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란 곧 성품이며, 깨달음이며, 부처이다. 마음이란 형상과 방향과 장소가 없으므로 마침내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청정한 그대로 법계(法界)에 두루하여 가는 것도 오는것도 아니며, 본래 완성된 청정한 법신부처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이라고 알고 쓰고 있는 식심(識心)은 밖으로는 육진경계에 끌려가서 타향살이를 하고, 안으로는 끌어 당겨서 객진번뇌와 동거하며 생로병사의 중생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누구냐? 물음의 답은 마음이니, 말은 마음을 따라서 일어 나므로 마음은 이 말의 머리고, 생각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므로 마음은 생각의 머리다. 만법(萬法)이 다 마음으로부터 생기므로 마음은 만법의 머리이고, 실로 화두(話頭) ‘이 뭣고는 이 염두(念頭)이며, 생각 전에는 이 마음이다. 한마디로 한 생각도 생기기 이전에 화두(話頭)는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이는 모든 부처님과 중생이 다 꼭 같이 갖춰져 있으니, 만약 망상(妄想)과 집착(執着)만 여의면 그대로 부처이다.

말은 마음을 따라서 일어 나므로 마음은 이 말의 머리고,
생각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므로 마음은 생각의 머리이다


약인정좌일수유(若人靜坐一須臾) 승조항사칠보탑(勝造恒沙七寶塔) 보탑필경화위진(寶塔畢竟化爲塵) 일념정심성정각(一念淨心成正覺)’이라는 말이 있다. 불교 수행의 근본목적은 내면의 마음을 밝히는 데 있기 때문에 밖으로 아무리 많은 탑을 쌓고 절을 짓는다 해도, 그것은 유형의 존재들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필경 먼지 티끌로 돌아가지만, 참선(이뭣고)을 통해 본래 청정한 내 마음 자리와 하나가 되면 그것이 성불인 것이다.

그러나 중생은 어리석은 그 고통으로써 진리를 뒤로 한 채 한 생각 무명 때문에 애착고가 되어 본래 없는 죄업이 항상 있어서 윤회를 하고 있고, 중생은 음과 양으로 나뉘어져 흑백(黑白), 선악(善惡), 귀천(貴賤)이 있는데,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신령스럽고 뚜렷한 소소영영의 주인공인 시심마의 시()는 오직 홀로 짝이 없어 청청한 본래 그대로 이다.

천지불능장구재(天地不能長久在) 항차소생천지간(況且所生天地間) 당당불수음양자(堂堂不受陰陽者) 역겁다생자재신(歷劫多生自在身)’라는 말도 음미해보자. 법신은 음양으로 나뉘지 않고 또한 인연을 따르지도 아니한다. 그러나 색신은 음양으로 된 것으로 생노병사의 고()가 있고 무상한 것이고 천명을 따라야 하지만 참성품은 우주법계에 두루해 오고 감에 걸림이 없는 자유자재한 그대로 인 것이다.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했다. 부처님이나 범부나 축생이나 미물에 이르기까지 차등 없이 이 천연물(天然物)을 사람마다 다 갖고 있지만 다만 인연에 따라 오고 가되, 오고 간 바가 없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찾는 최고 방법이 간화선 이 뭣고이다. 이 법()을 알아서 항상 그놈을 찾으면 언제나 함께 하는 이 뭣고이지만, 천자(天子)가 되고 왕이 되고 장군이 되어도 잠시 그 역할만 하다가 깜깜한 생사고해 속으로 흘러 들어갈 뿐이다.

<법화경> 사구게를 보면 제법종본래상자적멸상(諸法從本來常自寂滅相) 불자행도이래세득작불(佛子行道已來世得作佛)이란 말이 있다.

모든 법은 본래부터 그대로 적멸의 모습이니 불자들이 이 이치를 깨달으면 그 순간 부처님이라고 했다. 우리가 보는 세계가 눈으로 봐서 그렇지, 마음의 눈으로 보면 그대로가 부처이며, 모두가 진리라는 말씀이고, 본래 깨쳐있는 부처임을 믿으면 중생이 부처라는 말씀이다. 다만 한 생각 무명(無明) 때문에 오온(五蘊)으로 잠시 이루어진 가아(假我)가 아상(我相)이 되어 꿈꾸지만, 그 망상 집착으로 이루어진 꿈을 깨면 그대로 부처인데, 그 꿈을 깨는 것이 수행이며, 그 참 수행이 바로 이 뭣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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