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희(63) 나무명상 대표(울산불교교육대학 총동문회 고문)

김민희 대표는… 1955년 경주시 보문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분황사에 다니며 불교와 가가워졌으며, 경주불교학생회 활동을 이어갔다. 위덕대 불교학과 석사,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박사를 수료했으며, 현재 울산에서 나무명상 카페를 운영하고 전법에 매진 중이다. 울산불교교육대학 총동문회 4~6대 회장을 역임하고 울산불교교육대학과 동국대 서울캠퍼스 강사를 역임했다. 제2차 여성불자 108인에 선정되었으며, 위덕대학교 대학원 학생회장 공로상과 동국대 강사로 활동 할 당시 석탑강의상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시작된 불연
3 때부터 분황사 인연
등교 전 법당 들러 청소
경주불교학생회 활동
10대 당시 서원 새기며 전법

부처님 삶에는 나무가 많이 등장한다. 마야부인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무우수 아래서 낳았고,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서 대각을 이뤘다. 그리고 많은 법회를 나무가 이룬 숲에서 열었으며, 사라쌍수를 사방에 두고 열반에 들었다. 나무는 숲을 만들어주고 숲은 많은 것들을 품어준다. 하물며 불법(佛法)으로 숲을 이룬다면 그 숲이야말로 더 할 나위없는 숲일 것이다. 울산 태화강 옆에서 나무명상 카페를 운영하는 김민희 대표는 울산이 불법의 숲이 되길 기원하며 평생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312, 김 대표를 만나기 위해 달려간 나무명상 카페에는 ‘Who am I?(나는 누구인가?)’라고 적힌 간판이 걸려 있었다. 마치 울산 시민을 향해 던지는 화두 같았다. 그 화두 아래서 김민희 대표를 만났다.

나무명상 카페에서 ‘죽음명상’을 진행하는 김민희 대표(왼쪽)와 참가자들.

 

전법의 회향, 나무명상 카페

1층 카페에 들어서자 오른쪽에는 부엌이 정갈하게 자리 잡고 홀에는 의자와 테이블, 벽에는 불두(佛頭), 인도여행 사진 그리고 부처님 말씀이 적혀있다. 카페 안쪽에는 나무로 짜인 관이 검은색 천으로 덮여 있고, 관 앞에는 초와 방석이 놓여 있다. 기자가 카페에 관이 있는 것을 보고 당황하자 김 대표는 죽음이 주는 가르침을 통해 좀 더 효과적으로 부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고 했다.

곧이어 불자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김 대표의 설명에 맞춰 7명의 참가자들은 죽음 명상을 시작했다. 그들은 죽음명상에 앞서 김 대표가 준비한 종이에 자신의 얼굴을 만들고, 김 대표는 참가자들이 그린 그림을 토대로 각자의 심리 상태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각자 유언장을 작성하는 순서가 됐다. 갑자기 분위기가 엄숙해졌다. 참가자들은 사랑하는 가족과 살아온 날들, 이루지 못한 것들, 재산 문제 등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잠시 후 참가자들은 하나 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유언장을 관 앞에서 읽으며 참가자들은 가족에 대한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참가자들은 관에 들어가기 전,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수고했다며 절을 올렸다. 그리고 참가자가 관에 들어가자 김 대표는 관 뚜껑을 닫고 망치로 힘차게 내리쳤다. 엄숙한 순간인데 김 대표는 진행하는 동안 작은 유머로 분위기를 밝히며 오히려 웃었다. 죽음은 슬픈 것도 괴로운 것도 엄숙할 필요도 없다는 가르침을 자연스럽게 참가자들에게 전달했다.

김 대표는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다. 체육 할 때는 체육복, 잠을 잘 때는 잠옷을 입어야 하는 것처럼 죽음 역시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다죽음을 연습하면 삶에 대한 집착을 잊고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했다. 죽기 직전 까지 많은 사람들은 고민에 휩싸여 울고 집착하고 괴로워하지만, 막상 관에 들어가 누우면 편안해서 눈물이 나지 않는다고 김 대표가 설명하자, 참가자들은 정말 그렇다. 막상 누우니 너무 편안해 참된 비움이 무엇인지 맛을 본 것 같다고 소감을 말했다.

