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야부당 초우 스님, 영결·다비 엄수

3월 30일 통도사 대웅전 앞 마당에서 초우 스님의 영결식이 봉행됐다.

일생(一生)은 도리어 봄날의 꿈과 같고,

꿈을 말하나 이 또한 몽중몽(夢中夢)이라.

임종(臨終)의 참 소식 나에게 묻는다면,

꿈 깨인 자유로운 걸음 처처(處處)에 걸림 없네. 야부 돌!

꿈을 깬 자유로운 걸음으로, 처처에 걸림이 없는 모습으로 초우 스님이 임종게를 남겨두고 사바세계를 떠났다.

통도사(주지 영배)330일 제 19대 조계종 총무원장이자 조계종 명예원로의원인 야부당 초우 스님의 영결식을 대웅전 앞 마당에서, 다비식은 연화대에서 엄수했다.

 

영결식은 영결법요 행장소개 법어 추도사 조사 헌화 및 분향 다비 순으로 진행됐다. 이 자리에는 조계종 종정 진제 스님, 총무원장 설정 스님, 원로회의 의장 세민 스님, 중앙종회의장 원행 스님 등 사부대중 2000여명이 함께 했다. 대중들은 다비 이운과 다비식 까지 뒤를 따르며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원로회의 의장 세민 스님은 초우 스님은 산문에 머물 때는 눈 푸른 안목과 대기 대용을 갖춘 백납 운수였고, 밖에서는 이사(理事)를 겸비한 만행 보살이었다다시 이 땅에 오셔서 가는 곳마다 자운을 일으키고 진리의 법고를 울려 불일(佛日)을 더욱 빛나게 하소서라고 애도했다.

총무원장 설정 스님은 초우 스님은 선과 교를 두루 겸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종단을 아끼는 마음으로 소임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통도사 주지와 부방장, 총무원장 원로의원 등을 맡아 통도사와 총무원의 토대를 단단하게 했다열반에 드시는 순간까지도 수행자의 본분을 소홀히 하신 적이 없고, 대중포교에 큰 자취를 남기셨으니, 우리 종도들은 스님의 자취를 따라 부단히 수행 정진 할 것이다고 말했다.

중앙종회의장 원행 스님은 스님께서는 항상 출가 할 때가 결제요, 깨달아야 해제하고 말씀하셨다부디 속환사바하셔서 다시 한번 결제의 뜻을 펼쳐달라며 애도했다.

 

초우 스님은 유년 시절부터 마을 인근에 위치한 해인사를 자주 들러 불법의 연을 짓기 시작했으며, 194715세 봄 해인사 동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초대 종정 효봉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 했으며 1958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교학에 남 다른 열정을 지난 초우 스님은 이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서 운허 스님께 수학하고 월하 스님을 법은사로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이후, 스님은 출가사문으로 선수행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1961년 오대산 상원사 청량선원에서 첫 안거를 지냈다. 상원사에서 4안거 성만과 해인사, 통도사, 동화사 선원과 구미 도리사 선원에서 20안거를 성만했다. 당시 스님은 전국 선방에서 말뚝 수좌라는 이름으로 회자됐다. , 병중에 있는 오대산 한암 스님의 제자 보문 스님을 입적에 들 때 까지 시봉해 함께 수행한 일화로 자비 보살이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

1981년 조계종 제19대 총무원장을 역임 했으며, 1984년 조계종 비상종단운영회 의장, 1988년 사단법인 마하야나 불교문화원 이사장과 스리랑카 마하보디회 한국 대구지회 이사장으로 한국 불교 국제화에 포문을 연 주역이다.

초우 스님은 326일 오전 65분 법랍 72, 세수 86세를 일기로 영축총림 도량의 자장매 향기 그윽한 아침, 세연을 다하고 원적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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