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치고 훼손까지… 도난 성보 수난사

도난 신고된 예천 보문사 영산회상도(사진 왼쪽·문화재청 제공)와 한 대학 박물관이 2016년 특별전을 통해 공개한 불화(사진 오른쪽)의 모습. 도상이 매우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보물 제1958호로 지정된 경북 예천 보문사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는 1989년 6월 5일에 사찰에서 도난당해 25년 만인 2014년 5월 서울에 위치한 사립박물관에서 문화재청 사범단속반과 서울경찰청 지능범죄대수사대에서 압수한 유물이다. 삼장보살도는 압수된 이후 법적인 절차를 끝내고, 작년 4월에 조성사찰로 돌아가 극락전에 안치되면서 다시 신앙의 대상으로 모셔졌다.

보문사 삼장보살도는 조선 후기에 그려진 전형적인 삼장보살도와 화면 구성이나 존상 배치가 특이한 불화이다. 우선 화면 중앙에 지장보살을 그리고, 좌우로 천장보살과 지지보살을 두었는데, 하단에 높은 성곽으로 화면을 나누었다. 화면 밑 부분에는 병풍이 펼쳐진 앞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시왕상이 재판하는 장면, 지옥에서 죄인들이 벌을 받는 장면 등이 다른 삼장도와 확인이 구분된다. 도난 이후 일부 덧칠한 흔적이 있지만, 작품성과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 보물로 지정된 것이다.

국가지정문화재 심의 당시 문화재위원회에서는 “(이 불화는) 창의적이고 탁월한 구성력과 함께 인물상과 각종 경물의 뛰어난 묘사력과 필력을 보여주고 있다. 제작 시기와 소장처를 알 수 있는 등 예술성과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도난 이후 삼장보살도 화기(畵記)는 중요한 부분이 인위적으로 훼손되었지만, 앞부분에 ‘정해(丁亥)’라는 글자가 남아있어 18세기 중엽에 해당되는 정해년(丁亥年)인 1767년(영조 43)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삼장보살도가 조성된 예천 보문사는 학가산 내에 위치한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사찰은 676년에 의상(義湘)이 창건하고, 1185년에 지눌(知訥)이 중창하였다. 보문사는 고려시대 왕실의 사고(史庫)로 활용되었지만, 고려 말 왜구들의 잦은 침략으로 1381년 7월에 사고를 충주 개천사(開天寺)로 옮겼다. 보문사는 1407년에 왕실에서 불교 종단을 교정(敎宗)과 선종(禪宗)으로 분리할 때 교종에 속했고, 1569년에 사찰 중수가 이루어졌지만, 임진왜란 중에 소실되어 전쟁이 끝나고 중창이 이루어졌다. 현재까지 확인 가능한 가장 빠른 문헌기록은 1791년에 작성된 〈예천보문사선당중수기(醴泉普門寺禪堂重修記)〉로, 18세기 말에 선당(禪堂) 중수 관련 기록이지만, 극락전에 봉안된 석조아미타삼존불좌상이 1680년경 승호 스님이나 그 계보 조각승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어 17세기 후반에 사찰이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근대에 보문사가 소장한 불화는 20세기 전반에 작성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예천 보문사 재산대장에 ‘후불도(後佛圖) 비단(絹地) 2점, 현왕탱(現王幀) 비단(絹地) 1점, 산신탱(山神幀) 비단(絹地) 1점, 독성탱(獨聖幀) 비단(絹地) 1점, 지장탱(地藏幀) 1점, 신중탱(神衆幀) 비단(絹地) 1점’이라 적혀 있고, 다른 자료인 1932년 12월 13일 조선총독부 관보에 실린 소장품 목록에 ‘후불탱 2점(비단), 지장탱 1점(비단, 세로 6척3촌×가로 5척8촌), 현왕탱 1점(비단, 세로 3척8촌×가로 3척), 독성탱 1점(비단, 세로 2척5촌×가로 1척1촌), 산왕탱 1점(비단, 세로 2척9촌×가로 2척4촌), 신중탱 1점(비단, 세로 4척1촌×가로 5척)’이라 적혀있다.

