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식의 불교 속 부자되는법] 시장경제와 불교
[윤성식의 불교 속 부자되는법] 시장경제와 불교
  • 윤성식 고려대 교수
  • 승인 2018.03.2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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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불교는 시장과 자본 친화적 종교

 

부처님은 사유재산이 있었을까? 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깨달으신 뒤 급속도로 제자가 늘어난다. 기존 브라만교에 반대하는 신흥 종교인인 사문 중에서 부처님은 가장 성공한 사문이 된다. 성공한 부처님이 최초로 고향인 카필라 성을 방문하였으며 경전에 이와 같은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부처님은 많은 제자를 데리고 카필라 성을 방문한다. 아버지 정반왕은 부처님이 당연히 성안에 들어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부처님은 제자와 함께 성밖 숲속에 머무른다. 설상 가상으로 아침마다 걸식을 위해 제자와 함께 줄을 서서 집집마다 돌아다닌다. 정반왕의 눈으로 볼 때는 구걸하는 것이나 다름 없어 한탄을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경제활동에 우호적인 교리 구성
금융 ‘이자’ 필요성 인식
자본 소외 계층 위한 법문도


부처님이 제자를 데리고 카필라 왕국을 방문하자 부처님의 아내인 야수다라가 부처님의 아들 라훌라에게 “너의 아버지는 재산이 많다”고 말하면서 유산 분배를 요청하라고 부추긴다. 부처님이 재산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유산을 달라는 라훌라에게 부처님은 출가하라고 지시하자 라훌라는 머리를 깎고 출가하게 된다.

출가자에 사유재산 허용

사유재산이란 자본주의의 근간이다. 불교 출가자에게 사유재산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부처님 당시에는 광범위하게 허용되고 있었다. 생전에 재산이 너무 많아서 사후에 왕이 탐낼 정도였다는 어떤 출가자의 사례도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노비를 데리고 출가한 귀족도 있었다. 불교는 출가자에게조차 사유재산을 허용하였으며 사유재산도 물적 자원을 넘어서 인적자원에까지 허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스님이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경전의 구절이 있고 스님 소유의 집을 서로 교환하는 것도 허용했다.

불교는 친시장, 친자본적인 종교였다. 불교는 농민이 주축이 된 종교가 아니었고 이른바 도시귀족이라 불리웠던 신흥 상공업자가 주축이 된 종교였다.
오늘날 연구에 의하면 불교교리가 도시귀족의 문화에 부합했기에 부자들이 대거 불교를 믿었다고 한다. 불교의 친시장 친자본적인 경제관은 부자에게 전혀 이질감을 느끼게 하지 않았으며 불교의 혁신성은 부자에게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주로 평민계급 출신이었던 부자에게는 인도의 4계급제도를 부인하고 능력과 노력을 강조하는 불교가 마음에 들었으리라.

출신보다 능력, 자본가 활동 인정

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경제에 대해 아주 상세한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부자가 많은 종교인 탓으로 설법시에 돈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을 것이며 이는 부자의 경제생활에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불교는 돈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재물을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여 돈을 버는 것은 장려할 일이며 사회에 유익하다는 생각이야 말로 불교교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관이다.

불교를 기독교와 비교해보면 매우 흥미로운 점이 많이 발견된다. 초기 기독교신자는 원시기독교라고 불리우는 공동체 생활을 했으며 공산주의와 유사하다는 후세 역사학자들의 평가를 받는다. 이에 반해서 불교신도는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았다. 도심에서 포교한 불교는 신도가 주로 시장에서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을 주로 했으며 원거리 무역에 종사하기도 했다. 상인에 의해 불교가 전파되고 상인의 기부에 의해 불교교단이 확장되었기에 불교를 상업불교라고 부른다.

불교신도와는 반대로 불교출가자는 공동체 생활을 했으며 사유재산이 어느 정도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불교 출가자는 초기 기독교신자의 경제생활과 유사하지만 불교신도는 기독교신자와는 달리 시장자본주의 하에서 자유롭게 사적인 경제활동을 영위했었다. 불교를 사회주의적 색채를 가진 교단으로 보는 일부 학자의 주장은 출가자에게만 해당되는 주장이며 재가자에게는 전혀 적용될 수 없다.

불교는 자유시장경제를 인정하고 자유시장경제 하에서의 경제활동을 장려했다. 부처님은 시장에서 자유롭게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을 인정했고 거래에 있어 이익을 취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다만 출가자가 이익을 취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했다. 또한 자본가가 비용을 제외하고 남는 이익을 취하는 것에 대해 문제 삼지 않았기에 자본주의를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불교는 친시장, 친자본이며 시장자본주의를 경제의 주요 근간으로 인정한 것이다. 시장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유재산이다.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시장에서 자유로운 거래가 이루어질 수 없고 자본주의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재가자는 물론이고 출가자의 경우도 사유재산을 인정한 불교는 매우 친시장, 친자본적인 종교였다.

