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하는 사람은 육근 거둬 한 생각 일어나는 곳 살피고,
‘이 뭣고’로 비추면 생각 떠난 청정한 마음에 도달한다”
달마스님께서는 외식제연(外息諸緣) 내심무천(內心無喘) 심여장벽(心如障壁) 가이입도(可以入道)라고 하셨다, 즉 “밖으로는 여러 반연(攀緣)을 끊고, 안으로는 부단한 욕심으로 헐떡거리지 않고, 마음이 철석같은 흔들림이 없어야 도에 이른다”는 말이다.
‘반연심’이란 반연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반연은 인연과 연관이 있다. 원인이 조건 즉 연(緣)을 만나는 것을 반연한다고 하며, 그래야 과보를 낳게 된다. 마치 씨앗이 물, 온도, 영양분을 만나야 잘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것을 의식 작용서 살펴보면 마음이 외부 경계에 반응하는 것을 반연한다 하지만, 내부 의식이 업식을 상대해서 생겨난 생각, 기분, 감정들도 반연심이다. 이것은 본래 청정한 마음이 아닌 작용에 의해 생겨난 마음 작용으로서 마치 본래 마음이 물이라면 물위서 생겨난 물결(번뇌망상)과 같은 것이다.
수행하는 사람은 육근을 거둬 들여 한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쫓아 살피고, ‘이 뭣고’로 비추면 생각을 떠난 청정한 자기의 마음에 도달하게 된다. 다시 담담하게 고요히 하고 ‘이 뭣고’로 비추어 보면, 곧바로 오온(五蘊)이 다 공하고, 몸과 마음이 함께 고요해 마침내 한 일도 없게 된다. 이렇게 밤낮으로 다니고 앉고 눕거나 한결같이 공덕이 깊어지면 참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루게 된다. 참선 목적은 재명심견성(在明心見性)이라는 말처럼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는 것이다. 자기의 성품이란 곧 여래의 지혜와 덕상이다. 화두 ‘이 뭣고’가 순일해 한 생각이 일어나고 멸함이 없어지는 것을 고요함(寂)이라 하고, 그 속에서 화두가 없는 것을 무기(無記)라 하며, 고요함 속에서도 ‘이 뭣고’가 어둡지 않은 것을 영지(靈知)라고 한다. 우리가 생활속에서 수식관등 명상을 하게 되는데, 이렇게 무기공(無記空)속에 빠져 귀중한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구름 잡고 안개를 움켜 쥐는 살아 있는 용(龍)이 어찌 썩은 물에 잠겨 있겠으며, 해를 쫓고 바람을 따르는 용맹스런 말이 어찌 마른 동백나무 밑에 엎드려 있겠는가? 계속 침묵만 지키는 어리석은 선정(禪定)은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들려는 격이고, 문자만을 찾는 미친 지혜는 바다에 들어가 모래를 세는 것이니, 그것은 모두 걸림 없는 기틀과 자재(自在)하고 미묘한 작용을 하는 화두 ‘이 뭣고’를 모르는 것이다.
이근원통(耳根圓通)이라, 들음을 돌이켜 자성(自性)을 들어야 한다. 도를 알려면 ‘이 뭣고’의 ‘이’를 심안으로 비춰 보아야 하며, 이것은 곧 관심(觀心)이며, 부모에게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 면목은 시(是)인 참성품이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 면목을 본다는 것은 곧 마음을 ‘이 뭣고’로 관(觀)하는 것이며, 원만이 청정한 깨달음을 비춘다고 하는 청정한 깨달음은 곧 이(是)인 마음인 것이다.
〈원각경〉에 보면 무변허공(無邊虛空) 각소현발(覺所顯發)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허공계의 온 우주가 모두 내 것이니 마음을 탁 놓고 살라는 의미이다. 무변허공도 각(覺) 즉 ‘이 뭣고’의 시에서 나툰 것이다. 또한 우리 모두에게 있는 각성(覺性)이라는 마음 그릇은 이처럼 신령한 것이니 이런 신통묘용이 우리 앞에 현전(現前)하고 있는 것이다. 천지여아동근(天地如我同根) 만물여아동체(萬物如我同體)라는 말처럼 하늘과 온 대지가 나와 한 뿌리인 시요, 삼라만상의 모든 물체가 나와 한 몸인 시인데, 천당은 갈 곳이요, 지옥은 못 갈 곳이라면, 우주가 내 한 몸이요, 천당과 지옥이 내 한 집인데, 중생은 한 세계를 둘로 갈라 놓고, 한 몸을 분신시켜 천당과 지옥으로 나눠 보내니, 이것이 중생의 업연으로 이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