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류에서는 사찰 기록 중 조선후기 사찰이 겪어야 했던 국가로부터의 요구, 혹은 지역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침탈과 관련한 내용이 많다. 따라서 고문서를 이용하면 국가적인 억불숭유정책 때문에 이루어졌던 조선시대 사찰에 대한 억압의 구체적 내용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내용들은 대체적으로 초서로 작성됐기 때문에 당대 사찰들이 겪어야 했던 구체적 내용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실정이다. 양진석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은 3월 14일 동국대학교 다향관 세미나실서 ‘초서란 무엇인가: 초서로된 불교문서의 이해’를 주제로 강의했다. 양 연구원은 “초서를 올바른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고문서류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리=박진형 기자

주제 : 초서란 무엇인가: 초서로된 불교문서의 이해

양진석은… 고문서학회 학회장,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관을 역임중이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초서고급과정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공저로는 〈조선시대 생활사〉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최승희 서울대 명예교수 소장 조선시대고문서〉가 있다.

사찰 피해·억압 등 살피려면
초서 잘 알아야 고문서 이해해
〈초결가〉통해 구성원리 익히고
초서 이면의 의미 파악해야…


초서의 구성
초서의 형성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는 상식과는 다른 점이 있다. 우리는 해서를 알고 난 후에 초서에 대하여 공부하고 자획을 읽는 것이 차례라고 알고 있다. 그렇다고 초서부터 배워서 해서를 알려고 한다면 그것은 미련한 행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당장에 해서로 된 글자, 그리고 한문에 대한 해독만 하더라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서를 알기 위해서는 초서의 구조를 알아야 할 것이다. 초서의 구조는 한자의 구조와 연관해 살필 수 있다. 우리가 초서를 배울때는 주로 초서의 구조와 형성의 틀을 잘 보여주고 책으로 엮어진 것으로 〈초결가(草訣歌)〉를 이용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전형적인 것으로 많이 이용되는 것은 왕희지체로 쓰여 있는 것으로 ‘왕우군초결백운가(王右軍草訣百韻歌)’가  있다. 이 초결가는 동진(東晋) 때의 왕우군 즉 왕희지(王羲之)의 필체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이를 편찬한 이는 송대의 미불이다.

초결가는 5언(言) 2구(句)를 1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를 통해 초서의 구성 원리들이 설명되고 있다. 현재 전하고 있는 초결가는 백운(百韻)에 미치지 못하는 83개의 대구(對句)로 이루어진 것과 106개의 대구로 이루어진 것이 있다. 이외에도 초결가의 내용을 변형시켜 제작된 것들도 있다.

초서를 익히기 위해서는 초서의 형태에 대한 원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초서의 구성 원리를 살피기 위해서 초서와 해서의 선후 관계를 따지면서 접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은 현실적인 필요성을 내세우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한자의 형태 즉 해서를 이용하여 초서의 모습에 역으로 접근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방법들이 있겠지만 〈초결가〉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유효하다.

〈초결가〉에 담겨진 글자의 구성 원리와 내용을 크게 유별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수를 중심으로 생각하면서, 그와 결합하여 글자를 이루는 모양들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이 우선 기본적인 형태라고 하겠다. 변형된 경우도 많지만 우선 기본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다만 〈초결가〉를 검토하기 전에 ‘초서’의 기본 획들은 점(點)과 선(線)들 간의 결합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다. 이 때문에 초서는 점과 선을 어떤 방법으로 표현하는 가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태로 표현된다. 따라서 초서는 유동적인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모습만을 고집할 수도 없다.

그리고 초서의 획이 해서에서 표현되는 획들이 그대로 반영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외형만이 아닌 해당 글자가 표현하려는 필세만으로 대신 표현되기도 한다. 그리고 쓰는 차례 즉 필순(筆順)에 따라 그 모양이 크게 변하기도 한다.

실제적인 초서를 대하면서 익히는 방법이 가장 중요하다. 원리를 유념하면서, 초서를 거론할 때 중심이 되는 인물의 글씨체 즉 왕희지(王羲之), 지영(智永), 손과정(孫過庭) 등이 남긴 초서 및 초서와 관련된 글씨를 많이 남긴 인물들을 중심으로 배워나갈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자형의 질서나 초서의 구성원리 및 운용 등을 적용하면서 자형에 대한 변별력을 키워나가도록 해야 한다.

다만 초서의 원리를 적용하는 글자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특정 글자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예외적인 글자들에 대해 해독할 수 있도록 대비해야 한다. 글자마다 적용하는 원리가 하나로 정해진 것이 아니어서, 원리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다.

초서를 숙련하는 것은 기술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고, 몸으로 익히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즉 성실성과 끈기가 요구된다. 이것 없이는 끝을 보지는 못할 뿐 아니라, 익혀 나가는 과정에서 즐거움도 느낄 수 없다. 아울러 많은 문장들을 접하고 익히면서 문장이 지닌 특성에 적응해야 초서를 쉽게 해독할 수 있다.


