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다고 하더라도 그 본성은 그대로 있는 겁니다!

 

마음이 편해진 다음의 공부

질문 저희가 마음공부를 해 나갈 때 처음에는 무조건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공부해 나가다 보면 마음의 번뇌가 사그라들고 마음이 편안해져 옴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편안한 상태가 깨달음은 아닌 것 같은데, 다 놓아서 마음이 편해진 다음의 공부 방법은 무엇인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변 지금 시쳇말로 공부하는 과정을 시(詩)로 한마디 읊겠습니다. 잘 파악해서 들으시고 또 이날까지 가르쳐 드린, 가르쳐 줬다고도 할 수 없지만, 우리 자가발전 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이고 숭상하던 그 과정을 말하는 겁니다.

내가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나와 남이 두루 같이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나와 남이 같이 두루 나투는

이름 없는 이름이여

해산봉은 화산 터져 두루 불이 진동하여

이름 없는 이름이

그대로 여여하더라

이것은 누가 가르쳐 줘서 하는 말도 아니요, 누가 지어서 하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이 세상을 두루 살피고 또 살핌 없이, 자기가 스스로 한 티끌만도 못하고 깨알쪽만도 못한데…, 다 실은 뜻입니다. ‘또 한 말 다시 하나.’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읊은 그것은 우리가 제일 첫 번에, “들고 나는 모든 것을 주인공(主人空)에 놔라. 맡겨 놔라.” 이래서 내 마음이 편안해질 때 결국은 그때에 진짜 관(觀)해야 됩니다. 편안해졌을 때, ‘주인공, 당신이 있다면 대답해 봐.’, ‘당신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왜 이렇게 하느냐.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좌선을 하고 편안해졌다고 해서 가만히 있으면, 편안한 것이 공부라면 이것은 영 발전이 없습니다. 좌선을 해서 편안하다고 해서 그것을 그냥 묵인하고 ‘이만하면 족한 것을….’ 한다면 그걸로써 족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또 공(空)에 빠지고. 그다음에 내 마음을 발견했을 때, 내 대답을 내가 들었을 때, 그때는 앞서의 그 습을 다 놨기 때문에 미비한 점이 없어요. 그래서 일 단계는 다 놔야 된다. 그 다음에 편안해지면 나를 발견해야 한다.

“들고 나는 모든 것을 주인공(主人空)에 놔라. 맡겨 놔라.”
이래서 내 마음이 편안해질 때 결국은 그때에 진짜 관(觀)해야 됩니다.
‘주인공, 당신이 있다면 대답해 봐.’ 하는 것을 관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발견해 가지고 진짜 공부를 하는 겁니다. 그때는 다시 체험하고 실험을 통해서 생활에 조금도 걸림 없이 하나서부터 열까지 다시 보임(保任)을 하면서 다시 굴리면서, 안으로만이…. 네 탓이니 내 탓이니 하고 남 볼 겨를이 없습니다. 아니, 볼 겨를이 없는 게 아니라 남의 잘못, 잘된 것을 말할 사이가 없다 이겁니다. 그러면 “그건 바보가 아니냐?” 이러겠지만, 그래서 아까 얘기한 겁니다. “나와 남이 더불어 같이 죽은 이름 없는 이름이여.” 했습니다. ‘두루 같이’입니다.

가정이나 사회에서나 모든 게 두루, “두루 같이 죽는 이름이여.” 했습니다. 더불어 둘이 아님을 알면서 체험하면서, 남한테 잘못했다 잘했다 말할 수 있는 겨를이 없이 안으로 굴려서 안에다 놓고 말을 하면서, 안에다 놓으면서 말을 했어도 말을 한 사이 없이 해야 합니다. 그럼 스스로 그렇게 됩니다. 나를 발견하게 되면 스스로 그렇게 됩니다. 발견했어도 만약에 그 습이 앞을 가린다면 자꾸 내가 잘났다고 하게 됩니다. ‘내가 제일이다.’, ‘나는 깨달았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다면 그 ‘깨달았다’는 거기에서 그만 더 진전을 못하고, 더 계발을 못하고, 두루 물리가 터지지 못한 채 그냥 멈춰 버리고 말고 미(迷)해집니다. 해산을 해서 어린애를 낳았는데 갓 태어난 아이가 자라지 않고 어떻게 어른 노릇을 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육조 스님이 십육년 동안을 그렇게, 깨달아서 바리때를 이어받아 가지고도 그만큼 노력을 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달마 대사 역시 면벽을 했고, 깨달았어도 그렇게 했다는 얘깁니다. 그것은 같이 두루 나투는 방법을, 둘이 아니게 할 수 있는 그것을 아주 정열적으로 확고히 알려고 했던 거죠.

