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스님 사형수 차순석

차 씨의 영치금을 받은 김일 씨는 그돈을 다시 차씨 아이들의 장학금으로 돌려줬다.

비록 죄를 짓고 수감된 재소자들이지만, 그 뼈아픈 인연에도 들어주어야 할 이유와 사연들이 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죄를 짓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또한 자신이 죄를 지을 것이라고 생각해본 사람도 없었다. 사형수 차순석 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교도소에서 출가한 최초의 사형수였다.

1989년 대구교도소에서 사형수 차순석(당시 31세) 씨를 처음 만났다. 어느 날, 사형수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1987년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고 사형수가 된 차 씨였다. 사형수들의 이야기를 담은 나의 책을 읽고 자신의 처지와 너무도 비슷해 편지를 쓰게 됐다고 했다. ‘스님, 제게도 어머니가 계십니다.’라는 구절에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죄목은 ‘미성년자 유괴 및 살해’였다. 1987년에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았다. 죄목의 ‘미성년자’는 차 씨 처남의 아들이었다. 그가 그토록 끔찍한 죄를 지은 것은 아내와의 불화에서 시작됐다.

최초의 교도소 출가 사형수
초우 스님으로부터 10계, 불명받아
영치금 김일 씨, 불우이웃에 회향
차 씨 아이들에게 다시 돌아와


경남 의령군 지정면 유곡리 양동마을. 차순석은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의령군의 4H클럽 회장과 청년회장, 새마을 지도자를 몇 년 씩 맡아 할 정도로 모범적인 청년이자 농군이었다. 누구보다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그는 합천 태생의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의 불행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신혼의 단꿈은 짧았다. 친정이 부산이었던 그의 아내는 도시생활에 익숙해 있었다. 농촌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그의 아내는 하루하루 불평이 쌓여갔다. 아내의 불평은 결혼 한지 10년이 지나, 두 딸과 막내아들까지 세 아이를 낳고서도 이어졌다. 점점 더해 갔다. 결국 그는 아내의 뜻에 따라 세 아이들과 함께 도시로 나갔다. 하지만 농사밖에 모르는 그가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막노동판의 잡일과 공장 직공뿐이었다. 이번엔 차 씨가 도시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몇 달 만에 아내를 설득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내의 도시생활에 대한 미련은 여전했다.

한창 바쁜 농번기였다. 그의 아내는 젖먹이 아들을 떼어놓고 친정 부산에 다녀오겠다며 길을 나섰다. 이틀만 다녀오겠다던 그의 아내는 일주일 만에 돌아와 당장 도시로 나가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했다. 너무나 화가 난 차 씨는 아내의 얼굴을 때렸다. 그의 아내는 퉁퉁 부운 얼굴로 짐을 싸서 집을 나갔다. 젖먹이 아들이 울기 시작했다. 차 씨는 기가 막혔다. 며칠 뒤, 그의 처남들이 그를 찾아왔다. 평소에도 차 씨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처남들이었다. 그의 아내는 행방불명 상태였다. 폭행을 당하고 친정으로 내려온 여동생이 행방불명까지 되었으니 처남들 역시 이성을 잃고 차 씨를 찾아온 것이다. 차 씨의 아내는 큰 처남 집에 있었다. 결국 차 씨는 합의이혼서에 도장을 찍었다.

아직 젖을 떼지 않은 막내가 매일 울었다. 보름을 넘게 차 씨는 젖동냥을 다녔다. 울다 지친 아들의 얼굴을 보며 그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는 할 수 없이 막내를 업고 아내를 찾아갔다. 그러나 처남 집에 도착한 차 씨는 아내를 만나지도 못한 채 문전박대를 당했다. 젖 한 번 물려보지 못하고 차 씨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 씨는 아이를 업은 채로 술을 들이켰다. 집에 간신히 도착했지만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우는 아이 곁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샌 그는 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처남 집으로 향했다. 처남은 없고 아이들만 있었다. 그리고 비극이 일어나고 말았다.

차 씨가 처남의 아이들을 유괴했지만 그가 처음부터 아이들에게 끔찍한 짓을 하려했던 것은 아니었다. 똑 같이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처남의 처사가 너무나 괘씸했다. 똑 같은 심정을 느껴보게 하려고 했던 것이 어이없고 끔찍하기 짝이 없는 죽음까지 이어진 것이다.

수감번호 1324. 차순석. 그는 사각의 좁은 감방 안에서 매일 예불을 올리고 지장경과 금강경을 독송했다. 그리고 사흘에 한 번씩 나에게 참회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렇게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불법에 기댔던 그는 1990년 9월 4일, 국내 최초로 교도서에서 출가한다. 조계종 前 총무원장 정초우 스님으로부터 10계와 불명(진공)을 받았다. 차 씨는 재소자들에게 설법을 해주며 힘겨운 그들의 마음을 만져주었고, 감방청소 등 궂은 일은 항상 앞장서서 했다. 동료들은 자신들에게 들어온 영치금을 차 씨에게 주기도 했고, 그의 삶이 너무나 안타까워 구명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차 씨는 자신에게 들어온 영치금을 모아 불우한 이웃에게 보냈다. 그의 영치금은 당시 병마와 싸우며 일본에서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던 前 프로레슬러 김일 씨에게까지 전해졌다. 하지만 사연을 들은 김일 씨는 그 돈을 차마 받을 수 없었다. 그 돈은 다시 차 씨의 아이들에게 장학금으로 돌아갔다.
1995년 차 씨의 형이 집행됐다. 나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그의 구명운동을 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이를 유괴하고 살해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모까지 나섰지만 결국 차 씨는 죽음으로 죄를 씻어야 했다. 그는 마지막에 “소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다음 생애서 열심히 일하다 죽어서 몸으로 보시하고 싶다”고 했다. 다음 생뿐만 아니라 10생을 그렇게 살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생에는 스님으로 다시 이 세상에 오고 싶다고 했다.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도 10생의 인연을 놓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인연 인연이 간단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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