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동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국립중앙박물관 역사문화교실주제 : 불교의 수용과 신라 사회의 변화

불교가 한국 사회에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지만 그 중에서도 지금의 경상북도 일원을 무대로 하는 신라 불교가 오늘날 한국 불교의 기원에 해당함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남동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는 3월 28일 국립중앙박물관 역사문화교실에서 불교의 수용과 신라 사회의 변화를 주제로 강연했다. 남 교수는 “불교가 세속 권력인 국왕권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시킨 측면도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불법(佛法) 이라는 보편적인 진리로 끊임없이 견제한 측면도 있다”며 “신라 사회의 양대 권력인 왕권과 교권이 상호 견제하고 보완한 과정이 다름 아닌 국왕관의 불교화인데 그것이 불교를 수용하면서 일어난 신라 사회의 중요한 변화라 하겠다”고 강조했다.

남동신 교수는… 서울대학교에서 국사학과 학사부터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2009년부터 서울대 국사학과 부교수로 있다. 2009년부터 역사학회 총무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덕성여자대학교 사학과 조교수기도 하다.

고구려서 문물과 불교 함께 넘어와
왕권·교권 상호 견제·보완 역할
7세기에는 ‘불교대중화운동’도…
세속권력 의지해 세속화길 걷기도

 

위로부터의 불교 수용
불교는 중국으로부터 4세기 말에 고구려와 백제에 각각 전해졌으며 신라는 이보다 늦은 5세기 전반에 고구려로부터 전래됐습니다.

신라는 4세기 말 내물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이웃 강대국인 고구려에 크게 의지했습니다. 국가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선진적인 문물제도를 도입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불교였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눌지왕 때(417~458) 고구려에서 묵호자라는 승려가 처음 선산 지방에 불교를 전했다고 합니다. 뒤이어 아도를 비롯한 몇몇 고구려 승려가 차례로 선산 지방으로 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불교가 신라와 고구려의 우호적인 관계 하에서 왕실까지 전해졌지만 곧바로 상황이 뒤바뀌면서 승려들이 탄압을 받게 됐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불교 초전 관계 자료에서는 묵호자, 아도, 정방, 멸구자 등 고구려에서 온 초전 승려들이 신라 지배층에 의하여 피살되었거나 까닭 없이 종적을 감추었다고 하여 외래 문화인 불교에 대한 신라 사회의 거부감이 상당히 거세었음을 시사합니다. 고구려 계통 불교에 대하여 신라 왕실의 태도가 급격히 나빠진 이유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국제정세의 급변입니다. 고구려는 장수왕 15년(425) 평양 천도를 계기로 본격적인 남진정책을 채택하였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고구려와 한반도 남부 왕조들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켰습니다.

둘째는 불교와 기왕의 이념체계인 무교, 샤머니즘 사이의 사상 갈등이었습니다. 신 중심의 세계관과 차별적인 인간관을 내세우는 무교와 인간 중심의 세계관과 평등한 인간관을 내세우는 불교 이 양자 사이의 충돌은 시간 문제였죠.

소지왕대 들어서면서 고구려계통 불교에 대한 탄압이 한동안 지속됐는데 신라는 외래의 불교를 탄압하는 한편 기왕의 이데올로기는 강화했습니다. 그리고 불교가 지배적인 문화가 된 통일신라 이후에는 왕실이나 불교교단 모두 불교 초전 당시 왕실에 의한 불교 탄압을 언급하기 꺼렸습니다.

신라는 4세기 이래 내부적으로는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고 우경(牛耕) 이 실시되면서 농업이 발달했습니다. 농업과 함께 상업도 발전했고, 촌락사회는 이러한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 종래의 공동체가 해체되고 있었습니다. 법흥왕대에는 율령을 반포하고 관리의 복장을 새로 제정한다든가 정치제도를 새롭게 정비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문물제도 정비와 더불어 새로운 문화내지 이념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중국 양(梁) 나라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게 됐고, 당시 양나라의 무제는 불교황제였습니다. 양국을 왕래하던 사신과 상인을 통해 신라 왕실은 불교를 재인식했으며 마침내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들은 불교 공인을 주장하기 시작했지만 전통 귀족세력들은 여기에 반대했습니다. 명분은 불교가 가지는 이질감과 각종 불사에 따르는 막대한 경비지출 및 민력의 낭비였습니다. 불교의 공인문제를 둘러싸고 당시의 정치세력은 국왕을 중심으로 한 찬성파와 대다수의 신하들이 가담한 반대파로 양분됐습니다.

