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원 작가 (79·소설가, 시인)

등단 후 50여 년 동안 불교적인 작품을 써온 소설가 한승원 작가는 지난 3월 산문집 <꽃을 꺾어 집으로 돌아오다>를 출간하며 쉼 없는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맨부커상을 수상한 한강의 부친이기도 하다.  사진=박재완 기자

 

한승원 저 '꽃을 꺾어 집으로 돌아오다' '사람의 맨발'

문학과의 인연

중3 때 독서가 문학의 길로
고2 때 문예반으로 문학 인연
특활 시간 숙제로 문학 시작
대한일보 신춘문예 ‘목선’ 등단

 

올해로 등단 50년을 맞은 작가는 20여 년 전, 글만 쓸 수 있는 삶을 위해 ‘서울 생활’을 접고 자신의 고향인 전남 장흥으로 내려간다. 바닷가 ‘해산토굴’이라는 집에 자신과 자신의 삶을 고정시킨 그는 그 동안의 성찰에 깊이를 더해 쉼 없이 글을 써왔다. 최근 인생 말년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한 작가는 지난 삶을 반추하기 시작했고, 서서히 삶과의 이별도 준비하고 있다.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 이별을 염두에 두고 바라보는 삶은 어떤 것일까. 소설, 시, 산문 등 그의 글은 그렇게 쉼 없는 성찰의 회향이다. 그 성찰은 그의 문학 50년의 변함없는 원소였으며, 그 원소의 근원지는 부처님이었다. 지난 3월, 산문집 〈꽃을 꺾어 집으로 돌아오다〉로 또 한 번 깊은 소식을 전해온 작가 한승원이다.

친구 따라 간 강남, 문예반
작가 한승원. 그가 한국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중학교 시절의 옆집 여학생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한 작가는 그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이 귀한 시절이었다. 두 살 아래였던 옆집 여학생이 책을 좋아했다. 여학생은 자신이 읽은 책을 한 작가에게 빌려주기 시작했고, 한 작가는 책과 친해지기 시작했다. 〈삼총사〉, 〈톰소여의 모험〉, 〈춘향전〉, 〈홍길동전〉 등 그는 한창 배고픈 감성을 문학으로 채우며 성장한다. 목적이 따로 없는 독서였다. 그러나 그 작은 날갯짓이 먼 훗날 ‘작가 한승원’이라는 큰 바람을 만들어 낸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한 작가는 많은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옆집 여학생의 정성도 그쯤 되면 작은 마음은 아니었다. 깊은 마음에서 비롯된, 높은 온도와 분명한 빛깔을 지닌 마음이었다. ‘인연’이었다. 한 작가는 그렇게 회고했다.
한 작가가 2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그때, 처음 ‘특활(특별활동)’이라는 시간이 생겼다. 한 작가는 어떤 과목을 선택해야 할지 몰랐다. 망설이고 있을 때, 문학병에 걸려있던 그의 친구가 찾아와 ‘문예반’을 권했고, 그는 친구와 함께 문예반에 들어갔다. 그리고 첫 숙제가 있었다. 다음 시간까지 작품 하나씩을 써오는 것이었다.
다음 특활시간이었다. 한 작가는 생애 첫 단편을 들고 수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숙제를 해온 학생은 한 작가뿐이었다. 담당 선생님은 다른 학생에게 한 작가의 숙제를 낭독하게 했다.
“이 학생은 장차 훌륭한 소설가가 될 것이다.”
학생들과 함께 한 작가의 소설을 읽은 선생님의 소견은 그랬다. 훗날 그 소견은 그대로 적중했다.
“큰 생각 없이 했던 독서였지만 아마도 그 독서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저의 소양과 능력이 된 것 같아요.”
그리고 고2 한승원은 선생님의 그 말 한마디에 바로 문학병에 걸린다. 문학의 꿈을 품기 시작한다. 그 문학병의 기원은 독서였으며, 그 독서의 진원은 옆집 여학생이었다.

 

불교적 삶, 작품 50년 한 길
탁발승의 염불소리로 불연 시작
대학서 도안 스님 만나 불교공부
천관사 가는 길의 불교적 영감
평생 작품의 모티브로 작용
출세작 <아제아제바라아제> 비롯
<초의><원효><사람의 맨발> 등
50여 년 동안 불교적 작품 발표
지난 3월 〈꽃을 꺾어~〉 출간

 

