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일이닥쳐오는대로커버할수있는능력을길러야!

(지난 호에 이어서)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길에 디글디글 구르는 해골 무덤을 보고도 삼배를 올렸습니다. 제자들이 “사생자부이신 어버이신데 어찌 해골에다 대고 절을 하십니까?” 하니까 “얘야, 그 말 마라. 과거로부터 끝 간 데 없이 돌아가면서 내 부모가 됐고 내 형제가 됐고 내 자식이 됐고 내 할머니가 됐고 그랬는데 어찌 남이라고 하겠느냐.” 그래서 절을 하셨거든. 제자들이 그 소리를 듣고선 거기 엎드려서 “미처 몰랐습니다.” 하곤 그냥 울었던 겁니다.

그렇듯이 내 생각에 그렇습니다. 항상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내 어머니 아닌 게 없고 내 오빠 아닌 게 없고 내 자식 아닌 게 없고 내 아픔 아닌 게 없습디다. 내가 아파 보니까 너무도 더 잘 알겠어요. 그냥 ‘아, 그런가 보다.’ 이렇게 생각한 거보다도 내가 실질적으로 아파 보니까 아하! 야, 눈이 안 보여도 안 되겠고 귀가 안 들려도 안 되겠고 야, 한 손을 못 써도 안 되겠고 허리가 아파서 일어나지 못해도 안 되겠고 다리가 불편해서 못 걸어도 안 되겠고, 그러면 어떤 게 좀 낫고 어떤 게 더하냐 이겁니다. 작든지 크든지 그 사람에 한해서는 그렇게 기가 막힌 괴로움입니다, 그게.

그러니 크고 작은 게 닥쳐올 때 누가 장담합니까? 이 세상에 누가 내일 장담을 하고 삽니까? 다섯 식구든지 열 식구든지 그거는 상관없습니다. 열 식구가 한 식구라면 한마음, 이 속에도 한마음이요, 거죽에도 한마음이야. 좀 더 마음을 넓혀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 하면, ‘둘’ 해도 하나고 ‘셋’ 해도 하나듯이 우리 한 식구가 수십억 마리라도 바로 한마음입니다, 한마음. 그래서 안에서 그렇게 수효가 많아도 한마음이요, 바깥의 그 식구가 열 식구라도 한마음 주인공. 그러니까 ‘한마음의 주인공’ 하면 한 식구의 기둥이 올라가는 겁니다, 기둥! 그래서 “우리 마음을 닦아서 하늘을 받칠 기둥이 되고 또는 한마음을 닦아서 이 세상을 다 한 손에 넣고 내 아픔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자비를 길러라.” 이런 겁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불로 심판을 한다는 둥 급하다는 둥 이러죠. 그러나 내가 급하다는 거는 다른 게 급한 게 아니라, 불로 심판을 한다는 뜻이 뭔 줄 아십니까? 그 사람네들이 몰라서 그래요. 불이 나서 불로 심판을 한다는 게 아닙니다. 불은 생명의 근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생명과 나의 마음이 심판을 해야 된다 이 소립니다. 심판! 허허허…. 전생과 이생이 심판을 해야 된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불로 심판을 받는다 이겁니다. 내 전생의 그 영원한 근본과 바로 지금 현생의 나의 마음이 심판을 해서, 즉 말하자면 자기가 잘못한 거는 잘못한 것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얘깁니다. 그런 거지 어디 뭐, 불이 나고 어디 핵이 터져서 그렇게 해서 심판을 받는다는 게 아닙니다. 나부터 알아야 됩니다, 나부터. 또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그래서 예언을 하고, 모르고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한다면 그거는 한데로 떨어지죠. 그러니까 내가 스물두 살 적인가 한 살 적인가, 불로 심판받는다는 게 여직껏이야. 허허허, 여직껏 불로 심판을 하니 급하다고 급하다고…. 급하기는 우리들이 살림살이하면서 우리 마음공부, 깨닫는 게 급한 거지 다른 게 급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핵폭탄이 떨어져서, 즉 말하자면 핵폭탄보다도 더 무서운 수소폭탄이 떨어져서 다 죽는다 하더라도 풀 한 포기만 살아 있어도 그거는 불교가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물, 흙, 바람, 불 이거 네 가지가 다 생명이 있는 겁니다. 그 생명이 존재하기 때문에 바로 그게 한데 합쳐져서 우리가 지금 딛고 다니고 살고 있고 먹고 있고, 지금 발바닥에 흙을 묻히고 발바닥을 대고 다니고 공기를 마시고 이러고 삽니다. 그렇게 하고 살면서도 감사한 걸 모릅니다. 자기도 지수화풍이기 때문에 지수화풍을 먹고 사는데 감사함을 못 느낍니까? 바깥의 물에다 감사하라는 게 아닙니다. 나한테 내가 감사하면 바로 그 지수화풍에다 감사하는 겁니다. 복잡하게 살 필요가 없어요. ‘주인공! 한마음 주인공!’ 하면 전체에, 이게 벌써 물에도 감사하고 불에도 감사하고 흙에도 감사하고 바람, 공기에도 감사하는 그 마음이라는 겁니다. 거기에 감사하면 모든 것에 다 감사한 겁니다. 우리 식구들을 참 잘 이끌어서 한 식구를 행복하게 이끌고 나가는 것도 감사한 겁니다. 자기한테 자기가 감사해야지 누구한테 감사합니까?