생활이 불법이자 진리이자 과학이기도 합니다. 안에서 생각했으면 반드시 바깥으로 나오니깐요. 여러분은 생활 속에서 그렇게 살아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깨달아 가지고도 내가 ‘나’라는 게 없는 공부가 바로 진짜입니다. 자기가 자기 스승을 따라가면서 자기가 배우는 거죠. 자기는 시자로서,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공부 가르치는 자기로서, 자기는 공부를 가르치고 또 배워야 합니다. 자기는 놔야 하고 자기는 바로 항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공부하는 데는 역시 각오가 튼튼해야만 합니다. 앞서 그 “같이 나투고 두루 불이, 이름 없는 이름이여.” 했습니다. 그런 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공부를 하게 되면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돈오(頓悟)나 점수(漸修)나 물 흐르는 데 붙지 않듯이 다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생활과 부처님 법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이건 정말 오산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생명들과 보이는 세계의 생명들이 둘이 아닌 까닭에 여러분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있습니다. 아니, 여러분이 두 분이서 어린애를 다섯을 낳을 수도 있고 한 명을 낳을 수도 있지만 저 짐승들이나 저 바다의 모든 생물들이 낳는 알 수효를 보십시오. 그와 같이 보이지 않는 데서도 한생각에 그렇게 수효가 많은, 모습 없는 모습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그거를 어떻게 산 사람들이 감당해 나갈지, 그것도 모르는데다가 함부로 생각을 해서는 아니 된다 이겁니다.

사람이 귀신 짓을 하기 때문에 귀신이 있는 거지 귀신 짓을 안 한다면은 귀신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공부하는 과정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마는 그거 한 가지는 꼭 짚고 넘어가야죠. 지난번에도 그렇게 얘기했는데 또 잊어버리시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다시 한번 말을 하겠습니다. 깨달았어도 타의에서, 여러분이 바깥에서 산기도를 간다 또는 법당에서 부처님을 찾는다 또는 무엇을 바깥에서 찾는다고 할 때, 관세음보살이든지 뭐든지, 이름은 상관이 없습니다. 바깥에서 찾기만 하면 잘못되는 수가 많습니다.

정신질환이 생기는 원인이 어디에서 나오는 줄 아십니까? 세 가지 여건이 있죠. 바깥에서 찾는 데서 오는 게 있고, 유전성으로 오는 게 있고, 내 마음 속에서 어떠한 쇼크를 받아서 오는 게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다 처리를 하시렵니까. 바깥에서 찾는 것은 그렇게 타의에서 와 가지고 “얘, 난 아무개다. 난 네 할아버진데. 난 네 아버지야. 나는 아무 때 죽은 누구다.” 이러고 달려든다 이겁니다. 그러면 그게 다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요. 이건 미쳐 죽을, 환장해 죽을 노릇이죠. 내가 여러분을 접해 가면서 수없이 겪어 왔던 일입니다.

너무 지겨워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그것을 딱 뒤집어서 말입니다, “이건 바로 너니까 너한테다 너가 장난을 하는 거니까, 이건 장난하는 그 이름들이 너를 떠보기 위해서 이름을 이거다 저거다 들고 나오는 거다. 바로 그것이 타의에서 그렇게 나오는 게 아니고 조상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너다, 바로.” 이렇게 얘길 하죠. 그러면 다행히 그걸 들으면 즉시 낫고 그걸 안 듣고 고집을 부리면 낫지도 않죠. 타의에서 온 거는 참 빼득빼득하니 이런 말을 해 줘도 듣지도 않아요. 그런 사람들은 사실은 더뎠습니다. 그 사람이 그러든지 말든지 무조건 심부름을 해 줘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무거운 것도 같이 들면 쉬울 것을, 들지 않을 때는 같이 들지 못해서 쉽지가 않더라는 얘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하는 데에 그런 걸 조심해야 한다는 문제입니다.