처음 듣는 목탁소리와 염불소리
한 작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대신 가업을 도왔다. 농사를 짓고, 김 양식도 하고, 고기도 잡았다. 그리고 밤엔 책 속에 있었다. 부친이 사고로 인해 거동이 편치 않았다. 누군가는 아버지를 대신해야 했다. 한 작가가 아버지를 대신했다. 한 작가는 대학에 가지 않아도 문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더운 어느 여름 날, 한 작가는 동생과 나란히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어머니도 안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한 작가는 잠결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선 소리에 잠을 깼다. 처음 듣는 목탁소리였다. 그리고 목탁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또 다른 소리가 있었다. 햇살을 인 밀짚모자 안에서 흘러나오는 청아하고 맑은 소리는 염불소리였다. 그 역시 처음 듣는 소리였다.
한 작가는 처음 듣는 목탁소리와 염불소리에 넋을 뺏겼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 뜻 모를 소리에 한 작가의 가슴은 커지고 있었다. 그 때 잠에서 깬 한 작가의 어머니가 작은 아들을 불러 스님께 시주를 하라고 일렀다. 그때, 한 작가는 쌀독을 향해 일어서는 동생을 막아 세웠다. 목탁소리와 스님의 염불소리를 더 듣고 싶어서였다. 염불을 하던 스님은 시주가 없자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문 밖으로 사라진다. 어머니의 꾸중이 날아들었다. 한 작가의 동생은 얼른 바가지에 쌀을 담아 스님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스님은 보이지 않았다. 길에도, 옆집에도, 또 옆집에도 스님은 없었다. 아래 골목까지 가보았지만 스님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스님은 분명 탁발을 나온 스님이었다. 그런데 그 스님은 한 작가의 집 말고는 어떤 집의 문도 두드리지 않았다. 한 작가의 귓전에는 한 동안 그 목탁소리와 염불소리가 맴돌았다.

천관사 가는 길
늦가을이었다. 한 작가가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일을 도운 지도 3년이 되어갔다. 한 작가는 천관사로 가는 길 위에 있었다. 어느 날 만났던, 어느 날 들었던 스님과 염불소리가 한 작가의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한 작가는 고요한 곳에서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염불소리를 들려준 스님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는 30리 길에 있는 천관사로 향했다. 그는 천관사에 가면 혹시 그 스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곳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았다. 천관사로 가는 자드락길가엔 마른 억새들이 숲을 이루고, 차가운 땅에서 불어온 북서풍이 억새를 흔들었다.
억새와 바람이 빚어내는 소리는 뜻이 있는 말(言)처럼 들려왔고, 그 풍경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전생의 기억처럼 한 작가의 깊은 곳을 지나갔다.
천관사는 초라했다. 허허벌판에 서 있는 작은 전각과 맞은 편 요사채가 전부였다. 그 옆으로는 까만 구들장과 타다만 기둥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전쟁의 증거들이었다. 한 작가가 기거할 수 있는 방은 없었다. 만나보고 싶었던 스님도 천관사 스님이 아니었다.
“끝내 그 스님을 만나지 못했죠. 그 스님이 혹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죠. 저도 모르는 불연 속에서 일어난 신이한 경험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천관사를 내려오는데 서걱서걱 억새들이 내는 소리와 그 모습들이 왠지 저에겐 흔히들 말하는 ‘뮤즈’처럼 내 마음을 지나갔어요.”
그랬다. 한 작가는 천관사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훗날 그의 작품을 이루는 뼈대와 혈관은 그 때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배우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지워지거나 수정되지 않는, 이미 한승원이라는 인간이 가지고 있던 것들이 그 시절의 인연들로 깨어나기 시작했다. 책에서 배울 수 없고 스승이 가르쳐 줄 수 없는, 각자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한 작가는 그 인연에서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를 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문제와 답은 다름 아닌 부처님 말씀에 모두 있었다.

도반을 만나다… 도안 스님
주머니에 송곳을 넣어두면 언젠가 주머니는 뚫어진다. 한 작가의 주머니 속엔 문학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한 작가를 문예반으로 이끌었던 친구가 한 작가를 찾아왔다. 그 친구는 대학에 진학해 문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친구는 다시 한 작가를 문학의 울타리로 잡아끌었다. 친구는 한 작가에게 진학을 권했다. 그리고 한 작가는 우여곡절 끝에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한다. 그곳엔 〈무녀도〉, 〈역마〉, 〈등신불〉로 유명한 김동리 선생이 있었다. 훗날 그는 〈원효〉라는 작품으로 김동리문학상을 수상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학교에 들어가 보니 문예창작과에 저보다 한 살 많은 스님이 있었어요.”
서울 성북동 적조암 주지 도안 스님이었다. 한 작가는 먹을 것이 떨어지면 자신의 자취방을 나와 스님을 찾아갔다. 한 동안 먹고 자고 했다. 이유 없는 불연은 없었다. 부처님 방에서 자고 부처님이 내어준 밥을 먹는다는 것은 부처가 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한 작가가 50년 동안 쏟아낸 작품들은 그 시절의 회향이다.
한 작가는 도안 스님과 지내면서부터 경전을 읽기 시작했다. 불교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한 작가에게 그것은 무엇을 이루기 위한 ‘공부’라기 보다 그저 비가 내리는 길에서는 비를 맞고, 바람 부는 길에서는 바람을 맞는 일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것이 ‘한승원’의 ‘실존’이었다.

