마음공부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도움 말씀 청하옵니다.

답변 공부를 하다 보면, 공부라는 게 무슨 별다르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나와서 이 세상에 사는 게 공부예요. 항상 말씀드리지만 생명이 이 세상에 나오면 불(佛)이요, 나와서 세상 돌아가는 걸 배우는 것이 바로 교(敎)예요. 그러니까 불교가 별다른 게 아니죠. 우리들의 살림살이를 빼놓고 불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간편하게 생각하세요. 어렵게 믿지 마시고 간편하게요. 내가 움죽거리는 것이 다 공부니까요. 참선이고요. 마음을 가라앉히면, 잔잔하게 가라앉히면 그냥 좌선이 되고요, 누워서 보면은 와선이 되고요, 우리가 일을 하다가 생각을 하면 행선이 되고요, 모두가 그대로 참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공부를 하다 보면은 안으로 들여서, 바깥으로 내서 믿는 게 아니라, 안으로 들여서 믿고 거기다 일거수일투족을 다 맡기고, 잘됐으면 ‘감사하구나!’ 하고, 또 잘 안됐으면 ‘안된 것도 거기서 나온 거니까 되게 하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 놓고, 이렇게 굴려가다 보면 말이 자꾸 하고 싶어질 때가 옵니다. 여기서 감응이 되고 좀 지나고 보면 말이 자꾸 하고 싶을 때가 와요. 그 말이 하고 싶을 때에 어떠한 말을 해야 하느냐? 남이 물어보면 관하는 도리만 얘기해 주고 자기가 이만큼 배웠다고 내세우지를 말고, 또 그다음에 이것이 옳은 거라고 내세우지 말며, 안됐다고 내세우지 말라 이겁니다. 안됐다 됐다, 이게 옳다 그르다, 또 나는 공부를 하다 보니까 이만큼 갔다 이런 말을 안 해도 자기가 말하는 거 보면 자기가 내세운 게 되거든요. 이거는 지금 자기가 없는 도리를 배우는 겁니다.

항상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죠. 만약에 그러다가 바깥으로 끄달리고 자기를 내세우고 잘됐다, 못됐다 이런다면 공부는 꽝입니다. 제자리를 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바깥으로 자꾸 끄달리면서 가다 보면, 그만 자기는 빈집이 되고, 자기 선장은 간 곳이 없고 바깥으로 끄달리게 되죠. 그렇게 하면 영계성으로 인해 구차한 일들이 벌어지죠. 그래서 무슨 호흡을 한다고 하면서 바깥으로 끄달리고, 몸으로 끄달리다 보니까, 몸도 바깥이거든요. 물질계거든요. 그렇게 바깥으로 끄달리다 보니까 영계가 들려서 야단인 사람도 있고, 상기가 돼서 귀로 들려서 야단인 사람도 있고, 몸이 떨려서 야단인 사람도 있고, 몸을 부지를 못하고 그냥 뛰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가정이 파괴가 되고, 자식들은 이리저리 떨어지게 되는 수가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 기복으로 믿으면서 바깥으로 자꾸 끄달리고 무슨 부처님, 무슨 부처님을 부르면서 바깥으로 끄달리는 사람들이 특히 영계성에 걸리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이집 저집 떠다니면서 기웃거리는 그런 영령들이 들어서게 돼 있거든요. 그러니 영령이 들어서는지도 모르고 그게 자기 몸에 있다는 자체도 모르고,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면은 그냥 아주 정신이 혼란스러운 사람이 돼 버리고 맙니다. 자기 혼자 그렇게 되는 것도 뭐한데 가정이 다 문제가 되니까요. 그래서 여러분한테 조심하라고 하는 것은 나쁘다 좋다, 밉다 곱다 또는 잘한다 못한다를 염두에 두고서 항상 꼬집고 마음으로 미워하고 ‘저런 거 그냥 차라리 죽어서 없어지는 게 낫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과 그러한 말이 모두 업이 돼서, 말을 하면 구업(口業)이 되고, 마음으로 지으면 의업(意業)이 돼서 입력이 됩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한층 더 이것은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죠. 그래서 “바깥에서 닥치는 거, 미운 거 고운 거를 밉다 곱다 하질 말고 안에다 ‘저 사람이 저렇게 하는 것이 저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그 의식에서 그러는 거니까 당신만이 해결할 수 있어.’ 하고 거기다 맡기고 부드럽게 말하고, 부드럽게 행동해 줘라.” 이런 말을 항상 하죠. 그래야만이 모든 업이 녹아 버린다는 얘기죠. 그러는 분들도 많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 그러더니 자꾸 관하고, 부드럽게 말해 주고, 부드러운 행동 해 주니까 어느 날부터 그냥 술을 먹는 게 없어지고 그렇게 가정이 화목하게 돌아가더라고요.

그 마음이 그렇게 밉고 그냥 악하게 말을 하고 그렇게 되면은 점점 더 악은 모아지는 겁니다. 없어지는 게 아니라. 그러니 여러분께서 극히 조심을 해야 하고, 남을 미워하거나, 또 자식들도 그렇게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악한 마음이 녹아지기를 지극하게 관한다면 그거는 틀림없이 송두리째 없어지는 겁니다. 길고 짧고 더디고 좀 빠르고는 있을지언정 꼭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녹음기에 녹음을 했더니 자동 녹음이 됐는데, 자동으로 또 거기다 입력을 하면 그 앞서의 입력이 없어진다고 항상 말해 드렸죠. 그러니까 잘라도 아니 되고 끊어도 아니 됩니다. 업을 끊으려고 해 봤자 칼로 물 베기죠. 그게 안 됩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그렇게 해서 없애는 도리밖에는 없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거 소홀히 듣지 마십시오. 첫째에 이 공부하는 데에 도로아미타불을 만드는 그런 문제가 있는 것은 잘됐다, 못됐다 또는 옳다, 그르다 이런 말을 남한테 하고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 제일 문제인 것입니다. 그다음에 또 내가 아무리 속이 상해도 내 안으로 놓고 부드럽게 얘기해 주고 부드럽게 행동을 해야만이 그 업식이 녹고, 그 수없는 광년을 거치면서 나온 업식이 다 녹아야 하늘에서 인정을 받고 해인(海印)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열쇠를 얻는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우리가 공부해 가면서, 습을 떼어 가면서 모든 거를 같이해야 됩니다. 이 세상에서 얼마나 이 모습을 가지고 살겠습니까? 이 모습을 가지고 살려면 얼마 안 남았습니다. 한 철 사는 기간 동안에, 그거를 다 다스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요다음에 또 나와서 또 고생을 해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극히 조심하셔서 우리가 요다음 생에 또 나와서 고생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지금 현실에서도 자기 위로는 부모와, 아래로는 자식들과도 염주가 항상 같이 꿰어 있듯이 그렇게 연관성이 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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