두 자료를 비교해 보면, 근대 보문사에 소장되어 있던 불화는 후불도(2점), 현왕도, 산신도, 독성도(산왕탱), 지장도, 신중도로 총 6건 7점이다. 올해에 보물로 지정된 삼장보살도는 일제강점기에 사찰에서 지장도로 인식되었고, 규격은 가로 5척8촌, 세로 6척3촌으로, 현재 화면 크기가 가로 165.3㎝, 세로 167.5㎝와 약간 차이가 있지만 동일 작품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당시 후불도가 2점인 것을 보면 최소한 전각이 2동이 있었던 것이고, 그 가운데 1점인 아미타회상도는 삼장보살도와 같이 1989년에 도난되었다가 이번에 회수되었다. 아미타회상도는 중앙에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협시불과 권속들이 에워싸인 화면 구성과 색채 사용 등이 삼장보살도와 유사하다. 본존의 신광은 섬세하고 화려한 보상화문이 아름답게 표현되고, 팔대보살과 사천왕, 그리고 많은 나한상들이 꽉 찬 구성, 섬세한 표현과 채색 등이 18세기 중반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예천 보문사 삼장보살도. 최근 보물로 지정됐다. 도난 직후 화기를 훼손해 도난 사실을 숨기려 했다. 사진 제공=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불화 화기(畵記)가 심하게 손상되고 밑 부분이 잘려나가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남아있는 화기는 “……亥………」訂明 翫」?珏」誦呪 自」克林」玄」性…金魚比丘…」供主」龍」彩」自…化主 最」彩…別座」三綱”과 “施主秩」婆幀大施」金萬輝」彩色大」金爾錫」金錫」沙彌泰」供養施主」林得孫」林先昌」金太云」李俊興」金正三」金應義」尹奉巳」本寺」老德 克」弘」太」處」快」前御」錦…”으로, 앞부분에 ‘해(亥)’자를 읽을 수 있어 삼장보살도와 같이 ‘정해년(丁亥年)’인 1767년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도난 이후 불화는 배접을 새롭게 하면서 헤어진 바탕천 부분을 배접지에 붙인 사실이 드러났으며 부분적으로 가채되었다.

이외 보문사에서 도난 신고된 불화는 영산회상도 1점과 신중도 1점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재산대장에 후불도로 적힌 나머지 1점이 영산회상도라 생각된다. 이 불화는 도난 이전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상단 중앙에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불과 하단에 관음보살이 그려져 있고, 윗부분에 구름을 타고 서 있는 여래상과 중단에 본존 좌우에 아난과 가섭존자, 보살상, 그 옆으로 사천왕이 배치되었다. 하단에는 관음보살 좌우로 지장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그려져 있다. 관음보살은 둥근 원 안에 보타락가산에 결가부좌한 자세로, 좌우에 선재동자와 용왕이 있고, 바위 끝에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과 청조(靑鳥)가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관음보살도의 구도와 자세 등은 19세기 유행한 독립적인 관음보살도의 시원적인 형태이다. 따라서 이 영산회상도는 조선후기 조성된 불화 중에 특이한 존상의 배치와 구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불화가 서울에 위치한 모 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2016년 특별전을 통해 공개되었다.

그리고 아직 소장처가 밝혀지지 않은 신중도는 화면이 좌우로 나뉘어져 있고, 향좌에 화려한 갑옷과 투구를 걸친 위태천이 합장을 하고, 향우에 3곡의 병풍을 배경으로 한 제석천은 붉은 등받이가 있는 의자 위에 앉아 있다. 제석천 좌우에 동자와 천녀가 둥근 부채와 불번(佛幡)을 들고 있다. 이와 같은 화면 구성과 존상 배치도 조선 후기 신중도에서 볼 수 없는 매우 희귀한 작품이다. 도난 신고 시 신중도는 1767년(건륭 13) 5월에 그려졌다는 것을 보면 당시 화기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규격은 153㎝×128㎝라고 적혀 있다. 조선총독부 관보의 귀중품대장에는 가로 5척, 세로 4척1촌으로 크기가 거의 유사하다.

따라서 예천 보문사에서 1989년에 도난된 불화의 네 점은 모두 같은 시기에 그려진 불화로, 작품성이 뛰어난 것을 보면 18세기 후반에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최고의 실력을 가진 불화승이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28년 전에 도난당한 네 점의 불화 가운데 두 점이 예천 보문사로 돌아왔고, 나머지 1점은 소재가 파악되었으며, 마지막 1점의 위치만 파악된다면 조선 후기 18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불화의 조성에 관한 접근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제 스님들과 신자들이 108산사를 찾아 만행을 하듯 사찰을 떠난 부처님을 찾아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돌아다니면 전시물이 아닌 성보물의 가치를 부여해 주었으면 한다.

예천 보문사 아미타회상도. 삼장보살도와 함께 환수됐다. 섬세한 표현과 채색 등이 매우 눈길을 끈다. 사진 제공=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