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불교 전문 연구가- 한금순 제주대 외래교수

한금순 교수는… 1960년 제주 출생. 1979년 숙명여대 불문과에 진학해 서울로 유학하고, 파리에서 잠시 살았던 것을 제외하면 거의 평생을 제주에서 살아온 제주 토박이다. 본업은 교사. 불어 교사였지만, 지금은 일본어로 전공을 바꿔 현재는 제주 남녕고 일본어 교사로 재직 중이다. 제주 보리도량 주지 오성 스님과의 인연으로 제주불교사연구회에 참여했고, 결국 제주대 사학과서 박사학위까지 받게 됐다. 현재는 제주불교사 전문 연구가로 교사 이외에도 제주대 사학과 외래교수, 제주도 문화재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한국 근대 제주불교사〉, 논문으로는 ‘1918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성격’, ‘최정숙의 3.1운동 재판 관련 문서 분석’ 등이 있다. 사진=박재완 기자

제주도는 아름답다.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사시사철 장관이 펼쳐진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제주 지역 민중들의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고려시대에는 원나라 군대가 점령해 말 목장을 설치했고, 조선시대에는 주요 유배지로도 활용됐다.

근현대에 와서는 이념 갈등으로 인한 상흔이 남아있다. 바로 제주 4.3 항쟁이다. 제주 4.3항쟁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해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민중 봉기 및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 해제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약 7년여 간의 기간동안 비공식적으로 약 3만여 제주주민이 희생됐고, 강경진압에 의해 제주 중산간 마을의 경우 기옥 95%가 전소됐다. 희생자 중에는 일종의 연좌제인 대살(代殺)로 인해 주민들이 이유 없이 학살된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겁화를 불교도 피해가지는 못했다. 스님 16명이 죽거나 도일(渡日)·행방불명됐고, 37곳에 사찰이 피해를 입었다. 완전 전소된 곳도 18곳에 달한다. 대부분의 피해 스님들은 사찰 경내에서 총살을 당했고,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죽은 스님도 있다.

올해로 70주년을 맞는 제주 4.3항쟁에서 불교계의 피해와 희생이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제주와 불교에 대해 끊임없이 천착했던 연구자가 있기에 가능했다. 바로 한금순 제주대 사학과 외래교수이다. 그는 ‘한국전쟁시기 제주도 불교계의 피해현황과 분석’, ‘제주4·3사건과 제주불교’ 등 연구 논문들을 발표해왔다. 지난 3월 14일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주최로 열린 제주4.3 70주년 학술세미나서도 ‘제주4.3항쟁과 제주불교의 수난’을 주제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4.3 당시 제주불교계 피해는
스님 16명 사망, 사찰 37곳 피해
문화재급 불상·탱화 등 거의 소실
관음사 일원 최대 격전지이기도
제주불교계 사실상 無佛시대 맞아

불교, 4.3을 왜 기억해야 하나
불교, 핍박 민초들 외면 못해 희생
중생구제 원력 그대로 보여준 사례
“가만히 있었으면 존속은 됐겠지만
사람 떠난 사찰이 무슨 의미 있나”

제주는 모두 4.3 관련자다
70주년 세미나 직후 만난 한 교수에게는 제주인에게 4.3은 “아주 일반적인 이야기”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제주도는 4월 3일을 즈음하여 마을별로 제사를 지내는 날이 있다. 대부분의 집이 4.3당시 희생된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 〈제주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통계에는 1만4000여 명이 희생됐다고 조사됐지만, 3만 명 이상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 4.3 평화공원 내 전시장에 있는 문구처럼 당시 고립된 섬 제주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 면면히 전해져오는 피해 사례는 끔직하다. 무명천 할머니는 1949년 1월 12일 한경면 관포리에서 토벌대의 총격으로 아래턱을 소실해 정상적인 언어 구사와 음식 섭취를 하지 못했다. “대낮에 마음껏 돌아다녀보고 싶다”는 증언자의 구술도 있었다.

1949년 1월 17일 발생한 북촌리 학살 사건은 4.3의 아픔을 그대로 보여준다. 당시 북촌리 부근 군경 토벌대가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에 흥분한 군인들이 북촌리 주민들을 옴팡밭으로 끌고 가서 총살했다. 이로 인해 300~400명의 주민들이 희생됐다.

