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지본처’할 명부시왕 보좌 동자들

문화재청 〈도난문화재도록〉에 있는 예천 용문사 명부전에 있던 시왕상과 동자상들의 도난 전 모습(사진 위). 1989년 4월 5일 도난됐다. 이 중 2구의 동자상들은 한 사찰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것이 확인됐다. 사진 아래는 사찰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동자상이며 모두 도난된 예천 용문사의 동자상으로 추정된다.

사찰에서 도난당한 불교조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특히, 이동하기 쉬운 크기의 여래상, 보살상, 동자상, 인왕상 등이 대부분이지만. 이 가운데 많은 수를 차지하는 존상은 전각에 주불로 봉안된 여래상보다는 명부전 등에 봉안되었던 동자상이다. 동자상은 주로 임진왜란 이후 사찰의 중창과 더불어 명부전 내 시왕상을 보좌하는 시자(侍子)로 봉안된 존상이다. 명부전 내에 봉안된 동자상은 선동자, 악동자로 불리는 데, 대체로 이들 선악동자상은 소조나 나무로 제작되고, 어린 소년이나 소녀의 모습이다.

동자상은 머리에 쌍계(雙?)나 길게 머리카락을 딴 형태이고, 양손에는 두루마리, 붓, 벼루, 봉황, 호랑이, 자라, 수박 등 다양한 지물을 들고 있다. 명부전 등 전각 내에 봉안된 동자상 수량은 최소한 10구 이상이 된다.

이 동자상들은 앞에 열거했던 것처럼 동물이나 연봉오리 등의 지물을 들고 있는 어린아이 형태로, 크기가 60~80㎝ 정도라 운반이 용이할 뿐 아니라 일반 수집가들이 수집의 대상으로 선호하는 유물들이다. 그래서인지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수많은 동자상들이 도난당해왔고, 불법이든 합법적이든 일종의 거래를 통해서 박물관이나 개인들이 소장하게 되었다. 2003년에 국립청주박물관에서 개최한 ‘불교동자상’ 전시는 사찰을 비롯한 박물관이나 개인이 소장한 많은 동자상이 출품된 대표적인 특별전이었다.

주로 명부전에 봉안됐던 동자상
크기 작아 일제강점기부터 도난
일선 수집가·박물관에 흘러들어가
도난신고 많지 않아 환수 어려움
관람 대상 아닌 신앙·예경의 성보

이들 동자상을 도난당한 사찰은 한국전쟁 기간에 피해를 입지 않은 사찰이지만, 전쟁이 끝나고 1970~80년대 가장 많은 도난을 당하였다. 현재 문화재청에 도난 신고된 동자상은 예천 용문사(1989년 4월 5일 도난), 해남 미황사(2001년 10월 15일 도난), 통영 안정사(2009년 7월 5일 도난), 진주 청곡사(1988년 2월 6일) 밖에 없고, 도난 동자상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사진도 1~2점 나온 것이 대부분이다. 이와 같이 동자상이 대부분 도난을 당해서 완벽한 숫자를 가지고 있는 사찰이 상대적으로 몇 군데 되지 못하고 있다. 동자상이 완벽하게 남아있는 사찰은 고성 옥천사 명부전과 화성 용주사 명부전이 대표적이다.

도난 동자상 중에 주목되는 사찰은 경북 지역에 있는 예천 용문사이다. 예천 용문사는 한국전쟁 중에 피해를 입지 않아서 경북에서 가장 성보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는 사찰 중에 하나이다.
용문사는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용문산(龍門山) 중턱에 자리한 사찰로, 조계종 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다. 이 사찰은 〈김룡사본말사지(金龍寺本末寺誌)〉에 의하면, 870년에 두운(杜雲)스님이 절을 창건하여 용문사라 이름을 붙였다. 936년에 태조의 명으로 절을 중건하고, 983년에 청석(靑石)으로 구층탑을 세웠다.

1165년에 자엄(資嚴) 스님 등이 여러 법당과 승방 등을 건립하고, 1171년에 태자의 태(胎)를 보관한 뒤 절 이름을 창기사(昌期寺)로 바꾸고 축성수법회(祝聖壽法會)를 열었다. 1179년에 사찰 중건이 마무리되자 용문사에서는 선문구산의 승려 500명을 모아 50일 담선회(談禪會)를 열었다. 1478년에 소헌왕비(昭憲王妃)의 태실(胎室)을 봉안하고, 다시 사찰 이름을 성불산 용문사로 고쳤다.

임진왜란 이후 피해를 입었는지 1608년에는 혜명(慧明)이 제하당(霽霞堂)을 중수하고, 1636년에 학문(學文)이 적묵당(寂墨堂)을, 그리고 1637년에는 두인(杜印)이 범종루를 지었다. 그리고 1680년대 목각탱과 명부전 불상 등을 조성한 것으로 보아 17세기 후반 사찰의 중창 불사가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1783년에 문효세자(文孝世子)의 태실을 봉안하고 소백산 용문사로 이름을 고쳤다. 1835년에 사찰이 화재로 모두 타 버린 것을 열파(悅坡), 상민(尙敏), 부열(富悅) 등 여러 승려들이 힘을 합쳐 1840년대에 중건불사를 마쳤다.

