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규 법사(84ㆍ봉화산 정토원 원장·만해사상실천연합 대표)

놓을 수 없는 불연의 연속
갓 나서부터 할머니와 절에 다녀
일제와 전쟁 겪으며 깊은 사유
고2 때 출가 발심 조계사 찾아
출가 대신 동국대 불교학과 입학
대학교 3년 때 해인사에서 출가
동국대 총학생회장 선출로 환속

?선진규 법사는… 1934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1956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입한 후 3학년 때인 1958년 해인사로 출가했지만 총학생회장에 선출되면서 곧바로 학교로 복귀했다. 1959년 학교를 졸업하면서 봉화산에 호미든 관음상을 봉안했으며, 그 후 포교에 진력했다. 1972년 조계종 상임포교사로 선발되었으며, 대한불교청년회 제10대, 11대 회장을 역임했다. 1983년 김해 봉화산수련원을 설립하고 청소년 포교에 진력했다. 조계종 전국신도회 제18대 회장과 동국대 객원교수, 동국대학원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봉화산 정토원 원장과 만해사상실천연합 대표 등을 맡고 있다. 청소년 수련프로그램 경진대회 최우수상, 청소년모범지도자 포상, 국민훈장 목련장 등을 수상했다. 사진=박재완

 

〈법화경〉 ‘법사품’에는 여래사(如來使)라는 말이 나온다. 부처님의 심부름꾼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수지, 독, 송, 서사, 해설하는 일 중 한 가지만 실천해도 그는 여래사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즉 부처님의 심부름이란 다름 아닌 전법포교의 공덕을 말한다. 누군가에게 법회를 소개하거나 부처님 말씀이 담긴 책자 하나만 전하더라도 그는 여래사인 것이다. 삶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부처님을 품기 시작했고, 부처님을 알고 나서부터는 평생 여래사로 살아온 이가 있다. 봉화산 정토원장 선진규다. 포교사 선진규, 법사 선진규, 그를 이제는 여래사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할머니의 정성, 부처님의 가피
명이 짧은 손자. 선 원장의 할머니는 자신의 손주가 짧은 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선 원장은 1934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시절은 선 원장뿐만 아니라 많은 아이들이 타고난 명대로 살기가 힘든 시절이었다. 세 명에 한 명은 걷기도 전에 세상을 달리했다. 불심이 돈독했던 선 원장의 할머니는 손주의 불안한 명을 부처님 가피에 기댔다. 갓 나서부터 선 원장은 할머니의 등에 업혀 절엘 다녔다. 아직 들을 줄도, 볼 줄도 모르는 아이는 귀도 눈도 없이 할머니의 염불과 합장으로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 전에 이름을 올렸다. 할머니의 지극정성이었다. 좀 더 자란 선 원장은 할머니와 함께 절을 찾고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것이 일이었다. 부처님께 절을 많이 올리면 명이 길어진다는 할머니의 생각 때문이었다. 어린 선 원장은 부처님의 존재도 모르는 채 할머니를 따라 부처님께 열심히 절을 올렸다. 선 원장의 불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할머니의 정성 때문이었을까. 선 원장은 다들 넘기기 어렵다는 유년을 넘겼다. 하지만 그 시절의 삶은 쉬운 날이 없는 시절이었다. 때는 일제강점기였다. 살아있다는 것이 축복일 수만은 없는 시절이었다.

힘겨운 시간을 지나서
조국은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시절의 힘겨움은 여전했다. 외세의 힘겨움에서 벗어난 이 땅은 그 보다 더 힘겹고 슬픈 전쟁을 시작한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다. 선 원장은 열일곱 살이었다. 이 땅은 또 다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세상은 그야말로 ‘난리’였고, 선 원장을 비롯한 이 땅의 백성들은 또 다시 힘겨워야 했다.
선 원장은 가족들 모르게 군에 지원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하지 못하고 돌아온다.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진격해왔고, 선 원장이 살고 있는 김해와 부산은 피난민과 후퇴한 군인으로 인산인해, 아비귀환이었다. 그 때, 선 원장의 집 뒷산에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는데, 나중엔 집 마당까지 미군의 주둔지가 되어버렸다. 선 원장의 할머니는 또 다시 손주가 걱정이었다. 선 원장의 할머니는 이번에는 손주의 목숨을 부처님이 아닌 미군에게 맡기기로 했다. 손주가 미군을 따라간다면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예전에 부처님께 의지했을 때처럼 미군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결국 선 원장은 미군 24사단 일선보급부대의 군속으로 미군을 따라가게 된다. 그런데 전세가 역전되면서 보급부대였던 24사단은 북쪽으로 진격해 평양까지 올라가게 됐고, 1.4 후퇴 때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게 된다. 미군과 함께 한 선 원장은 참혹하고 고단한 전장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겪는다. 삶과 죽음이 각자의 것일 수 없으며, 또한 살아있음이 ‘존재’와는 또 다른 것이었던, 암울한 시간을 생생하게 겪어야 했다. 그렇게 선 원장은 전쟁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겪으면서 육체적 정신적 성장기를 지나간다.

