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도 각자 자기를 의심하지 말고 자기의 불성을 믿어야

 

오래간만에 여러분과 같이 한자리를 했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외국이라는 데를 한시도 쉬지 않고 비행기를 십여 번을 갈아타면서 돌았습니다. 그것이 다 여러분의 염원에 의해서 한마음으로 해 주셨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잘 다녀오지 않았나 하는 감사한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뿐만 아니라 일체제불은 한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거니깐요. 만 명이든 수십만 명이든 전부 각(覺)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한 도량의 한 부처니까요. 진리가 하나지 둘은 아니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한테 감사드립니다.

수많은 중생들이 더불어 사는 내 몸이 혹성이듯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바로 우리의 집이자 혹성입니다. 이 만법의 기틀과 기본을 모른다면, 우리는 마음을 낼 수가 없어서, 항상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생각도 해 보지 못해서, 집도 망가지고 또 저 혹성의 집도 망가질 수 있는 그런 계기가 있을 수도 있죠. 우리 몸이 망가지듯 말입니다. 내 몸뚱이 속의 중생들이 한마음으로 뭉쳐 주지 않는다면 내 몸인들 견뎌 나겠습니까? 사는 날까지는 건강하게 살다가 옷을 벗고 싶을 때 벗어야죠. 그러나 옷은 벗지만 그 마음의 근본은 영원하죠.

여러분이 내 마음속에 있는 그 중생들을
다스릴 수 있는 진짜 공부를 해 나가실 수 있다면
미래의 정신세계도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미래에서 본다면 현재가 과거인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과거라고 하는 것은 바로 미래이자 과거입니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둘이 아니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현실 자체가 공(空)해서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여러분은 바로 나라고 할 수 없는 그런 위치에서 공부들을 하셔야 되겠죠. 이것을 기본적으로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시급한 문제입니다.

어디를 막론해 놓고 지금은 인공위성으로 인해서 전파가 두루 하고 세계를 누비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그보다 더 빨리, 빛보다 더 빨리 전파를 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살고 있는 대로 이것이 우주 법계에 두루 입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몸뚱이가 이렇게 있지만 또 정신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그 정신세계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면 도저히 정신세계의 나를 맛보지 못합니다. 나와 같이 있으면서도 같이 있지 않고, 같이 있지 않으면서도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도리가 심오하고 그 뜻이 너무나 엄청나다고 말하는데 여러분은 엄청나다는 걸 실감을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질질 끌려 다녀야만 하는 노예가 돼야 되겠습니까? 정신세계의 노예가 된다면 우리는 현실세계에서 자유스럽게 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걸 모르시고 ‘나는 죄를 짓지 않았는데, 나는 잘못한 게 별로 없는데 왜 이렇게 고가 닥칠까?’ 하면서 근심과 걱정과 병고와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안다면 내가 어디에서 온 것도 알 것이고, 내가 지금 뭐를 하고 있는 것도 알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대처해야 된다는 도리도 알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사십구 년을 설하시며 그 뜻을, 마음의 도리를 가르쳐 오셨습니다. 지금까지도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을 저버리고 항상 이론으로만 ‘마음, 그거.’ 하는데 그렇게 이해만 해서 마음을 증득하는 건 아닙니다. 이해만 해 가지고 ‘내가 알았다. 나는 그만하면 됐어. 네가 알면 얼마나 알아.’ 이런 그 자기의 아만과 아집을 버리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물속에 뛰어들어서 물 깊이를 알며 어떻게 땅속에 들어가서 햇빛이 들어오는 걸 알겠습니까? 그리고 허공에 불바퀴가 돌아가는 거를 어찌 걸리지 않고 앞뒤 없는 불바퀴를 넘나들겠습니까?