그러니까 타의에서 구하지 말고 자의에서 구하라 이겁니다. 주처는 자의한테 있지 타의에 있는 게 아니다. 고상을 걸어 놓고 ‘하느님이시여! 하느님 아버지시여! 주여!’ 하고서 아무리 빌어 봐도 타의에서는 받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지옥이 있고 천당이 있는 거를 아예 모릅니다, 모두가. 그러니 우리 이 공부가 얼마나 좋습니까, 실험하고 체험하고. 자기가 아팠을 때 자기가 실험해 봐서 나으면 아하, 요렇게 내가 딸이었을 때는 딸의 행동을 하고 말을 하고 뜻으로 하듯이, 내가 아프니까는 요렇게 요렇게 낫게 하니까 요거는 내가 바로, 내 주인공이 바로 의사가 되고 명을 길게 해 줄 때는 금방 바로 칠성이 되고, 하이고, 얼마나 좋아, 글쎄. 자기한테서 일체 만법이 다 나오는데 뭣 때문에 활발하게 못 살고 뭣 때문에 꼬잘꼬잘하게 바깥에서 구원을 받으려고 노예가 돼서 만날 빌고 그렇게 해야만 됩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이 공부를 해 보시면 그 뜻을, 내가 말하는 뜻을 알아요. 마음과 마음은 이어짐이 없이 이어지고, 생명과 생명은 이어짐이 없이 같이 공생을 하고 돌아간다. 사람은 독불장군이 없이 높은 게 있으면 얕은 게 있고 얕은 게 있으면 높은 게 있듯이, 회장이 있으면 사장이 있고 사장이 있으면 직원이 있고 그렇게 해서 다 돌아가면서 산다. 사장은 직원이 없어도 못 살고 또 직원은 사장이 없어도 못 사니, 이거는 모든 게 평등하게 같이 돌아가니 딴 남이 어디 있으며 딴 집이 어디 있으며 바로 우리의 한도량이 아니냐 이거죠.

그러니 내가 잘못해 놓고는 떠억 부처님한테 가서 빌거나 내가 잘못해 놓고선 고해 성사 한다고 가 가지고는 “신부님! 내가 이렇고 저렇고 이렇고 저렇고 했는데 사해 주시오.” 해도 그건 소용없어. 자기가 스스로 잘못된 줄 알고 그걸 뉘우치면 그때부터 없는 거야. 죄 붙을 자리가 없는 거야, 마음은. 마음은 체가 없어서 붙을 자리도 없고, 죄 붙을 자리도 없고, 병 붙을 자리도 없고, 명 짧다 길다 이러는 것도 붙을 자리가 없어. 그러니 무상이지. 부서지고 변하고 죽고 살고 생사윤회 이런 것이 그냥그냥 얽매여서 돌아가는데. 그뿐인가. 사람이 살아가면서 인과로써 업보를 지어 가지고선 윤회성이나 또는 인과성 영계성 세균성 업보성으로 이 고에 그냥 휘달려서 넘어가죠, 뭐.

