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불교학연구소 특별강연...석일자(釋日慈) 스님

주제 : 베트남 불교의 역사와 현황

석일자(釋日慈) 스님은… 베트남불교협회 이사회 위원, 베트남 호치민시 승가대학교 부총장을 맡고있다. 또한 베트남불교연구원 부원장과 중앙승려교육부 부총장, 중앙포교원 부원장을 역임하고 있다.

1963년에는 불교도들이 나서
투쟁으로 군사정부 무너뜨려
계리(契理)·계기(契机) 지키는것
베트남불교 가장 중요한 가치

서로의 불교를 배운다는 것은 불교학에 대한 열린 사고와 깊은 안목을 키워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동국대서 한국과 베트남, 양국의 불교 교류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는 자리가 열렸다. 베트남 호치민시 승가대학교 부총장 석일자(釋日慈) 스님은 4월 5일 동국대학교 문화관에서 ‘베트남 불교의 역사와 현황‘을 주제로 강의했다. 스님은 “베트남 불교는 베트남 문학, 예술, 음악, 건축 및 불교에 큰 영향을 주었고, 말하자면, 베트남인의 삶의 일부가 되었다”고 말했다.

베트남 불교는 기원전 3세기에 시작해 2000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소카 황제는 인도의 국경을 넘어 아프리카의 서쪽과 중앙아시아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계 나라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수많은 불교 선교사를 해외로 보냈다.

불교전래와 수용베트남에 처음 불교를 전한 사람은 중국 후한 말에 〈이혹론(理惑論)〉을 쓴 모자(牟子, 165-251)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그 이전부터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승려가 베트남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한문 불교도 그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베트남 불교는 고대부터 10세기까지 크게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고대 중국 3개의 불교센터(Lo Yang, Ring Ch'eng, Luy Lau) 가운데 교주(Giao Chau, 交州)의 수도인 루이 라우(Luy Lau)센터는 1세기 한 왕조 때 제일 먼저 설립됐다.

동부 한 왕조 역사 기록에 따르면 루이 라우(Luy Lau)는 점차 남 중국과 양쯔강(Yangtse River Valley)에 이르는 인도 승려들로부터 새로운 믿음을 채택한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고대 불교의 베트남 불교 특징 중 하나는 인도 선교사들이 중국에 퍼지기 오래 전에 교주에 소개되었다는 것이다.

스님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베트남에서 가장 선진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곧 스님이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이 북속(北屬)돼 있던 말기, 승려들은 선진 중국으로 유학했고, 또 중국 승려들이 베트남으로 오는 등 교류가 빈번했으며, 학문이나 사상에서 승려들은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베트남이 혼란기를 지나 최초의 완전한 독립 국가를 이룬 것은 1009년 이공온(Ly Cong Uan, 李公 蘊)에 의해 열린 이조(Ly trieu, 李朝) 때부터다. 이조(李朝)는 불교를 보호하여 많은 절을 짓고 승려들을 보호했다. 특히 이태조(太祖: 李公 蘊)는 창업초기 10개의 사찰을 지어 불교를 흥륭시키는 한편, 송(宋)에 사절을 보내 대장경을 구입하기도 했다. 이태조(Ly Thai To) 왕과 그의 후계자들은 불교를 공식적으로 국가 종교로 인정했다.

그러나 진조(陳朝)가 망하고, 후여(後黎)가 성립(1428)하자, 불교는 크게 후퇴하는 양상을 보였다. 후여(後黎)는 중국 명(明)의 영향을 받아 유학을 크게 숭상했으며,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불교는 쇠미현상이 뚜렷했다. 특히 후여의 성종은 1461년 전국에 사찰을 새로 짓는 것을 금했을 뿐만 아니라, 사령(寺領)을 엄격히 제한했다

17세기에 베트남에 온 많은 중국 승려들은 연종(蓮宗)와 조동종(曹洞宗) 같은 선종을 설립했다. 그들은 따뜻하게 받아 들여졌으며, 동시에 죽림파(Truc Lam Ch'an, 竹林派) 종파의 복원을 장려했다.

19세기말에 이르러 베트남은 서구 식민세력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1900년 라오스ㆍ캄보디아와 함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규합되면서, 정치적 독립은 또다시 어려움에 빠졌다. 1945년 태평양전쟁의 종결과 동시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독립동맹은 8월 혁명에 성공, 완조(院朝)를 무너뜨리고 외세로부터 조국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프랑스는 다음해 다시 베트남을 지배하려고 전쟁을 시작했고, 베트남민족주의 세력은 이에 항전해 마침내 1954년 완전 승리했다. 미국은 응오딘지엠 (Ngo Dinh Diem)을 대통령으로 하는 베트남공화국을 사이공에 만들었다.

이에 대해 임제종의 종장(宗長) 틱꽝득 스님은 인권과 종교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서 비폭력 항쟁에 참여했고, 정부에 여러 번 간곡한 편지를 보내 불교탄압을 중지해 달라고 촉구했지만, 지엠 정권의 불교탄압은 중단되지 않았다. 1963년 남부베트남 불교도들은 반정부운동을 전개하여 숱한 희생을 치루며 10개월 만에 군사정부를 무너뜨렸다.

