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비선이란 무엇인가? - 4) 왜 자비선(慈悲禪)인가

인공지능 위험과 그 치료제
또 미래의 인류에 위험을 줄 수 있는 것으로 인공지능(AI)이 있다. 인공지능은 스스로 추론하고 학습 판단한다. 그래서 소설을 쓰고 작곡을 하고 게임을 하더라도 전략을 짜서 이기기도 한다. 자기학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공지능을 탑재한 자동차와 로봇 등이 봇물 쏟아지듯 등장하는 가운데, 이러한 최첨단 기기들이 해킹에 매우 취약하며 바이러스에 노출될 경우 인류에 끔찍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입증한 실험결과가 발표되었다.

미국의 사이버 보안 솔루션 업체인 IO액티브는 일본 최대 IT기업인 소프트뱅크가 제작해 이미 시중에서 활용되고 있는 로봇 나오(NAO)’ 2대를 대상으로 랜섬웨어 공격을 실험했다. 랜섬웨어란 악성코드의 일종으로 시스템을 잠그거나 데이터를 암호화해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든 뒤 이를 볼모로 금전을 요구하는 악성 프로그램이다.

실험결과 IO액티브는 나오의 보안시스템을 뚫고 랜섬웨어 공격에 성공했고, 연구진은 이후 나오가 보인 반응을 담은 동영상을 공개했다. 만일 아군을 보호하고 적을 섬멸하는 프로그램이 입력되어 있는 전투로봇이 피아를 가리지 않고 죽이는 바이러스에 감염된다면 대량살상이 가능하므로 인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다.

보리심 뿌리인 자비수행 자비선
자비심을 키우는 데 주안점 둬
으로 닦아 깨달음 얻듯이
주객 없는 본성 보는 원리 같아

따라서 인공지능에 자비를 프로그램화하여 심을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자비명상프로그램도 심어야 할 필요가 있다. 자비선 명상수행의 목적은 명상수행을 통해 대비심을 일으켜 그 이타심으로 지각 있는 존재를 돕는 것이다. 즉 고통 받는 중생을 효과적으로 돕기 위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보리심이며 자비선은 바로 이 보리심을 일으켜서 실천하는 명상수행방법이다.

자비는 중생의 고통에 대한 인식에서 생기며, 보리심의 뿌리이다. 그래서 자비는 중생을 구제하는 명상수행의 바탕이며 수단이며 깨달음이다. 자비는 우주만물의 모든 것들의 관계를 서로 소통시킴으로써 중생들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한다. 자비는 연기와 공성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공지능에 자비심과 자비선명상프로그램을 심는다면 온 지구가 평화와 안녕으로 가득 찰 것이다.

자비선은 자비심을 키우는데 주안점을 두고 자비희사(慈悲喜捨)를 일으키는 자비수관(慈悲手觀), 공성을 아는 마음을 관찰대상으로 하는 자비공관(慈悲空觀), 걷기선() 명상인 자비경선(慈悲鏡禪),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차명상인 자비다선(慈悲茶禪)으로 구성되어 있다.

2. 자비선 명상

1) 모든 명상의 원리

모든 명상방편은 각기 모양만 다를 뿐 원리는 모두 똑같다. 즉 환으로써 환을 닦는 이치이다. 원각경보현보살장에서 비유하기를 두 나무를 서로 비벼 생긴 불이 그 불을 만들어낸 나무를 다 태워 나무가 재와 연기로 사라지듯, ()으로써 환()을 닦는 것 또한 이와 같다고 한다.

두 나무는 관찰대상과 그 대상을 관하는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직접인식인 직관과 추론의 분석이다. 사마타, 위빠사나와 그 대상의 접촉에 의해 일어나는 불은 바로 지혜이다. 불을 지혜로 표현하는 것은 법구경 주석서에 산불을 경책 삼아 아라한이 된 비구이야기가 있다.

불길이 지나가면서 크고 작은 모든 나무들을 태워버리듯이 나 또한 고귀한 도()의 지혜라는 불로써 크고 작은 모든 족쇄와 집착과 번뇌와 욕망을 다 태워버리면서 나아가리라.”

이 지혜의 불에 의해 주관과 객관이 같이 소멸한다. 이 자리가 곧 중생과 부처가 평등하고 법계가 하나일 줄 아는 깨달음이다.

사마타도 남방 빠알리 전승과 북방 산스크리트 전승의 같은 점도, 다른 점도 있다. 같은 점은 한 대상에 대하여 집중명상하는 것이다. 다른 점은 빠알리 전승의 사마타는 즉, 청정도론40가지나 있다. 그 중 하나를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둥근 원판을 앞에 두고 심상(心像)을 만들어 그 심상에 집중하여 선정을 얻는 것이다. 반면 산스크리트 전승의 대승 사마타는 공성을 알고 있는 위빠사나 마음이 집중 대상이 된다.