애초에 신라는 체제정비의 일환에서 중국으로부터 선진문물과 제도를 수입하였으니 불교는 그러한 선진문물을 상징하는 존재였습니다. 즉 불교 수용의 방식을 둘러싸고는 정치세력 사이에 이견이나 주도권 다툼이 있었겠지만 불교로 상징되는 중국의 선진문물 수용은 시대의 요청이었기 때문에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불교는 마침내 공인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짧은 시간에 불교는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라는 5세기 초~ 6세기 중반까지 불교를 주요 이념으로 하여 국가를 경영하는 ‘불교치국책(佛敎治國策)’을 견지했습니다. 그 결과 불교는 신라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이끌어가는 이념적 지주가 되었으며 마침내 왕실의 권위를 불교적으로 수식해주는 불교식 왕명시대 를 연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불교 사찰은 그러한 정책의 중심지였으며 승려는 그 중심세력이 됐습니다. 이들은 스님으로서 종교적 임무 못지않게 지식인·정치가·군략가·외교가·예술가 등의 세속적인 역할도 수행하했기에 사회적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불교 수용과 국왕관의 변천
이렇듯 불교는 위로부터 한국 사회에 수용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수용 과정상의 이러한 특징이 중앙집권체제 사회와 맞물리면서 한국 불교의 국가주의적 성격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불교가 일방적으로 국가나 지배층의 이익을 위해 봉사만 한 것은 아닙니다. 국왕 또한 불교를 통치의 협력자로 우대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불교도들이 갖고 있는 이상적인 군주상에 스스로 부응하고자 했습니다. 불교가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면 내릴수록 국왕관 또한 불교화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불교 수용 이후 종래의 천손족설은 일대 변화가 불가피하였다 신라 중고기 동안 왕실은 불교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고자 한 것 못지않게 스스로 불교도가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은 말년에 스스로 출가하여 법공(法空)이라고 했습니다. 진흥왕은 최초로 승정기구를 설치했고 새로운 점령지를 순수할 때는 승려들을 대동했다. 말년에는 스스로 출가하여 법운(法雲)이라고 했고, 왕비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국왕의 출가는 전륜성왕의 출가를 재현한 것입니다.

중고기의 대부분의 왕들은 이름을 불교에서 따왔기 때문에 이 시대를 불교식 왕명시대 라고도 합니다.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白淨)이고 왕비의 이름은 마야부인인데 이는 석가모니의 부모 이름과 같죠. 진평왕의 딸이 나중에 선덕여왕이 됐죠. 선덕은 전륜성왕의 실제 모델이 된 아육왕의 전생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또 귀족회의체인 화백회의는 석가모니 당시 불교 교단의 운영원리인 상가의 이념을 수용해 만장일치제로 운영했습니다.

국가의식을 고취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법회도 개최됐습니다. 팔관회는 원래 재가신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사찰에 가서 그날 하루 낮밤 동안만이라도 계율을 지키는 의식이었습니다. 또 호국적인 법회로서 <인왕경>에 근거한 인왕백고좌회가 있었는데 선덕여왕 때에는 여왕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열리기도 했습니다.

신라 중고기 불교는 진골출신으로서 중국 유학을 다녀와 교단의 상층부를 장악한 승려들이 주도했습니다. 따라서 세속적 역할도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승려들은 불교적 이상과 국가적 현실 사이에서 고뇌해야 했습니다. 원광이나 자장은 강력한 출가주의 정신에 입각해 있으면서 동시에 신라 사회의 세속적 요청에 충실히 부응하고자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진골귀족과의 타협 하에 위로부터 이상적인 불교국가를 건설하고자 한 셈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국가관은 왕실 및 진골귀족 중심이었으며 일반민은 여기서 상대적으로 소외됐습니다.

불교대중화와 보살위왕설(菩薩爲王說)
7세기 전반기에 접어들면서 종래의 지배층 중심의 불교를 비판하고 일반민에 대해 종교적 관심을 고취하는 이른바 불교대중화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은 비 진골 출신으로서 중국유학을 하지 못하고 교단에서도 소외당한 승려들이 주도했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불교를 일반민의 입장에서 재해석하고 실천하려는 것이었는데 7세기 중·후반 원효와 의상으로 계승됐습니다. 원효와 의상은 기존의 사회질서나 국가체제를 그대로 추인하지 않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통일신라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불교적 평등사회의 건설에서 찾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적 평등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기왕에 소외되었던 일반민과 지방사회에 대하여 더 많은 종교적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현실적으로는 이들에 대한 지배층의 양보를 촉구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이상을 주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의 구현을 위하여 실천에도 매진하였던 것입니다. 이 점이야말로 중고기 진골귀족 중심의 불교와 분명히 다른 모습이죠.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원효나 의상은 불교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일련의 진취적인 불교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런데 통일신라의 현실은 오히려 세속권력이 불교에 대한 통제와 간섭을 강화시키고 있었습니다.

654년 태종무열왕은 김유신의 지원에 힘입어 중대 왕실을 개창하였으며 삼국통일을 완수했습니다. 중대왕실은 삼국통일에 따른 권위를 바탕으로 정치에 있어서 불교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대신 정치운영의 원리로 유교를 더욱 중시했습니다. 왕실은 사적으로는 여전히 불교를 신봉했지만 공적으로는 불교교단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결국 중대에 접어들면서 불교교단은 앞 시기에 비하여 자율성이 크게 위축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승려들은 불교의 치외법권을 망각하고 국왕에 대하여 칭신하게 된다 일체의 권위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고자 했고 실제로 신라 왕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선승들조차 고려의 패권이 확연해지자 다시금 고려 왕실에 대한 칭신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가가 불교교단에 대하여 관료제도에 준하는 세속적 기능과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불교 교단은 세속권력에 의지한 채 점점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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