기독교·이슬람 모두 ‘이자’ 금지

오늘날 자본주의를 금융자본주의라고 부를 만큼 금융은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부처님은 농사 만이 아니라 상업, 목축, 심지어 돈을 저축해서 빌려주고 이자를 받으라고 하고 집을 지어서 빌려주고 세를 받으라고 부동산 임대업까지 권장하는 등 아주 다양한 경제활동을 권장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구절은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으라는 구절이다. 이자를 받지 못하면 금융업은 아주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중동의 오일머니를 국내에 들여오기 위해 정부에서 법을 제정하려다 기독교의 반대에 직면하여 포기한 적이 있다. 중동의 오일머니는 중동이 석유 수출로 축적한 금융기관의 보유 자금이다. 다른 나라의 자금과 달리 오일머니를 허용하려면 새로운 법제정이 필요하다.  이슬람교는 이자를 금지하므로 이자에 해당하는 돈을 주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즉 투자의 형태로 돈을 빌려 이자를 투자의 과실로 되돌려준다.

이슬람 뿐이 아니라 기독교도 종교개혁 이전에는 이자를 금지했다. 유태인이 유럽에서 특히 미움을 받았던 이유는 기독교인과 달리 이자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기독교도가 이자를 허용하지 않았던 시절에 유태인들은 유럽에서 홀로 금융업에 뛰어들어서 로스차일드 같은 세계적 금융기관이 탄생한다. 캘빈이 종교개혁을 하고 난 뒤에 기독교가 이자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기독교 은행이 설립될 때까지는 캘빈의 종교개혁 이후에 또 상당한 기간을 기다려야했다. 그것을 봐도 이자의 허용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알 수 있다. 기독교에 있어서 최고의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자를 악한 것으로 보았지만 캘빈은 이자를 정당한 것으로 보았다.

불교는 2600년 전 금융 장려

불교는 2600년 전에 이자를 허용했다. 허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장려까지 했다. 우리는 이자를 허용하는 불교를 당연하게 생각하기 쉽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와 비교해보면 매우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중아함경은 “처음에는 먼저 기술을 배워라, 그 다음으로는 재물을 구하고, 그리고 재물을 구한 뒤에는, 그것을 나누어 4분(四分)으로 만들라.' … '농사꾼이나 장사꾼에게 주어, 나머지 1분에는 이자(利子)를 나게 하고…”고 설한다. 돈을 절약하여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으라는 주장은 알고 보면 금융업을 장려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초기 불교 시절 사찰은 부동산의 대부, 대출 등의 금융활동을 해왔다. 한국 불교에서도 계의 전신에 해당하는 보(寶)는 처음에는 불교의 교리를 실현하기 위해서, 또는 사원의 기본 재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이자사업의 기능을 했다. 중국에서도 무진장, 장생고 같은 금융기관이 사찰에 설치되어 경제에 중요한 활동을 했다.

부처님은 이자가 경제활동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인식했지만 돈 빌리는 사람은 부채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고 생각하고 이자를 고통의 원인으로 보았다. 중아함경은 “세상에서 욕심이 있는 사람이 빈궁한 것은 큰 고통이요, 세상에서 욕심이 있는 사람이 남의 재물을 빌리는 것은 큰 고통이며, 세상에서 욕심이 있는 사람이 남의 재물을 빌려 이자가 길어 가는 것은 큰 고통이요, 세상에서 욕심이 있는 사람이 빚 주인의 독촉을 받는 것은 큰 고통이며, 세상에서 욕심이 있는 사람의 빚 주인이 자주 그 집에 가서 독촉하는 것은 큰 고통이요, 세상에서 욕심이 있는 사람이 빚 주인에게 묶이는 것은 큰 고통이라 하느니라.”라고 설한다. 부채가 얼마나 큰 고통이며 이자가 늘어가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자본 소외 계층 위한 대안도 제시

빚진 사람을 출가하여 빚쟁이가 끌어가게 했느냐고 부처님이 꾸짖고 있기에 빚을 지면 사람을 끌어갈 수 있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전은 “구족계를 주려면 남의 빚을 지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주어야 한다.”고 설한다. 따라서 빚진 사람은 비구로 받지 않았다. 부채가 있는 자 이외에도 부모가 출가를 허락하지 않는 자, 주인의 허락이 없는 노비, 현역중인 관리나 군인, 완전한 남자가 아닌 자, 나병 등 6가지의 병이 있는 자는 비구가 될 수 없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금융자본주의라고 부를 정도로 금융이 자본주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불교는 일찍부터 금융이 매우 중요한 경제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긍정적으로 보고 허용했다. 금융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허용하는 것은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사찰이 직접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유부율’에서는 삼보(三寶)를 위해서라면 무진물(無盡物)을 회전하여 이익을 추구해도 좋다고 설한다. 중생구제를 지향하는 대승불교는 불자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으며 자비의 관점에서도 금융기관이 서민의 경제생활에 도움을 주어야 했을지 모른다.

시장자본주의는 지난 몇 세기 동안 눈부신 경제발전을 성취했지만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새로운 자본주의에 대한 모색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불교의 경제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20세기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더욱 더 시장자본주의의 문제점이 부각되는 세기가 될 것이다. 오늘날 시장자본주의가 처한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어쩌면 친시장, 친자본의 관점에서 시장자본주의를 수용하되 불교적 해법으로 보완했던 불교가 도움이 될 수 있다. 불교자본주의가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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