이어지는 불연, 출가발심
전쟁은 휴전을 맞았다. 생생하게 전쟁을 겪은 선 원장은 부산에서 다시 고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전쟁은 잠시 멈추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어두웠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도 모른 채 뒤엉킨 삶과 죽음 속에서 모두는 힘겨웠다. 선 원장 역시 힘겨운 세상 속에서 힘겨운 것들을 바라보며 살아야 했다. 그런 세상 속에서 고등학생의 선진규는 일찍 철이 들어야 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삶에 대한 의문들이 이어졌다. ‘같은 민족끼리 왜 전쟁을 해야 하는가’, ‘무고한 사람들이 왜 이유 없이 죽어야 하는가’, ‘삶은 왜 이토록 고단해야 하는가’, ‘삶과 죽음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등 생사의 근원과 자신의 이유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번뇌에 휩싸인 청년은 눈앞의 삶에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하루하루가 무의미했다. 학교도 무의미했다. 청년 선진규는 이른 나이에 세상의 깊고 깊은 곳에 가 있었다. 선 원장이 고뇌 속에서 찾은 곳은 절이었다. 학교에 가야 할 선진규는 시내에 있는 암자를 찾아 부처님을 뵈었다.
“부처님, 저와 이 불쌍한 사람들은 어찌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이 힘겨운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이유 없는 인연은 없었다. 마음을 둘 곳이 없었던 한 청년이 찾아간 곳은 할머니 등에 업혀 다녔던, 절이었다. 그리고 가랑비는 옷을 적셨다. 부처님을 뵙는 날이 쌓여가면서 선 원장은 출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결심한다. 선진규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는 서울로 향했다. 조계사(당시 태고사)를 찾아 권상로 스님을 뵈었다.
“출가하고 싶습니다.”
“뜻은 기쁘나 대중도 없고 먹을 것도 없어 학생을 받을 수가 없으니, 고등학교를 마치고 동국대 불교학과에 들어가는 것이 어떤가? 부처님 공부를 하는 길이 꼭 머리를 깎는 길만 있는 것은 아니네.”
집으로 돌아온 선 원장의 목표는 오로지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입학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는 동국대 불교학과에 진학한다. 그에게 불교대학 진학은 ‘삭발염의’의 ‘출가’와 같은 것이었다.

 

‘포교수행자’ 원력, 평생동안 실천
대학졸업 후 ‘호미든 관음상’ 봉안
‘생활불교’서원 세우고 일념 노력
만해 백일장 처음 기획·개최해
찬불가 보급 등 불교 대중화 추진
가야불교 바로 알리기에 나서
3·1운동 100주년 사업도 준비 중

1959년 선진규 원장이 봉화산에 모신 ‘호미든 관음상’

 

놓을 수 없는 ‘출가’
동국대에 입학한 선 원장의 뜻은 하나였다. 성불이었다. 부처님 공부만이 그의 길이었다.
하지만 불교학과의 위상과 존재성은 너무나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불교학과는 일명 ‘목탁과’로 불리고 있었고, 학교생활은 자신이 꿈꾸고 원했던 불가적 시간과 달랐다.
선 원장이 3학년 때였다. 시절은 이제 그를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결국 선 원장은 짐을 챙겨 해인사로 향했다. 마침내 그가 꿈꾸던, 진정한 모습의 출가를 단행한 것이다. 머리를 깎고, 법복을 입었다. 강원의 책으로 부처님 말씀을 배우고 그 글자로 하루하루를 살고 싶었던 선진규는 이제 부처님의 제자였다. 하지만 그의 불연은 쉬운 길을 주지 않았다.
선 원장이 행자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된다. 학교 학생처 직원이 내려왔다. 선 원장을 데리고 가기 위해서였다. 선 원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총학생회장에 선출되어 있었다. 선 원장은 할 수 없이 학교로 복귀한다.
“학교를 해인사라고 생각하게, 내가 그렇게 해 주겠네.”
그리고 그는 당시 총장이었던 백성욱 선생으로부터 매일 〈금강경〉 강의를 듣는다. 출가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 같은 것이었다. 학생이 총장으로부터 일대 일 강의를 들은 것은 아마도 선 원장이 전무후무할 것이다. 아무튼 선 원장의 출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선 원장은 출가를 이루지 못한 대신 재가불자로서 누구보다 단단하고 깊은 원력을 품게 된다. 그것은 불교를 위해 사는 것, 곧 포교였다. 선 원장에게 불교는 힘겨운 시간을 버티게 해준, 삶의 등불이었다. 선 원장은 그토록 이로운 불교를 널리 알리는 일이 자신의 소임이라고 생각했다.