우리는 마음을 밝혀서 정신세계로 치달아야 하는 지금 이 시대가 너무 바쁜 시대라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옷을 입고 있는데 이 옷을 입은 것도 머리 깎은 것도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허망한 게 아니라 무상(無常)하다고 해서, 길고 짧은 게 두루 무상하다고 해서 무명초(無明草)라고 이거를 깎아 버린 겁니다. 이것은 여러분한테 표현이고 또 공부하는 데 방편이자 현실입니다. 여러분이 그 도리를 알아서 우리가 사는 것이 그대로 실상임을 깨닫는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미래의 세계도 여기에서 생각하고, 보고 듣고 생각하는 그 도리가 전부 법계에 정보가 돼서 정신세계의 미래도 개척을 해 나가면서 현실에서도 개척을 주장할 수 있는 그런 도리가 됩니다. 우리의 이 몸뚱이만 내가 아닙니다. 이 몸뚱이 속에는 또 얼마나 많은 중생이 살고 있습니까. 그 중생 속에 부처가 있음으로써 그 부처가 원자라고 한다면 바로 그 원자 속에 또 입자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내 마음속에 있는 그 중생들을 다스릴 수 있는 진짜 공부를 해 나가실 수 있다면 미래의 정신세계도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높고 낮은 게 없이 모두가 벗이고 모두가 한마음 아닌 게 없기 때문에 다스릴 수 있다 이 소리입니다. 내가 우뚝하게 잘나서가 아니라 모든 마음과 마음이 말입니다. 이어지는 마음 말입니다.

예전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뜻을 한마디 여러분한테 묻겠습니다. 전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머무르는 데서 생각하지 말고 머무르지 않는 데서 생각하는 도리는 무엇인고?” 하고 물었습니다. 여러분한테 그렇게 물었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잠시 말씀을 멈추시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부처님 당시의 말씀이기 때문에 머무른다는 표현으로 바꾸었습니다. 내가 그것을 바꾸어서 말한 거는 바로 ‘고정됨이 없으니, 그대로 우리가 여여하게 놓고 가는 거니 걸림 없어라’ 하는 소리나 똑같죠.

우리가 살아나가는 게 누가 살아나가는 겁니까? 여러분 몸뚱이가 살아나가는 게 아니라 바로 정신이 여러분 몸뚱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안의 의식들을 지배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불성의 기둥, 불기둥과 더불어 영혼이라는 것을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 영혼이 생각을 해서 바로 여러분을 지배하고 있으니 지배하는 동시에 그 마음과 의식들을 전부 한꺼번에 둥글려서 한마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뭣고’ 화두를 갖는 것보다도, ‘이게 뭣고?’ 하고 십 년이 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나셨으니까 상대가 있고 상대가 있기에 여러분이 있는 거죠. 또 서로가 필요로 하는 겁니다. 생명도 둘이 아니요, 마음 씀씀이도 둘이 아니요, 몸도 모습도 모두가 둘이 아닌 까닭에 이 도리를 한마음으로 뭉쳐서 안다면 바로 여러분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바로 그게 둘이 아닌 까닭에 ‘너’가 뚜렷하게 있고 ‘나’가 뚜렷하게 있는 거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도리에 걸림이 없다면 누가 뭐래도, 누가 잘못했다 잘했다, 너는 못 쓴다 쓴다, 너는 이쁘다 밉다, 지위가 높다 낮다 하더라도 여여하게 마음 씀씀이를 쓰는 거죠. 이런 공부하는 데는 모든 것에 걸리지 않고 남을 원망하지 않고 탐내지 않고 아집을 갖지 않고, 항상 겸손하면서 뜻보시와 법보시, 부드러운 말보시를 해서 뜻으로나 말로나 마음으로나 모두가 자비하고 인의롭고 폭이 넓게 이렇게 살아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그렇게 됐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머무르는 데에 생각을 내지 말라’ 이 뜻이 뭡니까? 모든 것을 ‘이쁘다. 밉다. 너는 잘못했으니깐.’ 그렇게 고정되게 보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그게 머무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은 강도질을 하다가도 회개를 하면은 참 착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환경에 의해서 어떠한 문제가 일어났다, 어떠한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한생각 돌린다면 그 사람은 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도 어떠한 경우에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착하다 또는 착하지 않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지 말라. 이런 것을 머무른다 하는 겁니다. 그런 거를 염두에 두면은 바로 머무르는 것이 되고 걸린다 이 소리죠.

