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시(나눔)는 이웃을 이롭게 하는 선행이며 자비행입니다. 보시는 탐욕과 소유욕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최상의 수행입니다. 6바라밀의 첫째 덕목인 보시는 깨달음으로 가는 길의 첫걸음입니다.

* 보시는 순수하고 조건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를 내세우고, 보답을 기대하고, 받았으니까 주고, 내세에 복을 받으려고 보시를 한다면 그런 보시는 선행도 수행도 아닙니다.

바라는 마음(욕망)과 조건이 붙은 이기심입니다.

부처님이 제자들과 함께 인도 중부의 고오가 강기슭에 계실 때입니다. 비야샤라는 선인이 제자들을 데리고 와서 부처님께 예배드리고 보시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부처님은 33가지의 부정(不淨)한 보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잘 분간하여 참된 보시를 해야 한다고 일러주셨습니다.

어떤 목적이나 욕망을 갖고 교환식으로 보시를 하거나 은혜를 갚기 위해 보시를 하고 버려야 할 물건을 주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지 않고 부자에게 보시를 하는 것은 깨끗한 보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시. 그림 조향숙

 

소유욕 내려놓는 수행
주었다는 생각 없어야
적은 나눔도 무량복덕

“부정한 보시에는 공덕이 있을 수 없다. 그 것은 마치 말라 비틀어진 씨앗을 황폐한 밭에 심는 것과 같다. 그 씨앗은 비가 와도 싹이 나올리 없다. 싹이 나왔다 해도 꽃이 안피고 열매도 안 열리는 것과 같이 부정한 보시는 결코 공덕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깨끗한 보시란 모든 생물에 대하여 자애로운 마음으로 베푸는 것이다. 보시의 복덕은 시주의 육신이 없어져도 그림자같이 떨어지지 않는다. 시주의 베품이 적어도 복덕은 매우 큰 것이다.”

비야샤 선인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보시를 행하였다고 합니다. <비야사문경(毘耶娑問經)> 상권.

* 보시의 공덕은 주는 마음에 따라 달라집니다.

달마대사와 중국 양무제의 대화를 다시 새겨보겠습니다. 양나라 불심천자(佛心天子) 무제(464~549)가 달마대사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한 불사의 공덕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실로 공덕이 하나도 없습니다.(無功德)”

자기의 공덕을 은근히 내세운 양무제의 조건있는 보시는 범부의 유루보시(有漏布施)입니다. 번뇌가 붙어있는 유루보시의 업보는 생천(生天)하여 복락을 누리다가 그 복이 다하면 다시 빈곤한 중생으로 윤회합니다.

달마대사는 양무제의 불사공덕을 무루(無漏)의 자리에서 보았으므로 무공덕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는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과 같은 뜻입니다.

조건이 없어 번뇌가 없는 무루보시는 탐진치 삼독을 벗어나서 해탈 열반에 들게 합니다. 이제부터 조건없이 주는 무루보시 연습으로 주고나서 주었다는 생각을 잊어버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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