김 대표는 카페를 1층 커피숍과 2층 명상 센터로 나눠 운영 중이다. 호흡명상을 배우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간 참가자들은 자신들을 울산불교교육대학 총동문회 임원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김 대표를 총동문회 고문이고, 역대 회장을 역임한 주역 중에 주역이라며 울산불교의 산 증인이자 결실을 일궈낸 장본인이라고 말했다. 김 대표가 운영하는 나무명상 카페는 단순히 명상에 대한 강의를 하기 위한 카페가 아니다. 전법이라는 김 대표 평생 원력의 회향과도 같은 것이다.

2008년 소년소녀 가장 돕기 장학금 전달식.

울산 재가불교운동 평생 헌신
전법회향 위해 명상카페 운영
총동문회 4~6대 회장 역임
일일 찻집 무루음악회개최
성금 전액 장학금으로 전달
군장병 급식 등 군포교 참여
현재 총동문회 고문으로 활동
2차 여성불자 108인 선정

재가불교 원동력, 울산불교교육원 개원

울산은 1960년대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을 시작으로 산업화의 길로 들어섰다. 갑자기 빨라진 개발의 속도로 인해 울산은 급격한 환경의 변화를 겪는다. 가난한 어촌에서 산업도시로 변모해 나갔다. 울산의 모든 삶의 지표는 확장되고 성장했다. 하지만 물질적으로 부유해지고 화려해진 삶의 모습 뒤엔 그로인해 발생한 부작용도 함께 늘어갔다. 바빠진 삶, 가속화되는 삶의 속도는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왔고, 그 가치관의 변화 중 가장 큰 변화는 인간보다 물질이 앞서 있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인성이 상실되어 가고 있었다. 자신을 돌아볼 틈 없이 세상의 속도에만 몰두해야 했다. 자신은 물론 주위를 살필 겨를도 없이 오직 물질만을 쫓는 삶을 살 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오탁악세에도 어딘가에는 연꽃이 피는 법. 늘 시절을 걱정하는 이는 있어왔다. 울산불교사암연합회 스님들은 불제자로서 여법하지 못한 시절과 그 시절에 놓인 대중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절에 필요한 불법을 펴기로 원력을 세웠다. 1993년 울산불교교육원을 개원했다. 울산불교교육대학의 전신인 울산불교교육원은 매년 200여 명의 재가 불자들을 교육하는, 재가불자교육의 요람으로 발전했고 울산불교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다.

울산불교교육대학은 매회 졸업생을 배출했고 올해 37기 입학생을 맞아 2600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는 울산불교의 대들보가 됐다. 울산불교교육대학을 졸업한 불자들은 총동문회에 가입했다. 지속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의 전달과 실천 속에 성장하기 위한 네트워크였다. 회원들은 대부분 주부불자들로, ‘어머니 불교로 불리며 따뜻한 자비 나눔을 이어갔다. 울산불교교육대학 총동문회는 매년 소년소녀 가장 돕기 일일찻집 무루(無漏)음악회를 개최했으며, 지난 해 19회를 맞았다. 음악회를 통해 모은 성금은 고스란히 장학금으로 전달했고 그 금액만 135백만 원에 달한다. 장학금 모금 뿐 아니라 음악회는 울산 불교를 대표하는 자비나눔 행사로 자리 잡아 울산불교의 위상을 높였고, 울산 시장을 비롯해 사암연합회 대표 스님들이 함께해 격려하고, 불교문화를 전하는 야단법석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불자들이 하나로 화합하는 재가불자들의 구심점이 되어 주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군법당 포교에 뛰어들어 어머니의 정성이 깃든 손맛으로 따뜻한 음식을 군장병들에게 지어주고 있으며, 연등축제에서 매년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울산 지역 수해 복구를 위한 자비성금도 전달해 지역민과 함께 하는 불교로 활동했으며, 이웃 종교 축제인 크리스마스에 선물도 나눠주며 화합하는 불교, 열린 불교에 앞장섰다. 2600여 명의 회원들은 각 사찰에서 봉사하고 배운 바를 실천하는 각오로 기도와 수행 정진에 진력하고 있다.

총동문회 임원들은 울산재가불교의 힘이자 숨은 공로자로 김민희 고문을 꼽았다. 박영란 울산불교교육대학 총동문회 회장은 김민희 고문님이 계셨기에 지금 현재 동문회 활동도 가능하고 교육대학도 이어 올 수 있었다“20년 넘도록 저희 활동의 기둥이 되어 주셨을 뿐 아니라 불교 수행의 선배로 이유를 묻지 않고 따를 수 있는 신뢰를 주고 있다고 했다.