일체가 무엇이며 무엇을 관해야 하나

질문 관(觀)에 대해서 여쭤 보겠습니다. ‘일체를 관해야 한다’ 하는데 일체가 무엇이며, 무엇을 관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답변 요새 모두 화두를, 일체를 놔두고도 또 화두를 잡고 끊어질까 봐 애를 쓰는데, 일체라는 것은 자기가 이 세상에 나와서 지금 찰나찰나 화(化)해 가면서 돌아가고 있으니 일체지요. 자기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상대가 있기 때문에 우주가 있듯이 말입니다. 모든 것은 일체 같이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둘이 아닌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일체, 일체” 하죠. 그러니 지금 ‘일체 모두 놓고 관(觀)하라’ 이런 것입니다.

내가 날더러 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난 네가 형성시켰고 수억겁 광년을 거쳐 오면서 네가 나를 운전해 왔어. 진화시켰어. 형성시켰어. 그러니 나를 이끌어 가지고 가는 것도 너고, 말 한마디, 생각 하나, 행동 하나 하게 하는 것도 너니까….’ 그 속에서 나오는 거 그 속에 닥쳐오는 대로 놓는 것이 관하는 거죠. 그래서 맡겨 놓는다면, 앉으나 서나 바로 도량은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앉은 자리에 자부처는 있는 것이죠. 자부처부터 알아야 바로 우리 마음속의 그 모든 의식 자체 생명들이 같이 화합을 해 주게 됩니다. 내 국토부터 다룰 줄 알아야, 바로 보살로 화해서 남의 국토도 내 국토와 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소리죠. 그래서 ‘관하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 말 한마디 하고 넘어갈 것은, 내가 이 세상에 나온 것이 태초요, 내가 이 세상에 나온 것이 화두입니다. 그런데 그 화두마저도 공했다 했거늘,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라’ 했거늘 거기에다가 또 남의 화두까지 받아 가지고 ‘이게 뭣고?’ 하고 먹지 못한다면 그것은 십 년, 백 년을 가도 지금 시대에는 아니 된다 이거죠. 왜냐. 전자에는 그게 씨가 먹었지만 지금은 모두 머리로 알고 있는 게 너무 많아요. 천체물리학이니 과학이니, 또 지리학이니 의학이니 천문학이니 이런 것이 전체, 머리의 알음알이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씨가 먹질 않습니다. 밥 한 그릇 남이 준 거를 들고 ‘이 뭣고?’ 하고선 이것을 가지고 있다면, 자기도 공했고 그것도 공했거늘 어찌 그거를 들고 끊어질까 봐 애를 쓰느냐 이겁니다.

또 좌선을 할 때는 내 안으로 관한다면 그게 같이 들리지마는 바깥으로 끄달리면서 좌선을 한다면 그것은 바로 안 하느니만 못하다. 왜냐. 지금 시간과 공간이 초월돼서 모든 소용돌이가 찰나에 이렇게 돌아가는데, 지구가 돌아가고 혹성이 돌아가고 우주가 돌아가고 사람도 돌아가고 사람의 마음도 돌아가고 고정됨이 없는데, 좌선을 하고 앉았으면서 하루 8시간을 앉았다 하더라도 단 5분 한 것만 못하다 하는 것은 사람들이 좌선을 할 때에 관하라니까 화두를 들고 그것이 끊어질까 봐 애를 쓰고 ‘이게 뭣고?’ 하는 게 관하는 건 줄 안다 이 소리죠. 새 물이 들어오면서 헌 물은 배출되고 이렇게 돌아가는 시대에, 만약에 그 물을 그냥 두고 있다면 그 썩은 물을 그냥 우리가 쓰는 거와 같은 거죠.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도 그랬죠. 선지식들이 “위로 눈을 뜨지도 말고 아래로 내려 보지도 말고 코끝을 내려다보고 아주 정연하게 관하라.” 이런 말을 했거늘, 그것은 무슨 소리냐.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내다봐라. 그리고 올려다보고 내려다보고 바로 중도에서, 중용에서, 중심을 잡고 모든 것을 똑바로 중도에서 보라 이런 소리죠.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안 해요. 요새 너무 아는 게 많아서 그런지 혼란을 일으키고 말입니다, 남의 소리나 듣고…. 부처님이, 석가세존이 이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석가세존의 몸뚱이를 믿으라고 한 게 아닙니다. 그 말씀을 믿고 따르고, 진짜 믿는 것은 그 부처님의 마음이 내 마음속에 항상 서리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물질을 보고 끄달리지 말고 그 마음을 뚫어 보기 위해서 내 마음부터 뚫어 봐라 이 소리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첫째도 나를, 나라는 존재를 버려라. 버리는 게 아니라 맡겨 놔라. 아집을 버리고 말입니다. 그것은 왜냐. 여러분이 여직껏 살면서도 고정되게 보신 게 있습니까, 들으신 게 있습니까. 또 말하는 게 있습니까, 가고 오는 게 있습니까. 먹는 것이 고정됩니까. 하나도 고정된 게 없어요. 그런데 자동적으로 이 사람 만나면 이 사람 만나는 대로 뜻과 행과 말이 나가고, 저 사람 만날 땐 저 사람 만나는 대로 뜻과 행과 말이 나가니 그건 무슨 연고냐 이겁니다. 그러니 나라는 게 어딨는가. 누구 만날 때 내가 만났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부처는 없는 게 부처다 이런 소리죠. 그래서 관하라 하는 겁니다.