그러니 이 도리를 배우라고 내가 안 하겠습니까? 여러분도 몰랐을 때의 나와 똑같은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이 모른다고 해서 내가 답답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은 바로 내가 여러분처럼 몰랐을 때의 납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지, 나는 여러분보다 더 잘 아니까 내가 높다 이렇게 한 번도 생각해 본 예가 없습니다. 내가 알면 언제 적부터 그렇게 내내 알았겠습니까? 고생을 하면서 산길을 걸어가면서 골짜기를 넘어가면서 밥을 굶어 가면서, 손을 빗을 삼아서, 고운 모래를 칫솔 삼아서 이렇게 홑옷을 입고 저 얼음을 깨트려서 그거를 맹물에다 비벼서 그냥 찬 거를 입고 말리고 이렇게 해 가면서 그것을 실험한 겁니다. 이렇게 안이하게 있으면서 이 도리를 안 게 아닙니다. 알고 보니까 ‘이렇게 피눈물 나오는 이 고(苦) 속에서 이렇게 모르고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너무나 뼈저리게 아픔을 가져왔습니다.

내가 몸을 가진 여러분과 똑같은 이 몸이라 때에 따라서는 아프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그렇기도 하겠죠. 잠깐잠깐 아픈데도 그러니 여러분이 누가 그렇게 아파서 애쓸 때 세상에, 그걸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그거를 어디다가 다 말을 합니까? 그러니 늙었다고 안 하고 젊었다고 안 하고 학교 다닌다고 안 하고 장사 다닌다고 안 하고, 어이구, 이거 참! 하하. 그러고 언제 어느 때…, 죽을 날도 없겠네요. 하하하…. 그러나 속수무책입니다. 쓰러질 땐 그냥 속수무책이에요. “여보! 나하고 같이 갑시다.” 그러니까 “당신 가는데 내가 어찌 대신 가 주겠소?” 하더랍니다, 네? 그렇게 사랑을 했건만. 하하하…. 그러니까 이 실험하는 것도 여러분 혼자입니다. 아파도 그렇고, 여러분이 다는 모릅니다. 살아가면서 보십시오. 지금도 그렇습니다. 자식한테 할 말 다 하고 삽니까? 부부지간에 할 말 다 하고 삽니까? 그저 속 안 썩이려고 말 안 하는 것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화낼까 봐 말 안 하는 것도 있고 내가 몸이 아파서만 아픈 게 아니라 쓰라린 그 모든 일들을 어떻게 다 말을 하고 삽니까? 그러니 나를 끌고 다니는 내 주인공을 믿어야 그래도 거기다 의지를 하고 살죠. 네? 내가 죽어서 가도 같이 갈 수 있는 거는 바로 내 영혼 나 자체입니다.

내가 지금 여러분한테 귀중한 말을 했습니다. 내가 마음먹었던 대로 과거의 인과 인업으로 인해서 여기에 뭉쳐 있는 대로 나오면 상관하지 마라. 거기에 자꾸 말리지 마라. 그럴 적마다 거기다 맡겨 놓곤 거기에 말려들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도. 왜냐? 죽어서 사대가 흩어지면 모두가 이게 구름이 헤어지듯이 분화돼서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고 저것도 되고 저것도 되고, 이렇게 나갑니다. 수효가 그렇게 많아요. 한생각이 잘못되면 그렇게 만 가지 생각이 틀려 넘어가듯, 염주알 하나가 빠지면 죄 주루루루 빠지듯이. 우리 부처님 법이 부처님 법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법이, 바로 여러분이 부처님이고 그 배 속에는 중생들이기 때문에 부처님 법이 바로 중생들 법이요, 중생들 법이 바로 부처님 법이다 이겁니다.

우리는 그 법을 배우기 위해서 방편으로 부처님을 저렇게 조성해서 앉혀 놓은 겁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한마음으로 저기도 다 응시하고 있습니다. 돌 하나도 신이 없는 게 없습니다. 돌도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마음을 한데 모아서 벌써 조성해서 모셔 놓고 봉불식을 하고 이렇게 하는데 어찌 거기 마음이 없겠습니까. 우리들의 마음이 거기 한데 합쳐서 지금 있죠. 그러니 부처님이죠. 여러분이 계시니까 저기 계시고, 저기 계시니까 여러분이 계신 겁니다. 그것도 모두가 둘이 아니죠.

