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총림의 감원(監院)과 고원(庫院)

감원·오늘날 총무 소임
선원총림의 모든 일 총괄
고원은 선종사원의 본부

〈감원(監院)〉
감원(監院)은 오늘날 총무와 같은 소임이다. 당대(唐代)에는 ‘원주(院主)’ ‘원재(院宰)’ ‘사주(寺主)’라고 불렀고, 당말 오대(850-960)와 북송시대(960-1126)에는 ‘감원’이라고 불렀으며, 남송(1127-1279)·원대에는 ‘도사(都寺)’라고 불렀고, 명대에는 다시 감원, 또는 ‘감사(監寺)’라고 불렀다.
감원은 동서(東序) 4지사(감원·유나·전좌·직세) 가운데 서열 제1위이다. 남송시대에는 감원 소임이 도사·감사·부사로 3분되었으나 여전히 총 감독권은 도사(감원의 후신)가 가지고 있었다. 감원은 서무·행정·재정·살림 등 사원 관리 일체를 총괄·감독하는 소임으로, 승당(僧堂, 선당)의 책임자인 수좌(首座)와 함께 선원총림의 양대 요직이다.
6-7 년 전 오대산 월정사 스님들과 함께 일본 조동종 양대 본산 가운데 하나인 영평사(永平寺, 에이헤이지)를 방문한 적이 있다. 영평사는 도겐(道元, 1200~1253)이 24세-28세까지 영파 천동사로 가서 천동여정으로부터 조동선을 배우고 돌아와서 세운 도량으로, 중국 전통 선종사원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영평사는 후쿠이(福井)의 깊은 산악에 위치하고 있는데, 4월 10일인데도 잔설(殘雪)이 있었고, 상큼한 선기(禪機)가 육근(六根)과 오음(五陰)으로 물든 육신을 청량하게 했다. 미리 연락을 취한 덕에 답사 후 귀빈실에서 다과를 했는데, 외빈을 맞이하는 대표 스님의 직함이 감원이었다. 영평사에서 감원은 관수(貫首, 방장) 다음 직책인 것을 보면 고풍이 잘 전해 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감원은 수좌의 직무 영역인 승당(僧堂, 선당)과 관련된 일을 제외하고는 총림의 모든 일을 총괄·감독한다. 감원의 임무에 대하여 장로종색의 〈선원청규〉에는 “감원이라고 하는 직책은 선원총림의 모든 일을 총괄한다. 관청에 나아가는 일, 관리나 시주들이 찾아오면 영접하는 일, 길흉 등 경조사, 그리고 재정의 출입과 회계, 금전과 곡식의 유무(有無), 수입과 지출 등을 모두 담당한다.”
또 “감원은 어진 이와 대중을 받들며, 상하를 화목하게 하고 대중이 늘 환희심을 갖게 해야 한다. 권세를 빙자하여 대중을 경멸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 또 그 책무에 대해서도 “고사(庫司, 창고)에 재용(財用)이 부족하면 스스로 힘을 다하여 대책을 강구하되, 주지(방장)에게 알려서 마음을 쓰게 해서는 안 되며, 더구나 그 실정을 대중들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고 있다.
다음은 감원과 관련한 유명한 선문답이다. 법안문익(885∼958)이 주지로 있던 총림에서 감원 소임을 맡고 있던 현칙(玄則 監院)과 법안 사이에 있었던 문답 내용이다.
보충 설명을 하자면,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납자 지도 시스템 가운데에는 ‘입실’ 혹은 ‘독참’이라고 하여, 개별지도 방식이 있었다. 수행승과 방장을 독대하여 자신의 공부를 점검, 지도받는 것으로 5일에 한번 씩 있었다.