위빠사나에도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남방 빠알리 전승의 위빠사나는 신수심법(身受心法)을 정념으로 관찰한다. 첫 번째 위빠사나 지혜는 몸의 현상과 마음의 현상이 다름을 관찰하여 알고, 두 번째 지혜는 몸과 마음이 조건에 의해 일어남과 사라짐을 구분하여 아는 등 이러한 알아차림으로 삼법인을 관찰하여 열반에 이르는 16단계의 위빠사나의 길이 있다. 단지 알아차림하여 즉각 구분하여 아는 것이다. 머리로 헤아려서 아는 것이 아니다. 반면 북방 산스크리트 전승의 대승 위빠사나는 사마타 삼매를 의지하여 몸과 마음의 결합인 오온을 분석하여 공성을 드러내는 방법이다. 즉 머리로 분석 사유하는 것이다. 대소승이 모두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통하여 환으로써 환을 제거하여 주객이 사라지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동일하다.

2) 지관 응용과 돈오법

첫째는 사마타[]를 선행한 뒤에 위빠사나[]를 닦는 것이다. 둘째, 위빠사나를 선행하고 난 후에 사마타를 닦는 것이다. 그러나 위빠사나만 명상하거나 사마타만 명상하게 될 때는 깨달음을 얻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셋째, 사마타를 성취하고 사마타 삼매를 의지하여 오온인 몸과 마음을 분석하여 공성을 드러내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는다[止觀雙修]. 이 때 더 이상 분석하려야 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위빠사나 삼매를 얻는다. 사마타 삼매와 위빠사나 삼매와 하나가 되면 곧 공삼매(空三昧) 또는 일행삼매(一行三昧)라 한다. 이 삼매 속에서 일어난 무분별지혜에 의해 법계 평등의 깨달음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보다 더 간편하고 빠른 명상법은 법문을 듣자마자 곧바로 깨닫는 네 번째 방법이 있다. 초기경전에 보면 붓다의 법문을 듣고 바로 깨닫는 이들이 많았다. 이 방법은 조사선(祖師禪)의 즉각 깨닫는 돈오법(頓悟法)이기도 하다. 다만 붓다의 언구는 활대와 같이 자비롭지만 조사의 언구는 활줄과 같이 곧아서 직설이 특징이다. 그래서 조사의 언구아래 곧 바로 깨친다는 것이다. 조사의 언구(법문)가 질문자의 말과 생각을 여의게 하고 주객의 환이 사라진 마음의 본성에 곧바로 들어가는 돈오법이라는 것이다. 말과 생각을 여의게 하고 주객이 없는 본성을 깨닫는 것은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통한 깨침의 원리와 같다. 조사선의 돈오법을 좀 더 살펴보는 것도 자비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조사선은 돈오법이다. ,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사람의 마음을 곧게 가리켜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는 것이다. 육조단경에서 혜능 스님도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그리하면 마음의 본래면목이 드러난다고 했다.

본래면목인 마음의 본성은 열반(涅槃), 원각(圓覺), 진여(眞如), 보리(菩提), 법계(法界), 심광명(心光明), 청정심(淸淨心)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조사의 가르침에서도 무저발(無底鉢), 몰현금(沒絃琴), 무진등(無盡燈), 무근수(無根樹), 취모검(吹毛劍), 심월(心月), 심광(心光), 심인(心印), 심경(心鏡)이라고 하여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모두 같은 뜻을 가진다.

그것은 본래 그러하므로 조작이 없다. 조작하는 그 어떠한 것도 용납할 수 없다. 따라서 굳이 공을 관하거나 선정에 들 필요가 없다. 그리고 한 생각, 허망한 생각[妄念]은 잘못된 기억이다. 마음의 본성인 본래면목은 이런저런 분별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의 본성을 바로 보아 깨닫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전생에 선정과 지혜를 닦은 이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한다. 혜능선사와 남악회양선사의 대화에서 여실히 알 수 있다.

육조: 어디서 왔는가?

회양: 숭산에서 왔습니다.

육조: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회양 스님은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다가 8년만에야 홀연히 깨치게 된다. 돈오법은 즉각 깨달음이 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육조 혜능 스님과 마조선사시대에는 말 한마디에 즉각 깨닫는 일이 어렵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나 되는 것이 아니므로 선지식아! 법에는 돈점(頓漸)이 없되 사람에게는 영리함과 둔함이 있다. 미혹한 사람은 점점 계합하고, 깨달은 사람은 단박에 닦느니라. 스스로 본마음[本心]을 아는 것이 본성을 보는 것이다. 깨닫고 나면 본래 차별이 없지만, 깨닫지 못하면 긴 세월동안 윤회하는 것이다라고 혜능 스님은 육조단경에서 설하고 있다. 그래서 후대로 내려오면서 무심(無心) 공부하는 여러 방편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수행을 무심공부라고 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초조(初祖)로 불리는 보리달마(菩提達磨)는 제자 혜가대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단외식반연(汝但外息攀緣) 내심무천(內心無喘) 심여장벽(心如牆壁) 가이입도(可以入道) 네가 다만 밖으로는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는 마음이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만 도에 들어갈 수 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