응 오딘 지엠 정부가 멸망 후, 1975년에 나라가 통일되고 나서 틱 찌투 스님이 이끄는 베트남 불교 여러 계파를 통합운동이 있었고, 1981년에는 베트남 불교승가회가 설립됐다. 1981년 하노이에는 불교학원(Higher Buddhist Studies Institute)이 건립됐고, 1984년에는 호치민시에 또 불교학원 한 곳이 더 설립되었다. 수학하는 승려들은 불교학원을 졸업하고 나서1989 년에 설립 된 베트남 불교연구소에서 연구자로서 근무하거나 국내외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베트남의 대표적 종파
우선 선종이 있다. 6세기 중국에서 인도인 보리달마(Boddidharma, 菩提達磨) 선사부터 설립된 종파다. 불교에 따라 명상(dhyana)은 ‘마음의 진정’을 의미한다. 불교는 깨달음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일체법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일이다. 선불교에 따르면, 명상할 때에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생각이 ‘마음 망상’ 즉 중생의 산란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른 선종은 베트남에서 발전되었다.

정토종(淨土宗), 정토 불교는 불교 종파다. 정토교 또는 정토문(淨土門)으로 불리기도 한다. 정토종은 아미타불의 구원을 믿고, 염불을 외어 서방극락정토(西方極樂淨土)에 왕생(往生)하여 깨달음을 얻는다고 설하는 종파이다. 정토종은 〈대무량수경〉( 大無量壽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아미타경〉(阿彌陀經)의 이른바 ‘정토3부경’(淨土三部經)에 바탕을 두고 인도 불교에서 용수(龍樹) ·세친(世親) 등의 사상적 조직화를 거쳐, 중국 불교에 이르러 발달하였다.

밀종이나 밀교는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신주독송을 주장하는 종파이며 달마종으로도 알려지고 있다. 대승불교 말기인 7세기 후반에 갑자기 융성한 유파로, 대승불교의 〈반야경〉(般若經), 〈화엄경〉(華嚴經)과 중관파(中觀派)· 유가행파(瑜伽行派) 등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여기에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 밀교의 독립은 〈대일경〉(大日經), 〈금강정경〉(金剛頂經) 등 근본경전의 성립과 더불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베트남에서 소개된 밀교는 독립적 종파로서 존재하지 않았고 민간신앙인 무당, 법술, 부적 등과 잘 용합되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베트남 걸사 불교 (乞士派), 베트남 탁발승 불교는 1944년에 민당꽝(Minh Dang Quang)조사가 설립자다.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기초해서 세우며 대승불교 및 초기불교를 융합하는 종파이다. 20세기 후반에는 베트남 불교 진흥 프로그램에 앞장을 섰고 베트남불교 발전하기에 큰 기여를 하였다.

베트남 남방불교는 인도 승려들한테서 가장 먼저 베트남에 소개됐다. 하지만 북방불교는 중국에서 수입된 후 점차적으로 기존의 남방 불교를 대체하고 있었다. 현재 남방 불교는 대부분 남부지역에서 크메르(Khmer) 민족 내 주류를 이루고 있다. 1930년 후부터 호송, 부우 전, 선법스님 등의 한하여 캄보디아의 남방불교 포교를 시작했다.

베트남 불교의 특징전파 및 통합의 경로에서 불교는 항상 두 가지, 즉 계리(契理)와 계기(契机)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 두 요소 중 하나만 빠진다면 불교는 더 이상 불교가 아니다. 계리와 계기를 유지하고 개발한 불교는 베트남과 다른 나라로 전파된다.

베트남에 전파된 후 불교의 각 종파들은 서로 뒤섞여 있다는 특징이 있다. 비니다류지는 밀교와 섞여 있으며, 고승, 선승들은 불법을 능통하면서 법술에 대해 뛰어난 신통력까지 보유하고 있다. 또한, 선종은 정토종과 잘 혼합해 명상하면서도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염불도 하고 있다. 19세기 초기 전국을 통일한 완(Nguyen) 왕조의 정책은 불교의 민중종교적 특성을 강화하였고, 베트남불교의 절충적 성격을 더욱 심화시켰다.

남쪽 사찰에는 북방불교와 남방불교를 합한 경향도 보여주고 있다. 많은 사찰에는 남방불교 형식에 따라 석가모니불만 신봉하면서 북방불교 교리를 강설하고 수지하고 있다. 그래서 법복도 노란색 가사 외에 간색, 회색 법복등도 흔히 같이 사용됐다. 베트남은 최초에 불교를 수입했고, 그 다음 북방불교는 도교를 받아줬다. 마지막으로 유교까지 용합하며 ‘삼교동원’ 및 ‘삼교동귀’로 만들었다.
베트남불교가 사회주의 정권 아래서도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이유는 베트남불교가 중생, 곧 인민의 편에 서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또 국가 통일 이후에는 국민의 재교육이 필요했는데, 베트남 남부의 사찰은 저녁 때 주민들이 많이 모이는 재교육 장소로 활용됐다.

하지만 사찰은 거의 설법을 하지 않으며, 예불의식만 진행하는 까닭에 신도들에게 수행과 불법을 가르치지 못 한다. 대부분의 신도들은 불경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고 자동적으로 탈교하는 현황이 심각해지고 있다. 또한 서구 국가들이 베트남불교통일을 이용하여 종교의 자유와 인권에 대한 압박을 가하기 때문에 베트남 정부를 비롯한 베트남불교는 서방 국가 간의 정치적 도전을 맞서야만 한다.

오랜 역사를 통해 20세기 동안 베트남 불교는 베트남의 상승과 하락에 상관없이 국가의 생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왔다. 도입 초기부터 베트남 불교도들은 불교가 2000년 이상 다른 종교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던 사랑, 관용, 동정심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느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알려지지도 않았거나 잘 알려진 베트남 승려와 신도들이 베트남의 방식과 풍습으로 색칠 된 독특한 베트남 종교로 여겨져 왔다. 한편, 베트남 불교는 베트남 문학, 예술, 음악, 건축 및 불교에 큰 영향을 주었고, 말하자면, 베트남인의 삶의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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