불성과 영혼에 대해서

질문 『한마음요전』의 원리편에 “불성은 영과 다르다. 영은 보이지 않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며, 모습 없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영혼은 각자 생각 내는 그릇에 따라 좌우된다. 그러나 불성은 더함도 덜함도 없이 움직이지 않으면서 돌아간다.”라고 나와 있는데 좀 헷갈리는 것이 있기 때문에 논의의 소지가 있지 않나 싶어서 질문드립니다.

답변 사람마다 다 본체가 있습니다, 근본 본체. 즉 말하자면 본체라는 것은 근본과 이 체와 둘이 아닌 그 자체를 본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예를 들어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 본성은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대로 있기에 그 불성 자체를, 하늘과 땅을 기준해서 불기둥이라 한다면, 불(佛)이라는 것은 생명의 근본을 말합니다. 그래서 방편으로 기둥이라고 할 수 있죠. 왜냐하면 그렇게 돼 있으니까요. 직결이 돼 있고 우주와도 직결이 돼 있고, 이 모든 일체 만물이 자라는 그 땅과도 합류화가 돼 있습니다, 천지가 합류화돼 있듯이.

그래서 그 기둥이 있으면 그 기둥을 끼고, 수레가 돌듯이 돌아가는 겁니다. 지금 우리 생사윤회 일체가 돌아가는 것이 그 기둥을 끼고 돌아가는데, 그 기둥은 움죽거리질 않습니다. 움죽거리질 않으면서 그 능력만 배출해 주는 거죠. 안 그렇습니까? 하다못해 자동차가 가는 것도 바퀴를 굴리려면 그 심봉이 들어가야만 됩니다. 그런데 바퀴를 꿴 그 심봉은 움죽거리질 않습니다. 움죽거리질 않으면서 바퀴가 굴러가게끔 그 힘만 배출해 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성은 움죽거리질 않는다’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지금 돌아가고,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바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잘못 쓰면 그 바퀴에 나쁜 게 감기고, 또 좋은 마음을 써서 악이 거기에 붙어 있지 않는다면 선이 입력이 되는 거죠. 그렇게 입력이 되어 있는 그것을 바로 영(靈)이라고 그럽니다. 영! 그리고 혼백(魂魄)이라고 그러죠. 그러니까 근본 불성하고는 아주 다른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을 내되, 악하게 쓰면 안 되니까 선하게 써라 이러는데, 부처님의 마음공부에는 “악한 것도 선한 것도 다 놔라” 이랬습니다. 왜냐하면 악하게 쓰다 보면 선하게 쓸 수도 있고 선하게 쓰다 보면 악하게 쓸 수도 있으니까, 그 양면을 다 놔라 이겁니다. 그 양면을 놓는 법이 내가 지금 여기서 일러 드리는 그것입니다. 선은 감사하게 놓고, 악은 ‘악이 나오는 것도 그 자리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 악이 나오지 않게 하는 것도 그 자리다.’ 하고 모두 거기다가 입력을 해라 하는 겁니다.