불교관련 한문기록과 초서
우선 옥천사의 자료들은 주로 초서로 기록된 것을 중심으로 검토한 적이 있다. 옥천사에 부과되는 토지세와 환곡과 관련한 부세를 면할 수 있게 해주는 완문을 비롯한 국가의 부세관련 문서, 그리고 어람지(御覽紙) 봉진과 관련하여 결역의 금지를 요청하는 문서들이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둔사(大芚寺)의 문서로는 서산대사의 행적을 들어 국가에 대한 공을 언급하면서 표충(表忠)의 행적을 드러내어 허사사액(許祠賜額)하되, 그를 기리는 사찰로 대둔사(大芚寺)를 해남(海南)의 표충사(表忠祠)로 지정하여 국가로부터 부여되는 역을 면제받는 내용의 완문도 있다. 전라 지역의 승려들이 예조에 소장(上言)을 내어 이루어진 것으로 영남에서 표충사를 지정한 예에 의하여 시행해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그 결과 계방의 혁파, 관속배들이 동백기름을 외상으로 요구하는 행위, 토반(土班)들의 다양한 형태의 침책을 금지하고, 관속배들이 읍사를 빙자하여 채무를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 문서 외에도 도유사안(都有司案), 전곡유사안(典穀有司案), 주관유사안(主管有司案), 원중위토록(院中位土錄) 등과 같이 운영과 관련된 기록들이 있다.

파계사(把溪寺)는 영조(英祖)의 어필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며, 왕자군(王子君)의 원당으로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문서들을 살필 수 있다.

〈대구용천사결역절목〉은 조선후기 사찰이 지역에 대한 역 부담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경상감영과 대구부에 바쳐야 하는 종이, 송목(松木), 그 외에도 산에서 생산되는 열매, 전죽(箭竹)으로 만든 물건들을 바치거나, 각수, 화원 목수 등의 명목으로 사역하는 것, 밥을 짓는 승을 대령하게 한다든지, 그 외에도 문무과 진사들이 유가(遊街)하면서 며칠 동안 머무른다거나, 다른 사찰의 승도가 걸공(乞功)을 이유로 무리를 지어 모이거나, 유향(儒鄕)들이 소청9疏廳)으로 사용한다고 빙자하여 사찰에 머물렀을 때 그들을 접대해야 하는 부담 등, 계방(契房)관련 부담, 기타 이향(吏鄕)들의 침색 등이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사찰에 대한 침탈 등은 다양하게 이뤄졌다.

이와 같이 조선후기 사찰이 겪어야 했던 국가로부터의 요구, 혹은 지역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침탈과 관련한 내용들이 실려 있다. 즉 문서를 이용하여 국가적인 억불숭유정책 때문에 이루어지고 있던 조선시대 사찰에 대한 억압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필 수 있다. 이런 내용들이 대체적으로 초서로 작성되어 있기 때문에, 당대의 사찰들이 겪어야 했던 구체적인 내용들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불교 사찰의 소장 문서들 중에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문서들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사찰이 소지하고 있던 토지, 기부를 받은 토지에 대한 내역, 승려와 관련한 토지의 매매현황을 살필 수 있는 문기들이 있다.

성책류(成冊類)로는 사찰에서 사용하던 각종 물품들의 현황을 기록한 책자를 들 수 있다. 주된 내용은 곡식, 땔감, 종이, 그릇, 솥 등을 비롯한 다양한 물품들에 대한 것들이다. 이는 사찰의 운영을 살필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불교에서 일컬어지는 사기(私記)는 불교 경론에 대하여 학승이 개인적인 의견을 담아 주석한 것이다. 이는 개인적인 의견을 정리한 것이면서, 국내에서 순수하게 자체적으로 경론을 연구하여 만들어진 주석서라는 점에서 가치가 매우 크다. 사기는 ‘화족(畵足)’, ‘췌(贅)’, ‘발병(鉢柄)’, ‘하목(鰕目)’ 등의 명칭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성격은 소초(疏抄)에 비견될 수 있으나, 그에 비해 겸손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기는 한국불교의 경론에 대한 이해를 논할 수 있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사람들에 의하여 동일한 기록을 옮겨 썼지만, 그 과정에서 잘못 쓰인 것들이 많다는 것을 파악되었다. 그러나 본인의 작업한 경험을 언급하자면, 옮겨 기록하면서 착오가 매우 많게 된 것은 글자에 대한 이해와 함께 문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많았다는 점이다. 하나의 글자를 잘못 파악하여 두 개의 글자로 기록한 경우도 눈에 띠었다. 이는 글자가 상하로 조합된 글자를 상하 각각 다른 글자로 기록하는 형태를 말한다. 그 외에도 유사한 글자를 다른 글자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사기에 기록된 내용에 대한 파악이 부족한 상태에서 필사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기의 원형을 우선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바탕에서 다양한 이본들에 대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잘못된 기록을 파악할 수 있으며, 때로는 기록과정에서 기록자의 필요에 의하여 선택적으로 옮겨 쓴 것도 있을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록들 간의 차이를 살펴보고 그 기록의 위치를 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설령 잘못 기록된 것이라 하더라도 결코 폄하해서는 안 된다. 기록과정에서의 실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잘잘못만을 따져서는 안 된다.

설사 잘못 파악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잘잘못만을 따질 것이 아니라, 그 사기를 이용한 흐름은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그것을 통하여 사기를 이해했던 각각의 흐름을 살펴보고, 그것이 낳은 또 다른 결과에 대하여 논하는 것이 순서라고 본다.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무시되어서는 안 되며, 그것이 지니는 또 다른 방향에서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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