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제존자께서 말하시길 염기염멸(念起念滅) 위지생사(謂之生死) 당생사지제(當生死之際) 수진역재기화두(須盡力提起話頭)라 했다. 그 의미를 살펴보면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멸함을 생사라 부르니, 모름지기 모든 힘을 다해야 화두(이 뭣고)를 든다는 말이다.

화두순일(話頭純一) 기멸즉진(起滅卽盡) 기멸즉진처(起滅卽盡處)는 말도 있다. 화두(이 뭣고)가 순일해지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이 곧 다한다는 뜻이다.

생각이 일어나고 멸함이 곧 다한 곳을 이르되 이를 고요함()이라 하니. 위지적(謂之寂) 적중무화두(寂中無話頭) 위지무기(謂之無記)라고 했다. 고요한 가운데 화두(이 뭣고)가 없으면 무기라 하고, 적중불매화두(寂中不昧話頭) 위지영(謂之靈)이라, 고요한 가운데 화두(이 뭣고)가 매()하지 아니하면 영()이라고 이른다는 말이다. 즉 차공적영지(卽此空寂靈知) 무괴무잡(無壞無雜) 여시용공(如是用功) 불일성지(不日成之)라는 말로 귀결할 수 있다. 이 공적영지가 무너짐도 없고 섞임도 없어서 타성일편이 되면 며칠 안 가서 성취할 수 있다는 의미 아닐까?

모든 중생 불성 있어 그것 굳게 믿고 이 뭣고
항상 함께하면, 번뇌 망상이 모두 다 떨어져

물이 없이 물소리가 있을 수 없고, 물 흐르는 소리가 나는 곳에 물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니,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으므로 그것을 굳게 믿고 이 뭣고와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함께하면, 번뇌 망상이 다 떨어질 수 있다. 또한 관음도량에 가면 관음이 되는 것처럼 하나를 이루게 되는 것이며, 생활속에서 용서 참회 초조 불안 근심 걱정 등 각종 스트레스의 뿌리를 한칼에 잘라버리는 유일한 금강보검(金剛寶劍)이 바로 이 뭣고인 것이다.

심즉시불(心卽是佛) 불즉시각(佛卽是覺)이라는 말을 음미해 보자.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깨달음이라는 의미이다. 깨달은 성품은 중생과 부처가 평등해 차별이 없으며, 신령스럽게 밝아 만덕을 갖추고 있으며, 묘용이 항하의 모래알과 같아서 수행과 증득을 빌리지 아니하며, 이미 깨달음 그 자체이기 때문에 깨쳐야 할 내가 없는 것이고, ‘이 뭣고또한 생사가 없는 본각(本覺)자리인 것이다.

<금강경오가해 함허서문>에 아가문(我迦文) 득저일제자(得這一諸子) 보관중생(普觀衆生) 동품이미(同稟而迷) 환왈기재(歎曰奇哉), 향생사해중(向生死海中) 가무저선(駕無低船) 취무공적(吹無孔笛)하시니 묘음동지(妙音同地)하시고 법해만천(法海漫天)이라, 어시(於是) 롱애진성(?盡醒)하고, 고고실윤(悉潤)하야 대지함생(大地含生)이 각득기소(各得其所)하니라고 했다. 세존께서는 이 한 물건을 깨닫고 중생들이 모두 똑같이 이것을 받아 지니면서도 미()한 체 있어 널리 살펴 탄식하시며 기이한 일이라 하시며 생사의 바다 한 가운데로 향해 밑바닥 없는 배를 몰고, 구멍없는 피리를 불어 묘음이 땅을 진동시키니 법의 바다가 하늘가득 함이로다. 이에 귀먹고 어리석은 범부들이 깨어나고 마른 나무들이 다 윤택하게 되며 대지의 모든 생명들이 다 그 살 곳을 얻으니,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한 물건이 이 뭣고이며, 그 묘음(妙音)이 바로 이 뭣고인 것이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番寒徹骨)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라는 말로 오늘 강의를 마칠까 한다. “뼛속에 사무치는 매서운 추위가 아니면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향기가 있을 수 있겠는가?” 생사를 걸고 오직 이 뭣고를 생활속에서 놓치지 않으면 반드시 성불이라는 이름으로 보답(報答)하게 되어 있다. 오늘도 이 뭣고수행에 최선을 다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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