그런데 당시 감원 소임을 맡고 있는 현칙은 단 한 번도 입실 독참에 오지 않는 것이었다. 제도를 위반한 것인데, 승당의 일반 납자도 아니고 감원이 독참을 하지 않는다고 방장이 뭐라고 하기도 곤란했다. 그래서 법안문익은 참다못해 하루는 그를 불러서 물었다.
“(현)칙감원(玄則監院)! 그대는 어째서 입실(入室) 독참(獨參)하러 오지 않는가?” 현칙이 말했다. “화상! 저는 이미 청림화상(靑林. 靑峰이라야 맞음) 처소에서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입실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법안이 말했다. “아, 그런가? 어디 한번 말해 보게.” “제가 청림 화상께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물었고, 청림화상이 “병정동자 내구화(丙丁童子 來求火)”라고 답했는데, 거기서 깨달았습니다.”
법안 화상이 말했다.
“좋은 법문이네. 그런데 혹 그대가 잘못 알까 걱정이네. 다시 한 번 더 설명해 볼 수 있겠소”
“병정(丙丁)은 (목·화·토·금·수 5행 가운데) 불(火)에 속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불이 불을 찾고 있다(以火求火)’는 말로서, 곧 자기 자신이 바로 부처인데 다시 부처를 찾고 있다는 뜻입니다.”
법안 선사가 말했다. “칙감원, 그대는 과연 잘못 알고 있었네.”
현칙은 매우 화가 났다.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그래서 그는 곧바로 감원 소임을 사직하고 법안의 문하를 떠나가 버렸다.
법안 화상이 대중들에게 말했다. “만일 현칙이 다시 돌아오면 구할 수 있지만, 돌아오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네.”
그런데 현칙이 가다가 문득 생각해 보니 법안 선사의 문하에는 무려 500여 명이나 되는 많은 납자들이 수행하고 있는데, 나를 속일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발길을 돌려 법안 화상을 찾아갔다.
법안 화상이 말했다. “다시 내게 물어보게. 그러면 내가 그대를 위하여 말해 주겠네.” “화상,무엇이 부처입니까” 법안 선사가 말했다. “병정동자 내구화(丙丁童子 來求火, 불이 불을 찾고 있다.” 현칙은 언하에 대오했다.
현칙은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관념적 지식으로만 이해했을 뿐, 정말 자기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인식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법안 선사의 일갈(一喝)에 비로소 진정으로 자기가 부처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똑같은 말도 언제,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듣는 사람에게는 매우 다르게 들린다.