그러니 여러분이 변소간에 가만히 앉아서 똥을 누면서도 조용히 생각을 해 보시면 그게 얼마나, 부처님 따라다니면서 절을 108배씩 하는 것보다도 한생각이 중요하다 이겁니다. 그걸 배우기 위해서 이 도량에는 그래도 스님네들이 공부할 수 있고, 공부해 나가고 있고 공부한 스님네들 그 마음들이 지금 울립을 하고 있고, 여러분의 마음들이 여기 직결돼 있기 때문에 한마음의 신이, 여기 지금 부처님들이 가득 차 계시니 여러분이 마음 한생각 내서 여기 왔다 가셔도 전기가 충전이 되듯이 바로 충전이 된다 이 소립니다. 누가 말을 해 주고 안 해 주고 그걸 떠나서 여기 와서 정성을 들이고 가시면, 어디가 어떻든지 하나를 원을 세워서 내가 다니면, 그거 하나 해결하고 또 해결하고 배우고 이렇게 하면서 그런다면 아, 길을 가다가 한생각을 해도 그냥 법이 돼 버리는 겁니다.

나는 여직껏 얘기했으니 인제 질문하세요. 아주 알래스카에서 오늘 뿌리를 뺄 테니까. 하하하…. 질문하세요. 우리가 그냥 보통 웃을 일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하나 하루하루 한 시간 한 시간 이렇게 살아나가는 이것이 바로 마음에서 모두 나오는데 우리가 앞으로 정말이지 빛나는 별성이 되느냐, 그렇지 않으면 저 아래 그냥 하천세계에 떨어지느냐에 우리도 있는 겁니다. 없는 게 아닙니다. 또 부모의 은공을 갚느냐 못 갚느냐, 자식들의 그 뿌리를 빛나게 이어 주느냐 못 이어 주느냐 이것도 있고, 여러 가지, 또 내 배 속에 들어 있는 중생을 제도를 해서 전부 보살을 만드느냐 안 만드느냐 이것도 문제가 있고, 그러면 내 몸을 건강하게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다가 죽느냐, 내 집을 잘 보관하느냐 못하느냐 여기에도 있고, 또 우리 식구도 그렇고, 그렇습니다. 모든 일이 닥쳐오는 대로 그걸 커버를 해서 해 나갈 수 있는 여러분의 능력을 기르는 데에 이게 문제가 있는 건데, 여러분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거짓말이나 한다면 모르겠는데 거짓말은 할 수도 없고 내가 거짓말을 하다가, 아니, 내가 바른 말 하기도 이렇게 바빠서 죽겠는데 거짓말을 하러 왜 돈을 버리고 다닙니까?

사실 알래스카에는요, 다른 데서는 차표를 사서 보내기도 하고 그럽니다만 여기는 절대 그러지 않습니다. 왜? 여기는 다 알고 있기 때문이죠. 하기야 다른 데는 모르나요?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되면 나는 나대로 또 합니다. 만약에 중이 어떠한 물질적인 거를 바친다면 그거는 중이 못 됩니다. 그 참 대승보다도, 하여튼 인간도 못 됐다고 볼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있죠. 그러니까 내가 내 칭찬 하는 게 아니라, 중은 그대로 중이에요.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고 그대로 중입니다. 많이 가져서 뭘 합니까? 벗어날 때에는 내 집도 버려야 되는 이런 입장인데 다른 거 가지고 있는 것에 애착을 둔다면 내 집 벗어 버릴 때는 어떡합니까? 만약에 내 집 벗어 버릴 때 내가 시름시름 몹시 앓고 그냥 줄줄이 여러 해를 앓고 그런다면 그건 애착이 그렇게 많아서, 착이 붙어서 그런 거거든. 살 때에 신나게 살고 활발하고 건강하게 살다가 갈 때는 그냥 훌렁 벗어 버리고 가야 돼. 뭐, 두말할 거 없이.

그래서 훌렁 벗어 버리고 자식들도 속 안 썩이고 또 주위에도 미움 사지 않고, 구구하지 않고. 어떻게 이루 그걸 다 말을 하리까? 섭섭한 것도 많을 테고, 하하하. 그러니까 훌렁 그냥 벗어 버리고 다시 그림을 그려서 내가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그러란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공부해서 나온 사람들이 그래도 장관 해먹고 대통령 해먹고 다 해먹습디다. 부모가 또 그렇게 밀어서 정성을 지극히 해서 대통령 하는 수도 많고. 그러니까 이 공부들 열심히 하십시오. 자기가 해 놓은 거는 누가 뺏어 갈 수도 없고 헛된 게 아닙니다. 그저 일을 하시다가도 헛되게 그냥 보내지 마시고 일하면서 생각하시는 거야 마음대로 아니겠습니까? 돈이 드니 걱정입니까? 아, 몸으로 일하면서 돈 벌면서 생각을 좀 하시라 이겁니다. 생각하는 것도 돈 내고 생각합니까? 시간이 걸립니까? 시간을 잡아먹습니까? 일하면서 생각하라는데.

