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사형수 방영근

감옥에 부처님 모시고 참회기도
다친 참새 돌보는 이타행 모범수
형 집행까지 모친 끝내 못 만나 

1976년 12월 26일. 한 젊은이를 다른 세상으로 보냈다. 옥중에서 다친 참새를 돌보고, 하루하루를 참회하며 살다간 사형수 방영근(당시 28세)이다. “스님과 약속한대로 참새를 그들의 고향인 하늘로 날려 보냈다”며 환하게 웃던 모습과 “죽어서나마 어머니를 보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1976년 이른 봄, 대구교도소에서 사형수 방영근을 처음 만났다.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포교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매일 교도소를 드나들었지만 재소자들에게 불교는 생소한 시절이었다. 얼마 후, 사형수들에게 공양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죽음을 앞둔 사형수들이었기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다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공양은 경건하고 차분하게 끝났다. 그 때 한 사형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저희들은 머지않아 죽음으로 죄 값을 치러야 하는 흉악범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따뜻한 시간을 베풀어주시니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전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방영근이었다. 선량하고 소박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와 나는 그렇게 만났다. 하지만 그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 아니었다. 그는 오래 전에 나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나를 보자 잊었던 기억이 살아난 것이다. 그는 열두 살 때, 보경사에 가게 된 적이 있었는데, 대중에게 절의 유래에 대해 해설하고 있는 나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형수가 되어 다시 만난 것이다. 그는 열두 살이던 그 때, 집을 나왔다. 마을에 들어온 관광버스를 몰래 타고 고향을 떠났다. 그는 포항 어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년은 불우했다. 어머니가 후처인 이유로 차가운 아버지와 본처, 이복형제들 사이에서 외롭게 자랐다. 본처가 죽은 후에 그의 친모는 집에서 쫓겨났고, 아버지까지 죽고 난 후에는 식구들의 냉대가 더욱 심해졌다. 가끔 찾아왔던 친모도 그를 거둘 형편이 되지 않아 언제부턴가 발을 끊었다. 그는 외로운 섬으로 살아야 했다. 그는 마침내 집을 떠날 결심을 했고 관광버스에 무작정 몸을 실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 역시 힘겹고 냉혹했다. 그래도 그는 허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구미 공단에 일자리를 얻게 되었고, 연애도 하면서 희망을 키워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학력을 속였다는 이유로 공장에서 해고당했고, 사귀던 여자마저 함께 공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는 힘겨움 속에서 자신과 함께 해준 여자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그는 그녀를 당연히 책임져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언니가 결혼 목걸이를 잡히고 마련해준 5만 원으로 살림방을 마련했다. 옹색한 살림이었지만 그는 처음으로 가정을 꾸리고 행복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해 하루하루가 점점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처형은 패물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된 남편과의 불화로 힘겹다며 빌려준 돈을 갚아달라고 했다. 궁지에 몰린 그는 살고 있는 주인집의 텔레비전을 훔치기로 한다. 아내가 잠든 후 주인집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텔레비전을 들고 나오는 순간 집주인에게 들키고 말았고, 주인과의 몸싸움 과정에서 그만 집주인이 뇌진탕으로 숨지게 되었다. 그의 죄명은 ‘살인강도’였다. 
그는 어느 사형수보다 성실하게 수감생활을 했다. 자신의 영치금으로 임신한 여자 재소자들에게 기저귀와 분유를 사주기도 했고, 온갖 궂은일도 도맡아 했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 내가 마련해 준 부처님을 모시고 자신의 지난날을 참회했다. 다만 그를 힘들게 한 것은 아내에 대한 걱정과 어머니에 관한 그리움이었다. 임신한 아내를 제대로 축복해줄 수 없는 자신이 괴로웠으며, 자신을 버린 어머니였지만 죽음 앞에 서고 보니 ‘어머니’라는 이름은 너무나 그리운 것이었다.
하루하루 죽음 앞에 서야했던 그는 어느 날, 둥지에서 떨어져 다친 어린 참새 두 마리를 키우게 된다. 다친 다리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죽음을 앞둔 사형수였기에 더 그랬던 것일까. 그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는 어느 쪽이든 결코 가벼울 수 없었다. 그는 어린 참새를 처음 손에 쥐었을 때 참새의 따스한 체온의 의미가 가슴 벅차게 다가왔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감방 안에서 삶과 죽음의 행간을 오가고 있었다. 
시시각각 그에게 죽음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를 형장에서 만나야 했다. 스물여덟, 방영근. 그의 마지막 소원은 다섯 살 때 헤어진 어머니를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이승에서는 못 뵙지만 무덤 속에서나마 어머니를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를 그렇게 보낸 나는 그의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 전국을 떠돌았지만 그의 어머니를 찾을 수 없었다. 1985년 MBC 드라마 수사반장(‘참새와 사형수’)을 통해 방영근의 이야기가 전파를 탔다. 그리고 얼마 후 방 씨의 모친과 인연이 있다는 한 여인으로부터 방 씨 모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방 씨의 어머니가 맞았다. 하지만 방 씨의 모친은 7개월 전에 세상을 떠난 뒤였다. 결국 방 씨와 그의 어머니는 다른 세상에서 만나야 했다. 그를 생각하면 어디선가 부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자신의 죄를 부처님 앞에서 참회했으며, 자신으로 인해 불행해진 이들을 진심으로 걱정했고, 작은 생명을 구하며 삶의 소중함을 깨달았으며,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고 그리워했으니 그는 아마도 이 세상 어딘가에 불자로 다시 태어났으리라 믿는다. 경내를 거닐 때면 불현듯 그의 염불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사형수 묘지를 참배하는 삼중 스님(사진 가운데).
사형수 방영근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천도재를 지내는 삼중 스님(사진 왼쪽서 네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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