“4.3이 70년이 지나면서 1세대들은 거의 돌아가셨고, 후손들은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또한 육지서 건너온 사람들도 많아졌고요. 제주도 내에서 4.3하고 관련되지 않은 집안이 한 군데도 없는 거에 비해서 4.3의 피해가 불교에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 별로 없습니다. 불교계도 피해 스님들이 있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후손이 없다보니 피해 규명 주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대적 상황에서 관심을 갖기도 불가능했고요. 2000년대 와서 연구를 통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죠.”

한금순 교수가 3월 14일 열린 제주 4.3항쟁 70주년 학술세미나서 주제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불상 타서 터지는 소릴 들었다”
그의 말대로 4.3당시 불교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적지 않은 스님이 희생되고 사찰과 불상, 탱화 등이 소실됐다.

“당시 토벌대는 대부분 사찰에 불을 질렀습니다. 스님들은 불을 지르니까 맨손으로 나왔던 거죠. 불상도, 탱화도 하나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전각 채로 불을 지르니 안에 있는 금동불 같은 것은 ‘쾅, 쾅’ 터질 수밖에 없죠. 당시 군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했어요. 불상들이 터지는 소리였던 것이죠. 육지 사람들이 제주에 와서 “왜 제주도에는 불상과 탱화 문화재가 없냐”고 묻는데, 4.3 당시 전부 타서 없어졌습니다. 스님들이 급히 불상을 업고 나와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결국 훼손돼 땅을 파고 묻은 경우도 있었어요. 그나마 건진 것이 손에 꼽을 정도로 있는 것입니다.”

스님들의 희생은 막 태동하고 있던 제주불교계로서는 뼈 아픈 손실이었다. 당시 제주불교를 대표한 승려인 이일선은 선운사에서 출가해 백양사서 공부하고, 1938년 백양사 포교사로 제주도서 활동했다.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도 승려대회’ 준비위원장으로서 친일을 반성하고, 왜색화 된 불교풍토를 정화하려는 노력을 주도했다. 1947년 ‘3.1절 기념 투쟁 제주도위원회’ 선정동원부에서 활동하고,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3인 의장단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정광사에서 예비검속돼 산지포구서 수장됐다.

표훈사 중향강원 강사로 활동했던 이세진 스님은 1948년부터 민중들과 함께 무장대로 활동했다. 무장대 지휘부였던 이덕구 등 15인과 관음사서 기거하며 활동했는데 군·경 토벌대에 잡혀 1949년 7월 산지 앞바다서 수장됐다.

화엄사 제주포교소 포교사로 제주 순회포교 활동을 전개했던 이성봉 스님은 자기 희생의 표본이다. 이성봉 스님은 1949년 10월 자신이 주석하던 금봉사로 피신 온 마을주민들을 숨겨주다가 토벌대의 총에 희생됐다. 당시 토벌대는 스님에게 마을주민의 행방을 물었고, 모른다고 답하자 곧바로 총 8발을 쏘아 스님을 죽였다.

이들 스님 대부분은 해방 이후 친일불교를 청산하고 불교를 개혁하고자 한 ‘조선불교혁신 제주도승려대회’를 주도하거나 참여했던 경력이 있었다. 사실상 제주불교계의 지도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해방이 되기까지 제주불교계는 아주 역동적으로 움직입니다. 4.3 당시 희생됐던 스님들은 제주불교계를 움직였던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희생된 것은 제주불교에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었습니다. 4.3항쟁이 제주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친 만큼 제주불교도 해방 이후 새로운 국가건설과 함께 계획했던 새로운 불교 활동의 염원 자체가 좌절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제주·불교, 정체성이자 화두”… 지역 고승총서 발간 계획

4.3 관련 불교연구 어려운 이유
후손 없다보니 유족 차원 조명 힘들어
피해 말하기 어려운 시대 상황도 한몫
불교계 희생 스님 추모·선양 연구 시급

제주와 불교에 천착하는 이유는
제주 태생… 불자 집안에 나고 자라
‘제주+불교’연구, 은사 스님 영향 多
“제주 주민에게 4.3은 숙명과도 같아”