어떤 사람은 예전에 그랬어요. 그걸 아주 한탄을 하더군요. 그냥 아들이 나가서 어떻게나 노름만 하고 그러는지 얼마나 미웠겠소. 벌이는 안 하고 그러니까는 얼마나 미웠으면 “이놈의 새끼, 나가서 급살이나 맞아라.”, “이놈의 새끼, 염병이나 걸려서 죽어라.” 이러곤, 예전에는 아마 그렇게 욕을 지독하게 하는 분이 많이 있었죠. 그러곤 했는데 정말 염병에 걸려서 죽었거든, 그 아들 하나 있는 게. 그것이 남의 탓을 해서 그렇다고. 그 아들 탓을 하는 거지. 자기가 그렇게 지어서 나온 업보인데, 자기 업보 생각을 안 하고 전부 아들 탓을 한 거야. 그래서 하도 울고 있으니까, 어느 절의 스님이 가시면서 그 아들을 극락세계로 가게 축원을 해 주시면서 그 어머니더러 이렇게 말했거든. 보살님이 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그렇게 해서 남의 돈을 다 없애고 남을 못살게 하고 계집까지 팔아먹고 하여튼 있는 거 없는 거 부모 속은 다 썩이고, 당신이 예전에 그렇게 했다 이거야. 그렇기 때문에 그거를 그대로 보라고. 그게, 저 애가 바로 당신이라고. 그런데 누구 탓을 하느냐고. 당신이 업이 많아서 그랬는데 그 아들이 인제 원수를 다 갚았으니까 갔다 이거야. 갔는데 조금이라도 더 살고 그게 업보가 다 지나면 아들이 그렇게 안 할 때가 돼 가는데 당신이 욕을 하도 해서 그게 그렇게 됐다 이거지. 그랬으니 당신이 죽이고서 당신이 왜 우느냐 그러더랍니다.

그러니까 알래스카의 여러분도, 여기 오시는 분들만이라도 참 그렇게 해서 가정이 모두 화목하게 해 나갈 수 있고 실험을 통해서 그걸 아시고 나가신다면 차차차차 알래스카도 생각하는 대로…. 내가 지난번에도 그랬어요. 야! 불이 번지듯 이거 번져지면 다 죽이고도 이게, 불이 딴 데로 번져지면 싸움이 세계로 벌어져. 그러니 여러분이 한마음 내서 그저 불을 끄자! 이라크 문제 말입니다. “불을 끄자!” 그랬습니다. 그러면서도 난 미운 생각이 없었는데 이번에 그 기름을 말입니다, 물에다 넣어서 새든 물고기든 다 죽여서 요렇게 앙당하게 나오는 걸 보니까 아예 “그런 빌어먹을 놈의 새끼!” 하하하. 내가 처음 그렇게 욕을 했습니다. “빌어먹을 놈의 새끼!” 이러면서 “그게 페만이 아니라 패망이다” 그랬다고.

그러니 어떠한, 세계적으로도 나라적으로도 무슨 일이 있거나 이래도 우리가 한마음을 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죠. 그것뿐이 아니죠, 뭐. 그러니까 여러분이 인제는 제가 오면 질문도 하시고 앞으로는 이 공부 열심히 하셔야 될 겁니다. 요 법회 오실 때만 말입니다, 그렇게 하시라 이거예요. 열 일을 제치고. 이건 내 일이니까, 내 가정의 일이고 그러니까. 그저 그냥 헤에 그러지 마시고요. 그저 집에서 절을 하고 그냥 ‘하느님 아버지시여!’ 그러면서 빌지 말고, ‘부처님이시여!’ 빌지 말고, 나부터 알아야 됩니다. 나부터 깨달아야, 바로 자성 부처를 깨달아야 일체 부처를 안다 이 소립니다.