인생이라는 것은 한 철 캠핑을 왔다가 한 철 나고 한 철 막을 거두고 가는 건데 우리가 원점으로 돌아가면 오늘 이 세상, 지금 사는 이게 과거가 됩니다. 미래의 정신세계로 가서, 즉 말하자면 세 갈래가 주어집니다. 하나는 악, 하나는 그저 중심을 지킬 수 있는 사람, 하나는 각(覺)을 이룬 사람, 이렇게 해서 단계가, 그러니까 모든 게 이름을 옥황상제라 하고 모두 깨달은 사람들은 전부 한자리, 한마음, 한 발 딛는다는 뜻이죠. 그러니 여러분은 과거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미래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미래의 정신세계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계발하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죠. 여러분이 공부를 해서 잘만 생각을 해 주신다면 우리는 세계를 둘 아니게 다스릴 수도 있죠. 우리는 자유스럽게 내가 될 수 있고 나툴 수 있으니까요. 모두가 나 아님이 없는 도리를 알아야 나 아님이 없는 도리의 그 활용(活用)을, 중용을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생기지, 둘이 아닌 도리를 모르고 부처님 말씀처럼 여기에 머무르고 저기에 머무르다가는 내 갈 길을 가지 못하고 더디며 정신세계의 맛을 못 보며 항상 끄달리면서 아마 노예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여기서 오늘은 질문을 받으려 합니다. 여러분 중에서 질문을 하시면 자상하게 여러분과 같이할 것입니다. (삼배를 올리는 질문자를 향하여) 인제 삼정례(三頂禮)를 일정례(一頂禮)로 하십시오. 우리는 몸을 수련시키는 게 아니라 정신을 수련하는 겁니다.

질문자1(남) 삼처전심(三處傳心)에 대해서 큰스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선종선감』 에 이르기를 선(禪)은 불심(佛心)이라 했고 교(敎)는 불화(佛話)라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일찍이 가섭존자(迦葉尊者)에게 세 곳에서 전심한 것을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 하는데 첫째, 염화미소(拈華微笑) 둘째, 다자탑 전분반좌(多子塔 前分半座) 셋째는, 곽시쌍부(槨示雙趺)가 있습니다. 한마음 도리에 비추어 큰스님의 가르침을 듣고자 합니다.

큰스님 첫째, 염화미소라고 하는 것은 네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닌 까닭에 법을 전하신 겁니다. 그 법이 둘이 아닌 까닭이죠. 둘째, 석존이 가섭에게 반자리를 내 준 것은 바로 한도량에 한자리다 이겁니다. 반자리를 내 주신 것도 한자리다 이거야. 한자리면서도, 거기 붙어 돌아가는 것은 한자리면서도 ‘네가 있고 내가 있구나’ 하는 그 도리에서 이 세상만사가 다 거기 붙어 돌아갑니다. 세 번째, 석존께서 관 속에서 두 발을 내보이신 뜻은 바로 한 땅에 한 발이다 이 소립니다. 그 뜻으로 생각한다면 깨달은 사람들에게만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여러분도 중생이나 부처가 한마음임을 돌려 깨달으면 이 도리를 알 것입니다.

여러분한테 그것을 가르치려고 방편으로 보여 주신 겁니다. 실지로 가르쳐 주신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조금도 각자 자기를 의심하지 말고 자기의 영원한 생명의 근본, 그 불성을 믿어라 이겁니다. 자연스럽게 믿어야지 거기다가 뭘 물어보고 자시고 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나는 그런 걸 원치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진실로 믿는다면 하늘이 깨져서 무너진다 하더라도 여여하게, 내일 죽는다고 하더라도 오늘까지 여여하게 아마 일하러 나갈 겁니다. 요새 외국에 가니깐 이런 소리가 많이 들렸습니다. 지금 지구가 망가질 일이 생기고 뭐, 생명이 다 위태할 일이 생기고 2000년대는 무슨 뭐가 어떻다고 그러던가요? 나 듣고도 잊어버렸죠. 여러분, 말씀해 보세요. 뭐, 종말이 온다고요? 그런데 그것은 여러분이 노예로 사니깐 종말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 도리를 모르고 산다면 종말이지만, 여러분이 이 도리를 안다면 둘이 아닌 까닭에 종말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다못해 물이 있다 하더라도, 흙만 있다 하더라도 종말은 아닙니다. 그것도 생각이 없는 게 아니고 생명 없는 게 아니고, 그것도 불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 존재가 생명이 없고 불 존재가 생명이 없다면 우리 생명들을 어떻게 이끌어 가고 있겠습니까?