등단, 귀의, 그리고 전법이 된 소설
한 작가는 교사생활과 작품 활동을 병행하다가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목선’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온다.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선 한 작가는 비구니 스님을 소재로 한 장편을 써야겠다는 원을 세웠고, 원력엔 인연이 찾아왔다. 한 작가는 창간된 〈불교사상〉에 소설을 연재하게 되었고 그 소설은 그의 출세작이 된다. 한국문학의 대표적 구도소설인 〈아제아제바라아제〉다.
“〈아제아제~〉는 소설로 쓴 ‘화엄경’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한 작가는 ‘불교’로 자신의 소설을 쓰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것이 한승원의 글이라고 생각했다. 〈초의〉ㆍ〈원효〉ㆍ〈사람의 맨발〉 등 그는 지금까지 수십 권의 쉼 없는 출간을 이어왔다. 그 작품들 전반에 흐르는 한승원의 테마는 처음 들었던 목탁소리와 염불소리, 천관사 가는 길에서 맞았던 억새의 바람소리에서 시작된 것들이다. 그렇게 불교를 소설의 재료로 써오던 한 작가는 어느 순간부터 소설로 불교를 쓰고 있었다.
“저는 작가가 종교와 너무 가깝게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불교적인 소설이나 시를 쓰지만 그것이 저의 신앙과는 별개여야 한다고 생각했었죠. 늘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았죠. 그런데 언제부턴가 제가 그냥 그 안에 있더라고요. 제가 그냥 불교적인간이더라고요.”
불교로 소설을 쓰던 한 작가는 언제부턴가 자연스러운 ‘불자’가 되어있었다. 다른 불자들처럼 신행으로서 법당을 찾고 삼배를 올리고 불경을 외게 된 한승원은 2014년 석가모니부처님의 삶을 다룬 소설 〈사람의 맨발〉을 발표한다.
“제 영혼의 스승인 석가모니부처님의 삶을 소설로 써보는 것이 오랜 원이었죠. 길 위에서 태어나 평생 맨발로 길을 걸으며 길에서 열반하신 부처님의 맨발에 마음이 가기 시작했어요. 그 맨발 속에 들어있는 부처님의 생각과 실천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어요.”

꽃을 꺾어 집으로 돌아오다
“내가 하늘을 보는 까닭은/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 / 말 / 하나가 거기 있어서입니다.” 지난 3월 출간한 산문집 〈꽃을 꺾어 집으로 돌아오다〉의 ‘작가의 말’ 중 일부다.
1996년, 고향으로 돌아간 한 작가는 지금까지 그 자리에 머물고 있다. 태어난 자리에서 ‘한승원’을 회향하고 있다. 그는 어느덧 삶을 회향해야하는 시간을 맞고 있다. 오랫동안 사유와 성찰의 습을 익힌 한 작가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우리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겠다”고 이야기 한다. 이번 출간이 그것의 일 절로 읽힌다.
작가의 성실함과 치열함이 꼿꼿하게 살아있는 이번 책은 ‘아버지의 의지와 상반되는 쪽으로 황소처럼 나아가던 아들’의 나날에서 자꾸만 ‘슬픈 눈이 되어버리는 늙은 아비’의 시간까지 작가가 통과해온 세월이 오롯이 담겨있다. 책의 제목처럼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꽃을 꺾어 들고. 그 ‘꽃’은 아마도 ‘한승원’이 아닐까. 바다를 바라보며 ‘말’ 하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승원’이 아닐까.
그의 이름 앞에는 요즘 또 하나의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작가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이다. 딸의 유명세로 붙여진 그 이름이 그는 좋다고 했다. 딸 한강의 작품에 대해 “흉내 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부모를 넘어선 자식을 보는 것은 그 무엇보다 기쁜 일이라고 했다.
작가 한승원은 입이 떨어지지 않는 그 말을 언제 쯤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말은 무엇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때가 아닐까. 우리도 알고 있는 ‘그’ 말이 아닐까.
 

한승원 작가는?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교사 생활과 작품 활동을 병행하다가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목선’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 뒤 소설가와 시인으로 수많은 작품을 펴내며 한국 문학의 거목으로 자리매김했다. 소설집 〈앞산도 첩첩하고〉 〈안개바다〉 〈미망하는 새〉, 장편소설 〈아제아제바라아제〉 〈화사〉 〈초의〉 〈원효〉 〈보리 닷 되〉 〈사람의 맨발〉, 산문집 〈허무의 바다에 외로운 등불 하나〉 〈강은 이야기하며 흐른다〉 〈꽃을 꺾어 집으로 돌아오다〉, 시집 〈열애일기〉 〈사랑은 늘 혼자 깨어있게 하고〉 〈이별 연습하는 시간〉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한국불교문학상, 미국 기리야마 환태평양 도서상, 김동리문학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1981년 가족사진. 맨 왼쪽이 한승원이고, 맨 오른쪽이 한승원의 딸인 〈채식주의자〉의 저자 한강이다.
제10회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한 한승원과 그의 가족(좌측 두 번째가 한승원, 맨 오른쪽이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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