김 대표가 처음 울산불교교육대학을 찾은 것은 19946기로 등록하면서 부터이다. 경주에서 태어나 자랐던 김 대표는 결혼 후 남편을 따라 울산에 오게 됐다. 김 대표가 느낀 울산의 첫인상은 낯설고 차가웠다. 울산에서 신행생활을 하다가 김 대표는 울산불교교육대학이 만들어진 것을 알았고 권유도 받았지만 처음엔 망설였다. 왜 망설였는가하고 묻자 그냥 고집이었다고 짧게 답한 후 그런데 돌아보니 너무나 가고 싶어 하는 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고 망설일 이유도 없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김 대표는 울산불교교육대학에 등록하자마자 학생회장을 권유 받았다. “부처님 일에 망설일 것이 무엇인가라며 그 자리에서 수락한 김 대표는 졸업 후 총동문회 4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5~6대 회장을 연임하며 총동문회를 이끌었다.

김 대표가 이끌던 총동문회 활동은 눈에 띄게 성장했다. 소년소녀가장 돕기를 위한 성금은 세배 가까이 늘었고, 총동문회는 이때부터 단복을 맞춰 입고 활동했다. 불교에 대한 인상을 좀 더 아름답게 그리고 단정하게 전하고 싶었던 김 대표의 제안으로 시작 된 일이다.

불교 이미지가 너무 초라하게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시작했어요. 화려하게 장엄된 부처님의 모습까지는 아니어도 정법을 드러내는 밝고 단정한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회원들이 잘 따라줬습니다

총동문회 회원들의 모습은 자랑스러움 그 자체였다고 했다. 아름다운 불자들의 모습에 행사 자체가 빛이 났고 회원들도 자긍심이 생겼다.

김 대표는 밖으로는 불교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하고 동문회 안으로는 운영 방법을 바꿔 내실을 다졌다. 먼저 각 기수별 이사회를 구성해 많은 회원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울산불교교육대학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많았어요. 사람 수가 줄어서 월세는 계속 밀렸고 갈 곳을 고민하며 발품을 팔았죠. 집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번쩍 떠올랐어요. 전세로 옮기면 일단 숨통은 트겠다 싶어 사암연합회 스님을 바로 찾아가 의논했습니다. 현재 불교대학 모습이 처음 자리를 옮겼을 때 꾸몄던 모습 그대로입니다

김 대표는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이겨 내기 위해 직접 발품을 팔아 바닥재며 벽지, 칠판 등 강의를 위해 필요한 것을 마련했다. 모자라는 관리비를 위해선 등을 받았다.

회장직을 내려놓은 김 대표는 이후 불교공부를 전문적으로 해 좀 더 체계적으로 부처님 말씀을 전달하고 싶다는 의지가 생겼고 50세 되던 2005년 위덕대 불교학과 석사 과정과 이후 2010년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김 대표는 언제 어디서나 오직 전법만을 고민했다. 박사 과정 수료 후 동국대에서 선학과 학생들을 지도했는데, 새로운 교수방법으로 불교에 대한 호감도를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말로만 설명하는 것 외에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는데, 엄마 같은 느낌이라 학생들이 편안하게 느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눈높이를 맞춘 강의법이 적중 했던 것 같습니다.”

60세가 되던 해, 김 대표는 강사직을 내려놓았다. 당시 다채로운 강의로 석탑강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석탑강의상은 설문조사 결과 상위 5% 안에 든 우수한 교원 및 강사를 선정해 시상하는 상이다.

불교를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울산에서 서울까지 체력이 더 이상 견디질 못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다시 전법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문을 연 것이 명상카페입니다. 올해 들어 4년 차인데 많은 불자 혹은 비불자들이 찾아 쉼을 얻고 있습니다.”

울산불교교육대학 6기 졸업식. 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 파란색 치마 한복

 

태화강에 흐르는 불심

김 대표가 불교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이다. 경주 보문동에서 태어난 김 대표는 할머니 집이 분황사 맞은편에 있었다. 불자였던 할머니를 따라 분황사를 찾다가 이후에는 할머니 집을 찾지 않고 학교를 마치면 바로 분황사로 달려갔다.