조선 후기에 용문사에 몇 구의 동자상이 조성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20세기 전반에 작성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예천 용문사 재산대장에 ‘동자상(童子像) 토체(土?) 14’과 1932년 12월에 조선총독부 관보에 실린 소장품목록에 ‘동자(童子) 토체도채(土?塗彩) 14 입상(立像) 고(高) 2척(尺)’으로 언급되어 흙으로 만들어진 후, 색이 칠해진 60cm의 14구의 동자상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현재 동자상은 목조로 되어 있어 다른 작품으로 인식할 수 있지만, 기본 토대는 나무에 흙으로 옷 주름 등을 붙였는지 목조로 만든 동자상에 비해 입체감이 있다. 현재 사찰에 남아있는 동자상은 1구 밖에 없어 13구의 동자상이 사찰을 떠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불교문화재 도난문화재 증보판(2017)〉에 의하면 동자상 9구는 1989년 4월 5일에 도난당했음을 알 수 있다. 또 같은 책에 용문사 동자상 4점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어 그 형태를 파악할 수 있다.

현재 용문사에 남아있는 동자상은 머리 위에 상투를 양쪽으로 묶은 쌍계 형태로 머리에서 이마가 차지하는 폭이 넓고, 이목구비가 작은 편이다, 신체비례가 균형이 잡혀 있고, 무릎까지 내려온 붉은 색의 긴 저고리를 입고 양손을 어깨 높이까지 올려 연꽃을 들고 있다. 균형 잡힌 자세와 살이 오른 신체표현에서 어린 아이의 천진함이 보이는 우수한 작품이다.

그리고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는 도난당한 동자상은 사자의 발을 잡고 있는 동자상으로 사자의 몸이 뒤집어져 있고, 또 다른 동자상은 앞발을 벌린 채 동자의 품에 안긴 청사자상이 붉은 혀를 내밀고 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동자상과 같이 동자상이 모 사찰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특별전을 통해 공개한 동자상 가운데 두 점은 예천 용문사 도난 동자상과 비교하면 이마가 매우 넓고, 옷깃이 자연스럽게 접혀 있으며, 청색과 녹색의 저고리, 사자를 잡고 있는 자세가 똑같다. 이 동자상이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경위까지 밝힐 수 없었지만, 도난 이후 기증이나 거래를 통해 사찰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외 용문사에서 없어진 11점은 정면 사진만 확보된다면 언젠가 소장처가 밝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도난 동자상 중에 주목되는 사찰은 진주 청곡사이다. 〈불교문화재 도난문화재 증보판(2017)〉에 의하면 1988년 2월 6일에 동자상 10점을 도난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아쉽게도 도난 동자상 사진은 1점만 문화재청에 신고돼 있다. 그러나 청곡사 성보박물관 입구에는 도난된 동자상 10점이 촬영된 사진이 걸려 있어서 대체적인 형태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재 도난백서에는 전체가 올라가 있지 못한 것은 사찰에서 더 적극적으로 경찰이나 문화재청에 자료를 제공하지 않은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월아산로에 위치한 청곡사는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879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는데, 월아산 남쪽 남강변으로 청학(靑鶴)이 날아오니 서기(瑞氣)가 충만해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1380년에 실상사(實相寺)의 상총(尙聰)이 중건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선종(禪宗)에 속하였다.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되었던 것을 1602년에 계행(戒行)과 극명(克明)이 중건하였고, 1612년 대웅전을 중건한 후, 1657년에는 진주 청곡사 목조지장보살좌상이 조성된 것으로 보아 업경전(業鏡殿)이 17세기 중반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전각 내 봉안된 불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과 ‘진양동월아산청곡사불상개금시왕개채기(晉陽東月牙山靑谷寺佛像改金十王改彩記)’에 의하면 업경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은 1657년에 화공(畵工) 인영(印迎), 탄준(誕?), 지변(智邊), 학렴(學廉), 서명(瑞明), 법률(法律), 종탄(宗誕), 선우(善祐)가 만들었고, 1750년에 지장보살의 개금과 시왕상의 개채가 이루어졌다.

업경전 내 봉안되었던 동자상은 쌍계와 연잎을 뒤집어 쓴 상으로 나눌 수 있고, 연화가지를 든 상이나 지물을 든 상으로 분류되는데, 모두 깃을 Y자형 좌임하고, 얼굴은 지장보살과 같이 살이 많이 쪄서 옆으로 넓적한 얼굴형을 하고 있다.

사찰에서 외부로 유출된 동자상은 박물관이나 개인의 수집과 관람 대상이지만, 동자상은 조선후기 명부신앙과 작가를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존상이면서 예배 대상이다. 동자상들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전각에 봉안되었던 존상이라는 인식이 아니라 단순히 관람과 수집 대상으로만 취급한다면 한국불교미술사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사찰에서도 도난당한 동자상이 찍혀 있는 이전의 사진을 찾아서 가급적 빨리 도난신고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첨부해서 동자상이 제 위치로 돌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가야 할 것이다.

결국은 잃어버린 성보를 되찾는 일은 소임을 맡은 스님이나 종무원들이 해야 할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것은 동자상을 만들기 위해 많은 이들의 후원과 보시가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기에 1500년의 역사를 이어온 사찰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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