제주 보리도량 주지 오성 스님이 창립한 제주불교사연구회의 구술조사 모습들. ‘제대로 된 제주불교사 정리’를 원력의 세운 스님과 함께한 연구자들로 인해 제주 4.3항쟁 당시 불교계 피해 사례들은 정리·연구될 수 있었다. 이 같은 연구 결과는 조계종 총무원이 2004년 발간한 〈한국전쟁과 불교문화재Ⅱ-제주도편〉에서 발표되며 세간에 알려졌다. 사진 제공= 한금순 교수

4.3 당시 불교 피해 알려지기까지
이렇게 4.3 당시 불교계 피해가 확인될 수 있던 것은 한 교수와 그가 소속된 연구 단체인 ‘제주불교사연구회’의 역할이 컸다. 보리도량 주지 오성 스님을 중심으로 제주불교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해오던 학술단체인 ‘제주불교사연구회’는 2004년 조계종 총무원의 의뢰로 〈한국전쟁과 불교문화재Ⅱ-제주도편〉 발간에 참여했다.

제주불교사연구회는 1998년부터 2003년까지 5년간 문헌자료를 수집하고 지역주민의 증언을 바탕으로 제주현대사의 비극인 ‘제주 4.3사건’으로 인한 불교계 피해내용을 상세히 정리했다. 보고서로는 △사찰연혁과 피해상황(한무주) △한국전쟁의 서막 제주 4.3사건(김봉현) △한국전쟁시기 제주도 불교계의 피해현황과 분석(한금순)이 수록됐다. 이후 세간에 발표된 한 교수의 4.3 관련 불교 논문들은 이 조사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대학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이후 일본어로 전향해 제주 남녕고에서 일본어 교사를 하고 있는 한 교수가 사학과 박사 학위를 받은 것도 제주불교사연구회와 은사 스님인 오성 스님의 영향이 크다.

“오성 스님께서 제주불교사를 정리하겠다는 원력을 세우시고 연구회를 만드셨죠. 처음에는 한 10명 정도가 모여서 시작했어요. 역사를 전문적으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부터 공부했습니다. 그러면서 일제강점기 발행 신문 중 제주불교 관련 기사만 발췌해 자료를 만드는 작업을 꾸준히 했습니다. 지난한 작업이었죠. 자료수집과 번역을 하다보니 일본어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 불어 과목도 없어지는 추세이기도 했고요. 결국 청주 한국교원대서 일본어 전공을 했습니다. 이후 제주불교 연구를 하며 책과 논문도 내놨는데, 학위가 없으니 인정을 잘 안 하더군요. 스님이 또 저를 꼬셨죠. 이번엔 ‘사학과에서 박사 학위 받으라’고요. 그래서 제주대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흔치 않은 지역불교 연구자
한 교수는 2010년 〈근대 제주불교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논문을 통해 개항기에서 해방시기까지 제주불교의 흐름 속에서 제주불교의 시대적 특징을 고찰하며 근대 제주불교의 역동적 면모를 밀도있게 규명했다.

이후 발표한 논문들도 주목할 만하다. 한 교수는 최근 발간된 〈대각사상〉 제28집 기고논문 ‘유배인들이 제주 불교에 끼친 영향’에서 제주도에 유배왔던 유학자들의 영향과 이로 인한 제주 유림들의 불교 활동에서 근대 제주불교 태동의 뿌리를 찾았다.

제주 유배를 온 추사 김정희가 제주 지역 유림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가 가진 불교적 성향들도 그대로 전해졌으며, 이들 지식인들이 하여금 근대 제주불교가 나타날 수 있는 기반이 됐다는 것이다.

근대제주불교의 특징을 보여줄 인물을 발굴하기도 했다. 바로 제주 출신 항일운동가 ‘김석윤(1877~1949)’ 스님이다. 한 교수는 〈대각사상〉 19집에 기고한 논문에서 제주 출신으로 항일운동가인 김석윤이 유학자이면서 스님이었음 밝혔다.

실제 김석윤은 14세 때 스승이었던 김병규 문하에서 〈금강반야경〉을 수학하다 크게 감복해 17세 때인 1894년 전주 위봉사서 만하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그후 다시 제주로 돌아와 훈장과 교사를 하면서 1908년 비구니 봉려관 스님을 도와 관음사를 창건하고 법정사 창건에도 참여했다. 이후에도 제주교무원 고문으로 위촉되는 등 소위 ‘제주도 큰 스님’으로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세 아들 중 2명도 출가의 길을 걸었으며, 막내 아들인 김덕수는 4.3 당시 토벌대에 붙잡혀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근대 제주와 불교사를 관통하는 인물인 것이다. 