초등학교 때 아무것도 모르고 올라갔지만 절이 너무 좋았어요. 그 때 주지 스님이 불심 도문 스님이셨습니다. 어릴 때이니 학교 마치면 주지 스님 방에 책가방을 휙 던져 놓고 뛰어 놀았어요. 그럴 때면 스님께서 부처님께 삼배는 해야지라고 말씀 하시곤 하셨죠

초등학교 때부터 뵙던 스님들이 너무 친숙했고 편안했던 김 대표였다. 학교 가기 전 법당에 들러 청소를 하고 행자 스님들에게 목탁 치는 법을 배우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후 경주여고에 입학해 경주불교학생회에 가입하며 도반들을 만났다.

스님들의 가르침이 무서울 정도였습니다. 도반들과 철야정진을 하고 밤새 기도하는 일은 예사였지요. 한 번은 저녁 7시 쯤 법당에 학생들이 들어갔는데 스님께서 문을 탁 닫으시며 내일 아침까지 기도하라고 하시더군요.”

김 대표는 밤새 기도했는데 언제 시간이 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집중했다. 문이 열리고 나서야 기도시간이 끝났다는 걸 알았다. 도반들과 함께 기림사에서 석굴암까지 걸어갔던 경험을 말하며 부처님 앞에서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마음을 알았다고 했다.

추운 겨울 걸어서 가니 땀이 나고 목이 너무 말랐어요. 석굴암에 도착해 매달려 있던 고드름을 따서 목을 축였죠. 그러고 나니 한기가 몰려오더군요. 다시 절을 시작했습니다. 스님께서 앞으로 나가 원력을 말하라고 하셨고, 저는 부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 것을 서원했습니다.”

10대 때부터 지금까지 김 대표는 부처님과 약속했던 서원을 새기며 전법을 이어가고 있다. 평범하다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평생 전법을 이어가는 힘은 수행에서 출발했다. 매일 새벽 일어나면 바로 등을 세웠다. 30년 이상 된 버릇이라고 설명했다.

법륜 스님이 저희 경주불교학생회 출신이세요. 정토회를 시작할 당시 울산을 찾아오셨는데, 잠자다가 눈을 뜨면 이불 안에서 망설이지 말고, 즉 번뇌를 일으키지 말고 등을 바로 세우라고 하셨어요.”

김 대표는 그 가르침을 곧바로 실천했다. 새벽 3시 혹은 4시 쯤 자리에서 눈을 뜨면 작은 베개를 깔고 앉고 이불을 무릎에 덮었다. 그리고 곧장 정진했다. 특히 일일시호일, 매일 좋은 하루라는 가르침을 집착 없이 주인 된 삶으로 정의하고 3·3·3을 기억하며 자신을 단속했다. 3·3·3은 신구의 삼업을 계정혜 삼학으로 지켜보고 탐진치 삼독을 방어하자는 자신만의 약속이다.

김 대표는 마지막으로 울산 불교를 위해 구심점이 되어 줄 핵심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부처님오신날 연등축제를 태화강변에서 진행합니다. 울산을 대표하는 태화강에는 자장율사가 창건한 태화사가 원래 자리했습니다. 자장율사는 당나라에서 모셔온 진신사리를 통도사, 황룡사 9층목탑 그리고 태화사에 모셨지요. 태화사 복원을 위한 연구와 학회를 지속적으로 열어 신라 불국토, 울산을 되살려야 합니다.”

취재를 마치고 울산의 강, 태화강을 건넜다. 화합의 물줄기라는 의미를 지닌 태화강(太和江)은 울산을 대표하는 어머니의 강이다. 울산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는 태화강은 1960년대 급속히 진행된 산업화의 부작용으로 죽음의 강으로 불렸다. 수질오염으로 인해 물고기는 떼죽음을 당했고 사람들은 악취로 괴로워했다.

울산시와 시민들의 노력으로 태화강에는 현재 은어, 연어, 황어, 수달, 삵 등 100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생명의 강을 넘어 생태계의 보고로 부상하고 있으며 기적을 낳은 생명의 강으로 불린다. 태화강의 변화는 곧 울산 산업 도시 변화의 상징이 됐다.

태화강의 변화처럼 김 대표의 불심(佛心)은 격동의 시간에 메말라가던 울산 시민들에게 희망을 안겼다. 부처님오신날 태화강 주변으로 올해도 연등은 밝게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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