지수화풍으로 된 이 몸뚱이가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흩어졌으면 우리 인간이 보이지 않겠지만 이게 한데 뭉쳤으니깐 사람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라고 존중한 겁니다. 그런데 그 부처라고 존칭하는 여러분이 지금 지수화풍을 갈래갈래 갈라놓고 먹습니다. 그러고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한 치라도 불성이 없다고 하며 부처님 법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아까 질문하신 것 가운데 이 세상만사 살림살이가 다 나옵니다. 석존께서 다자탑(多子塔)의 반쪽을 내줘서 같이 앉은 자리라는 그 뜻이 말입니다, ‘이어지지 않음이 없이 이어지는 까닭에 네가 있고 내가 있느니라, 이 세상만사가 다 그러하니라.’ 하는 그 뜻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참, 외국에서도 이 천주교나 기독교나 또는 티베트 불교, 통일교, 원불교 이런 데 말입니다, 우리 그 교재, 항상 다달이 나오는 법문 회보가 그리로 다 갑니다. 그것을 안 보내면 오히려 가지러 옵니다. 설법할 때 그걸 위주로 해서 하고 거기서 빼서 또 교재를 만든답니다. 이런 소리를 듣는 순간 ‘급하구나.’ 이 경전이 급한 거보다도 ‘이거를 한데 모아서 엮는 게 아주 급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세계적으로 청소년 협회가 있는데 거기에서도 자료가 없다고 자료를 청해 왔습니다.

여러분과 더불어 같이 공부하는 동시에 한마음이 되니까 좋아지는 결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마음으로 뭉쳐 줘서 늘 감사하죠. 여러분이 가정에서 그 도리를 모르면 내 몸도 이끌어 갈 수 없고 가정도 이끌어 갈 수 없죠. 사회도 이끌어 갈 수 없고, 그리고 국가도 이끌어 갈 수 없습니다. 국가를 이끌어 가려면 세계를 알아야 되고, 세계가 내 손 안에 들어야만이 국가를 일으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너 나 할 거 없이 둘이 아닌 도리를 알아야 내 가정을 지켜 나갈 수 있고요. 다른 질문 없습니까?

질문자2(남) 저희들이 공부하는 과정에서 큰스님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가르침을 받아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업에 의해서 오늘의 내가 있고 이생에서 심은 습에 의해서 미래가 있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둔한 저희들은 아직도 마치 짙은 안개에 가려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업이란 무엇이며 우리의 불자들은 어떻게 해야 올바른 진화를 할 수 있는지, 영(靈)과 불성(佛性)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다시 한번 소상하게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영(靈)이라는 것은 불성(佛性)하고는 다릅니다. 영이라는 건 보이지 않는 그 모습을 말하는 것이고, 모습 없는 그 마음을 말하는 것이지 불성은 아닙니다. 혼(魂)이라는 것도 ‘영’을 ‘혼’이라고 합니다. “영혼(靈魂)” 이렇게 하죠. 그러나 그 영혼이라는 것은 바로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릇에 따라서 좌우됩니다. 그래서 그 그릇에 따라서 작은 그릇이면 작은 그릇의 영혼일 것이고 크면 큰 대로의 영혼일 것입니다. 불성은 그대로 있으면서도 갖가지로 다르게 마음을 내는 것, 즉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하는 데 비유해 보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나가는 데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좋은 생각 나쁜 생각, 이렇게 하는 것을 이름 붙여서 영혼이라고 하죠. 그 영혼 하나가 만사를 잘못되게 할 수도 있고 잘되게 할 수도 있죠. 영혼이 불성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잘못되고 잘되는 거를 이끌어 가는 그 자체가 돌고 돈다는 뜻이죠. 그래서 영혼이라고 그러죠.

그런데 이 불성이라는 자체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잘못돼 나가는 게 아니라, 지금 우주에 불바퀴가 돌아가는 것처럼 불성에 이끌려서 우리도 같이 돌아가는 겁니다. 돌아가면서도 꿈쩍도 않는 것입니다. 돌아가면서도 돌아감이 없는, 더하고 덜함도 없는 그것입니다. 부처님은 내 마음의 그릇이, 그릇 없는 그릇이 있어야 한 찰나에 드셔서 묘법의 설법을 하시고 한 찰나에 나신다 이런 게 있죠.

아까도 얘기했지만 과거가 미래고 미래가 과거고 미래에서 볼 때는 현실이 과거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거에서 다시 올 때는 현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쪽에서 볼 땐 여기가 과거고 여기서 볼 때는 그게 미래입니다. 우리가 정신세계의 차원을 삼차원으로 볼 때, 영혼이 잘못된 일들을 했을 때에 자기 그릇대로 노는 것입니다. 생명은 다 똑같습니다마는 생각이 모자라서 그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달라지는 반면에 악도 있고 선도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옥황상제가 지배인이라면 그 지배인을 망가뜨리기 위해서, 즉 악이 선을 망가뜨리기 위해서 지배자가 될 양으로 그 정신세계에서도 싸움 아닌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디가 문제가 되느냐. 지금 현실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옛날에 젊은 부부가 살았는데 이 부부가 참 좋은 아들을 달라고, 이 세상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하게 다 자비하게 사랑하면서 이끌어 주는 그런 아들을 달라고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정말 그렇게 빌고 나서 아들이 생겼습니다. 부처님께서 그렇게 좋은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랬는데 아들을 낳자마자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혼자서 아들을 기르다가 얼마 안 돼서 어머니마저 죽어 버렸습니다.