이처럼 제주와 불교 그리고 4.3에 주목하는 것은 한 교수 스스로가 ‘제주인’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제주와 불교는 정체성이자 화두였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서 타지역은 잘 모르고, 불자이기도 해서 연구 주제를 ‘제주불교’로 잡았죠. 4.3은 제주도 사람이면 모두 관심을 갖고 있죠. 기회가 됐으면 접근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동안은 접근하기가 어려웠죠. 군사정부일 때는 국가 폭력이 민중을 탄압한 것이 아니라 좌익 폭도들이 소요 사태를 일으킨 것이니까요. 노무현 정부에 들어서 이 같은 기조가 사라지고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제주 태생이자 불자인 제게 ‘제주·불교·4.3항쟁’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연구 주제인 것이죠.”

제주 보리도량 주지 오성 스님이 창립한 제주불교사연구회의 구술조사 모습들. ‘제대로 된 제주불교사 정리’를 원력의 세운 스님과 함께한 연구자들로 인해 제주 4.3항쟁 당시 불교계 피해 사례들은 정리·연구될 수 있었다. 이 같은 연구 결과는 조계종 총무원이 2004년 발간한 〈한국전쟁과 불교문화재Ⅱ-제주도편〉에서 발표되며 세간에 알려졌다. 사진 제공= 한금순 교수

우리는 왜 기억해야 하는가
제주와 불교, 4.3을 연구하는 한 교수에게 궁금해졌다. “제주 4.3항쟁서 벌어진 불교계 피해를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곧바로 즉답이 돌아왔다. “불교의 사회참여 정신을, 중생구제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어서”라고. 군경 토벌대에 쫓겨 온 사람들을 숨겨주기 위해, 민중과 함께 맞서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내놓은 스님들은 참된 수행자가 그리고 진정한 종교인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희생된 스님들 대부분이 제주도가 격랑 속에 휘말리니까 적극적으로 민중 편에 섭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사회 참여인 셈이죠. 사태가 일어나서 온 제주도가 난리가 났는데 제주도민이 다 죽어 가는데 가만히 있었다면, 누가 그 종교를 존중하겠어요? 물론 나를 위해 사찰을 지키기 위해 민중을 외면할 수 있었겠죠. 그렇다면 자신과 사찰은 존속됐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사람 없는 절이 무슨 소용있을까요. 현재 불교계가 4.3을 되새겨야 하는 것은 희생된 스님들이 보여준 사회참여와 중생구제 모습들입니다.”

이어 4.3 관련 불교계의 추모·선양 사업에 대한 제언도 내놨다. 4.3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관음사를 중심으로 한 순례길 조성을 서둘 것을 비롯해 희생 스님에 대한 면밀한 기초 조사·연구들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관음사를 중심으로 한 순례 유적 코스를 만드는 게 최우선입니다. 제주도민들도 매우 중요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스님들의 어떤 피해를 입었다는데 집중하기보다는 사람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조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각 개별 스님에 대한 연구와 조명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는 불교계 내에서 할 수 있는 연구 프로그램들을 만들어서 꾸준히 조사·연구해야 합니다.”

인터뷰 말미, 한 교수에게 향후 연구계획을 물었다. 제주 근대기 고승들에 대한 열전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스님이자 유생이었던 김석윤, 관음사 주지였다가 4.3당시 고문 후유증으로 숨진 오이화 스님 등 10명의 고승을 선정해 책으로 출간한다는 계획이다. 이 역시 쉬운 작업은 아님에도 원력을 세운 것은 ‘기억’ 때문이다.

“근대시기 제주불교 태동을 위해 산 스님들은 기록하고 연구해야 할 당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기억해주 않는 것은 정말로 그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지금 제 연구는 여러 사람이 당시 스님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되살려 주는 작업이라고 봅니다. 제 나름대로의 추모 방법이기도 하고요. 제 연구가 스님들을 선양하고 일반인들에게 기억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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