일본 영평사 고원(庫院) 전경. 고원은 주방과 식자재 창고, 종무소 기능을 하는 곳이다. 고원에는 위타신이 모셔져 있다.

 

〈고원(庫院)〉
고원(庫院)의 어의(語義)는 ‘창고’라는 뜻으로,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식자재 창고 기능, 주방 기능, 사무실 기능.
고원은 칠당(七堂)의 하나로 불전(대웅전) 좌측에 있고 건물도 매우 크다. 주방(廚房)과 식자재 창고, 그리고 총림의 모든 살림살이와 종무소도 고원에 집결되어 있고, 감원·도사·감사·부사·전좌의 거처도 고원에 있다. 따라서 고원은 선종사원의 본부라고 할 수 있다.
고원 전체를 관장하고 있는 소임자는 감원이다. 물론 감원은 선원총림 전체를 관장한다. 그리고 주방 책임자(주방장)는 전좌(典座)이다. 이들은 모두 6지사인데 그 가운데 감원이 수장이다. 전좌 밑에는 밥 짓는 소임으로서 공두(供頭)·공양주(供養主)가 있고, 또 반찬 만드는 소임인 채공(菜供) 등이 있다.
고원에 대한 이칭은 매우 많다. 고리(庫裏)·고당(庫堂)·고주(庫廚)·향적주(香積廚)·향적당(香積堂)·향적실(香積室) 등. 항주 영은사 가람배치도에는 ‘고당(庫堂)’과 ‘향적주(香積廚)’를 동시에 써 놓았다.
‘향적주’라는 말은 〈유마경〉 향적품에 나오는 말로서, ‘향기가 가득한 주방’이라는 정도의 뜻이 된다. 또 향적품에는 ‘향반(香飯)’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향기 가득한 음식’이라는 뜻이다. 이런 음식은 일반에서는 먹을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선정사원에서만 가능한 음식이다. 명대(明代)에는 고원 옆에 재당(齋堂, 식당)이 신설되어 거기서 공양을 했지만, 당송시대에는 승당이나 중료(衆寮, 대중방)에서 발우공양을 했다.
여기서 〈유마경〉 향적품 이야기를 하나 소개해 볼까 한다.
유마 거사의 처소에는 곧 문수보살과 유마 거사 사이에 벌어질 법전(法戰)을 방취하기 위하여 많은 대중들이 운집(雲集)했다. 가히 입추의 여지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전은 막상막하의 공방전으로 인하여 곧 정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리불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정오가 다 되어 가는데 이 많은 대중들이 점심을 어떻게 해결할꼬”
그 때 유마 거사는 법안으로 사리불의 걱정을 알아채고 그에게 말했다.
“지금 청법(聽法) 중인데 먹을 것을 걱정하시다니요.”
이렇게 핀잔을 주고 나서 유마거사는 신통력으로 향적국(香積國)을 보여 주었다. 향적국에는 향기 나는 맛있는 음식[香飯]이 가득히 쌓여 있었다.-앞의 향반(香飯) 이야기는 여기서 나온 말이다.-
사리불은 깜짝 놀라서 그만 토끼 눈이 되었다. 유마 거사는 화보살(化菩薩, 변화보살)을 향적불(香積佛, 향적국의 主佛)께 보내어 일발(一鉢)의 공양을 얻어 오도록 했다. 그리고는 그 일발(一鉢)의 공양을 신통력으로 수만 그릇으로 변화시켜서[變食], 그 자리에 운집한 대중들이 공양하도록 했다. 사리불은 유마 거사의 신통력에 또 한 번 토끼 눈이 되었다.
‘향적주(香積廚)’란 ‘향기 나는 음식이 가득 쌓여 있는 주방’이라는 뜻으로 조선 후기의 명필이자, 불교와 차(茶)문화의 대가였던 추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시에도 나오는 말이다. 추사가 활동하던 당시 쌍계사 육조탑 아래에 차 만드는 솜씨가 남달리 뛰어났던 만허(晩虛) 스님이 있었다. 5월 어느 날, 만허 스님이 추사 선생에게 정성스럽게 만든 우전차를 보내 드리자 추사 선생은 그 정성과 차 맛에 감동되어 “향적주에 있는 음식 가운데 아마 이보다 더 묘미(妙味) 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香積廚中, 恐無此無上妙味).”라고 답서를 써 보냈다. ‘묘미(妙味) 가운데서도 스님이 보내준 차(茶)가 최고’라고 극찬한 추사의 이런 감사의 편지를 받고 아마도 만허스님은 하루 종일 흐뭇했을 것이다.
선종사원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아름답다. 그 가운데서도 주방을 ‘향적주’라고 하고 그 음식(공양)을 ‘향반(香飯)’ ‘향적반(香積飯)’이라고 한 것은 특필할 만하다. 음식을 대할 때 항상 ‘향반’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음식은 최고의 맛, ‘일체유심조’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 사찰의 고원, 즉 주방(부억)에서는 조왕대신을 모신다. 그러나 중국 사찰에서는 위타천신상(像)을 모신다. 당나라 때 위타천신이 도선율사에게 귀의한 이후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는 율종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당 중기 백장 선사에 의하여 선원이 독립하기 전에는 선승들이 율종사원에 의탁해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청나라 후기의 문인(文人)으로 소주(蘇州)에 살았던 심복(沈復)의 〈부생육기(浮生六記)〉에는 “원각사에 갔더니 가운데는 불전이 있고 위에는 방장이 있으며, 그리고 왼쪽에는 주방인 향적주가 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백양사, 금산사, 계룡산 동학사 등 우리나라 사찰에서도 주방의 명칭을 향적당·향적실이라고 붙인 곳이 있다. 또 공양할 때 외우는 게송이 오관게이기 때문에 오관료(五觀寮)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명칭과 비교해서 ‘공양간’이라는 명칭은 그다지 향기 나는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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