알래스카에도 우리 회장님으로부터 여러분이 정말 똑똑하신데 허, 이거를 누가 한 번이라도 당겨서 이렇게 영 해 보지 않아서, 발바투 들어서지 않으셔서 그러신 거예요, 모두가. 아, 저 애들 얼마나 점잖습니까? 그 왠 줄 아십니까? 전생에서 나올 때 자기가 짊어지고 나온 걸 하나하나 끌어 주니까 그렇습니다. 팔자 운명 뭐, 누가 이 등에다 붙였습니까? 그러니까 내 마음으로 해서 운명이라는 거, 팔자라는 거를 그냥 모든 거를 아주, 그 이름조차, 언어조차 그냥 탁 벗어 버리시라 이거죠. 쪼끔만 저거 하면 “아이구, 내 팔자야. 나는 남한테 그렇게 몹쓸 일은 안 했는데 내가 왜 이래요? 왜 이럭하고 살아야만 하지?” 이러죠. 그런데 과거를 못 보시걸랑 현실을 보십시오. 그럼 됩니다. 자기가 한 것대로 현실에 나오는 거니까요. 앞으로는 지금 해 나가시는 것이 오는 거고.

신도(여)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편해집니다.

큰스님 예, 편안하시죠. 네, 거기 그냥 다 놓고 사세요.

신도(여) 예, 마음이 참 많이 편안해졌어요.

큰스님 두꺼비가요, 어떻게 착이 많은지 두꺼비 모습으로, 그 모습으로 나왔으니 그 모습으로 살아야지 어떡합니까? 사람이 너무 그래서 두꺼비가 됐는데 두꺼비가 돼 가지고 하루는 눈을 꿈벅꿈벅하고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딴 두꺼비들은 뱀한테 가서 물려 잡아먹혀야 자기 두꺼비가 여러 개가 나오는데, 그래도 이 두꺼비는 사람으로 살던 의식이 있어. 그래서 ‘야! 내가 이래서는 안 되지. 내가 이 몸뚱이 그냥 나 한 몸, 나 하나로서 족하지, 내가 내 한 몸뚱이로 족하게 없어져야지, 내가 또 여러 명을 저거 해 놓으면 내 발목이 붙들어매지고 내가 또 여러 개가 되면 큰일이구나.’ 싶더랍니다. 그래서 딴 두꺼비는 큰 구렁이한테 가서 자꾸 성가시게 해서 덥썩 물려서 먹게 만들거든요. 그러면 그 구렁이가 아주 뼈끝마다 그냥 두꺼비가 되죠. 그러니까 자기를 많이 만들려고 그러는 겁니다, 인제. 그런 바보 같은 두꺼비 좀 보세요, 글쎄. 그래도 사람으로 됐다가 두꺼비가 된 놈은 아무리 잘못해서 두꺼비가 됐더라도 그 의식이 좀 남아 있으니까 ‘내가 이래선 안 되지.’ 그러곤 돌 틈으로 들어갔단 말입니다. 돌 틈으로 들어가서 도를 닦는 겁니다. 풀이파리나 이슬을 받아먹으면서 영 살생을 하지 않으면서 그냥 돌 틈에 들어가서 도를 닦아서 사람으로 환생을 했어요.

그래서 사람으로 환생을 했어도 두꺼비로 살던 그 의식이 생기면, 여기서 일어나면 그저 모자라는 그런 마음을 부처님한테 가서 도 닦으면서 그 뜻을 알아서 항상 한생각을 내서, 딴 두꺼비를 보더라도 자기 전생을 아니까, “야, 너도 나같이 그렇게 하지 말고 너도 어서어서 그 뜻을 알아서 모습을 벗어라. 여자의 모습을 가졌으면 여자의 행동을 해야 하고 남자의 모습을 가졌으면 남자의 행동을 하고 독사의 모습을 가졌으면 독사 노릇을 해야 한다. 두꺼비 모습을 가졌으면 두꺼비 노릇을 해야 하니 어쩌겠느냐?” 아무리 부처님께서 이 삼라만상에 비를 내려 주신다 하더라도 착한 사람이 그 빗물을 먹으면 아주 좋은 피가 되고 약이 되지마는 독사가 먹으면 독약이 된다 이거죠. 똑같은 물인데도 그렇게 다르다 이거죠. 강도가 칼을 들면 사람을 해치게 되고 의사가 칼을 들면 사람을 살리게 돼. 그러니 모든 게 이게 사람 사는 것이 부처님 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그걸 깨닫고 마음을 닦아서 우리가 우리 살리는 거지 누가 살려 달라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공부해 놓으시면 그대의 이세들도 여러분의 전통과 핏줄을 모두가 다 그렇게 이어서 나가게끔 돼 있고 끝 간 데 없이 고에서 벗어나실 겁니다.

그럼 오늘은 이것으로써 마치겠습니다.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1년 3월 2일 알래스카 지원 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 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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