그 엄마는 정말이지 부처님한테 진심으로써, 항상 마음의 인등을 켜면서 염원하다가 그대로 앉아서 죽고 말았습니다. 죽어서 턱 가 보니까 너는 지금 낳은 아들을 또다시 가서 낳아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이 성해서 이 세상이 모두 혼란이 와. 그러니까 너는 빨리 나가거라.” 그래서 또 여자로 태어났습니다. 그 명을 받고 여자로 태어났는데 그 아들은 벌써 죽어서 미래의 세계로 갔습니다. 그래 미래의 세계에 가서 보니까 애당초에 부처님의 뜻을 받아서 각(覺)을 이룬 사람이라, 생시에도 그렇게 마음에 의해서 보고 듣고 하는 대로 미래의 세계로 전파를 보내고, 그러는 한편 미래의 세계에서도 그 사람이 있으면서 지배를 했단 말입니다.

그랬는데, 계속해서 그렇게 나가야 할 텐데, 이 악에서 볼 때는 그 여자를 꼭 죽여야만 옥황상제가 또 지배를 하지 않게 될 수 있다 하는 생각에서 과거로 돌아왔습니다. 그 여자를 죽이려고. 그 여자를 택해서만이 그 영혼을 낳을 수 있고 배를 빌려야 하니까. 그래서 여자를 죽이려고 무진 애를 쓰는데 선에서 그거를 알고선 또 이쪽으로 구하러 보냈습니다. 미래의 세계에서, 즉 말하자면 정신세계에서 이 여자를 보호하고 살려야 된다는 뜻을 청했습니다. 내가 지금 급하니 당신의 그 전자의 아들의 뜻을 바로 이리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는 자기가 대신 그 여자를 통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또 낳아 가지고 그 아들이 이제 이 세상을 간파했습니다. 보면서 들으면서 또 이 누진(漏盡)으로서 결정을 내면서 이 세상을 두루 살피고 또 연방 그렇게 살피는 동시에 한 찰나에 과거와 미래를 드나드시니, 여기 가만히 앉아서 지배를 했다 이 소립니다.

그것이 부처님 세계의 한자리의 도리, 아주 차원 높은 도리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악은 선을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선의 주인공은 죽일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이 세상은 살기가 어지럽게 됩니다. 어지러운 세상이 되니 이 몸뚱이 혹성이 많이 죽게 되고 살기가 극난해지죠. 불안을 조성하고 방황을 조성하고 또 싸움을 조성하고 그러면 세상만사가 어지러워서 지구도 그렇고 모두 소멸되는 그런 작전이죠. 악이 지배를 하려고 하니까.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을 하시지 않았지만 그거를 풀어서 지금 얘기를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는 각자 너부터 알아야만이, 이 세상을 알고 이 세상을 알아야만이 네가 그렇게 지배를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여기 앉아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미래의 세계와 과거의 정신세계와 같이 한자리를 하고 돌아가니까, 너 나가 없이 같이 한마음으로 뭉쳐서 돌아가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다 이거죠. 그러니까 악을 전부 선으로도 만들 수 있는 것이죠. 모든 걸 용광로에 다 넣으면은 새 쇠가 아주 다양하게 나가듯이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악도 선도 그렇게 다 넣으라 하신 반면에 그중에도 “인연이 없는 중생은 어찌 할 수 없느니라.” 하신 것은 자기가 마음을 잘못 내서 저절로 독사 소굴에 태어나는 걸 말씀하신 거죠. 그래서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지옥도 이 자리에 있고 천당도 이 자리에 있고, 편안하게 자유 세상을 보내는 것도 이 자리에 있고, 부처도 이 자리에 있고 중생도 이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없고 현재도 공했으니까 없다.” 한 그 뜻을 가르쳐야만이 미래와 과거와 모든 것을 한데 합쳐서 세상을 똑바로 이끌어 가기 위한 방편이자 실천이죠. 여러분에게 얘기했으니까 이제부터 마음내고 실천하는 것은 여러분 몫이니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1년 4월 21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 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