그래 재차 말을 하자면 이 영혼이라는 것은요, 자기가 어떻게 살아나갔느냐에 따라서 그 영혼에 인과가 붙어 있습니다, 영혼에. 자기가 지금 살아나가는 데에 악한 인연도 선한 인연도 모두 합세해서 인연이 되죠? 그것이 컴퓨터에 입력이 되듯이 입력이 되기 때문에, 이 인간에게는 자동적인 컴퓨터가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거를 누진이라고 이름하겠습니다. 그 모든 것이 입력이 되는데, 즉 말하자면 과거의 악업이든지 선업이든지, 또는 인과성·윤회성·업보성·세균성·영계성 이 모두 다섯 가지를 합친 그것을 바로 인연 삼아서 영혼이 자기 그릇대로, 차원대로 정자 난자를 택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깡통에게 갈 것은 깡통에게 가고, 금한테 갈 것은 금한테 갑니다. 그래서 이것이 가족이 되는데, 이 몸속에도 가족이 돼 있고 바깥에도 가족이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깡통은 깡통대로 만나고 금은 금대로 만납니다. 구성되는 것이 이렇게 철두철미합니다. 우연히가 없습니다. 그래서 깡통은 깡통대로 만나니까, “누구의 탓도 하지 마라. 서로 깡통의 차원이어서 깡통끼리 부딪쳐서 소리만 요란한 것이니까 이것도 깡통이 된 내 탓이다라고 생각해라.” 이런 겁니다. 그래서 누구도 원망하지 말고 자비한 마음으로써 부드러운 행동과 부드러운 말을 해 준다면 서로가 ‘아, 내가 이렇게 악한 말을 하는데도 저렇게 선하게 저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녹아지고, 녹아지면서 또 이쪽도 그렇게 서로 응하게 됩니다. 사랑할 수 있도록 응해지죠. 그럼으로써 화목해집니다. 그러면서 화목해지면 돈도 그 화목한 집에 들어가지 악한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가지고 영혼 이 자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불성이라는 것은 한 근본을 말하는 거고요, 주인공이라는 것은 내 몸체와 마음 내는 거와 불성을 통합한 겁니다. 지금 주인(主人)이면서도 공(空)해서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돌아가는 자체를 바로 딱 집어서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전체를.

공부가 잘되도록 하려면

질문 제가 선원에 다니고 있는 지는 몇 년이 됩니다. 매일 빠지지 않고 선원에 나가서 부처님께 삼배 올리고 선원 불사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일하고 있습니다마는 공부가 잘되지 않습니다. 이 공부가 잘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좋은 법문 내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답변 그렇습니다. 지금도 얘기하고 있지만, 그렇게 염불을 하고 아무리 기도를 해도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자주 얘기하죠. 우리가 사는 대로 그냥 찰나찰나 없어진다고요. 그러니까 찰나찰나 없어지면서 자기 한 발로 그냥 뚜벅뚜벅, 그래서 한 발이죠. 한 발로 뚜벅뚜벅 가는 겁니다. ‘손 없는 손과 발 없는 발이 그대로 여여하게 함이 없이 하는구나.’ 이러듯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불상에다가 연연하지 마시고요. 자기니까, 자기 모습이니까요.

여러분을 가르치기 위해서 저 부처님을 몇 번이나 부순 줄 아십니까? 자기 모습과 같다 이겁니다. 그래야 공부를 하겠으니까 지금 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주인공한테 모든 걸 하는 거예요. 그래서 법당에 들어가면 세 번을 절하는데, 둘로 보지 말고 다 거기다 맡겨 놓고 둥글게 예배를 하세요. 또 네 번째 예를 올릴 때는 전부 둥글게 자기 주인공에다 다 한데 합쳐서 하고 나가시고 그러세요. 그리고 뭐, 뭐, 뭐, 뭐, 안 된다 된다를 자꾸 나누면 도는 이루지 못하시죠. 그러니까 이거 한 가지만 알면 거기서 의학도 나오고 과학도 나오고 전체가 다 나옵니다. 거기서 다 나오는 거예요. 다른 거 없습니다.

그러니까 몸은 부지런히 일을 하되, 그것이 공덕을 짓는 인연이죠. 인연을 짓되 함이 없이 하는 걸 알아야 그게 큰 공덕으로 갑니다. 그리고 걱정을 하지 마세요. 안 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야, 이놈아! 되게 하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선 거기다 하는 거지 아, 되기만 하면 어떻게 공부를 합니까? 안 되는 것도 공부를 해야 되는 것도 알죠. 이 세상이 밤낮이 생기고, 또 해가 뜨고 해가 지고 하는 거, 이것이 그냥 진리거든요. 우리가 그 진리 속에서 이렇게 살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허심탄회하게, 아주 담담하게, 마음을 절대로 물러서게 하지 마시고, 허툴게 하지 마세요.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많은 생각을 하더라도 오직 그놈입니다. 오직 그놈이 하는 건데 내가 걱정을 해서 뭘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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