호미든 관음상…원력의 시작, 포교의 시작
1959년 선 원장은 대학을 졸업한다.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밝은 곳보다는 어두운 곳이 많았다. 전쟁의 상흔으로 모든 것들이 스러진 국토. 보릿고개 위에서 사는 배고픈 국민들. 그런 국민들과는 거리가 멀었던 정치. 그리고 힘겨운 중생에게 가장 가깝게 있어야 할 불교는 대처와 비구로 나뉜 채 오히려 대중의 걱정이었다.
“세상이 이토록 고단한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부처님 가르침 받은 제자로서 고단한 사바에서 무엇인가 해야 하지 않을까.”
선 원장은 도반들을 모았다. 고단한 대중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그리고 전무후무한 관음상이 조성되기에 이른다. ‘호미든 관음상’이다. 관음보살은 힘겹고 어려운 세상의 대중이 가장 먼저 부르는 이름이다. 그 해 4월 5일, 봉화산 정상엔 호미를 든 관음보살상이 봉안된다. 선 원장의 주도로 조성된 관음상은 선 원장과 뜻을 같이 하는 31명의 불교학도가 심신개발ㆍ사회개발ㆍ경제개발ㆍ사상개발의 의지를 담아 조성한 것으로, 힘겹고 혼란스러운 시절을 살고 있는 모두에게 성찰과 그에 따른 실천을 서원하는 것이었다. 삶의 원천을 상징하는 호미는 마음의 밭을 가꾸자는 서원이자 실천의 의지로, 선 원장이 평소 품어왔던 ‘생활불교’의 천명이기도 하다.

불교대중화 앞장선 포교수행자
선 원장의 꿈은 출가 수행자였다. 불연을 출가로 회향하지 못한 선 원장은 호미든 관음상을 모시고 난 후 다시 한 번 굳게 서원한다. 그리고 그 서원을 향해 달린다. 60여 년을 쉼 없이 달린다. 불교를 알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어디든 달려갔다.
1972년, 선 원장은 조계종 중앙 상임포교사로 선발된다. 그에게는 더 없이 필요하고,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자신의 원력을 펴기에 더 없는 시절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1978년, 선 원장은 대한불교청년회(이하 청년회) 10대 회장으로 선출된다. 그 이름 역시 포교의 원력을 품은 그에게는 ‘날개’였다. ‘선진규’ 그 이름이 현대 한국불교에서 진하고 굵은 글자가 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 때부터일 것이다. 그는 불교 저변을 넓히기 위해 본격적으로 선진규의 ‘불사’를 시작한다.
그는 청년회의 출발이자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만해 스님을 선양하기 위해 만해백일장을 처음 기획하고 개최했다. 그리고 강연회와 세미나를 연이어 마련했다. 또 설법회 개최와 찬불가 제작 등 불교의 대중화, 생활화를 위한 사업을 펼쳐나갔다. 찬불가 ‘부처님 오신 날’, ‘연등’, ‘제등행진곡’ 등 우리 귀에 익은 찬불가는 남다른 불사관(佛事觀)을 가지고 있었던 선 원장의 노력으로 탄생한 곡이다. 법당 세우는 일만이 불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던 선 원장이었다.
그의 불사는 이어졌다. 1979년 9월 1일, 선진규의 청년회는 제1회 전국불교청년대회를 개최한다. 대회 주제는 ‘우리는 참회합니다’였다. 불교계 분쟁의 모든 원인을 청년회가 책임지고 참회하기 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신체제로 인한 온갖 불행한 시대적 아픔을 모두의 참회로 인식하는, 차원 높은 보살행을 실천해보고자 하는 대회였다. 대회는 성공적으로 회향했고, 그 성과는 컸다.
또한 그는 민족의 미래이며, 불교의 미래인 청소년불사에도 진력했다. 그는 1983년 김해에 봉화산수련원을 설립하고 청소년 교육불사에 힘을 쏟았다. 당시 그가 개발한 청소년 인성교육을 위한 예절프로그램은 전국 수련포교프로그램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활용되고 있다. 그 공로로 그는 2006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그 밖에도 전국의 초중고 학교를 대상으로 한 ‘학교에 죽비 보내기 운동’, ‘봉화산 청소년 축제’ 등은 청소년을 위한 불사로, 선 원장이 걸어온 포교의 길에서 커다란 불사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청년회 11대 회장으로 다시 선출된 선 원장의 불사는 이어졌고, 그가 임기를 마쳤을 때 청년회는 16개 지부에서 152개의 지부로 늘어나 있었다.
선진규, 그의 이름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2002년, 조계종 전국신도회 제18대 회장으로 선출된다. 그는 새로운 신도운동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하고, 지도자수련대회와 조직을 정비하는 등 신도회가 ‘조직’으로만 끝나지 않고, 불법홍포에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조직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멈추지 않는 전법포교
2018년 2월 28일, 만해 스님의 유택인 서울 성북구 심우장에서는 ‘3.1 운동 100주년 기념 불교준비위원회 구성 발기인 대회’가 열렸다. 발기인대회는 2019년 3.1 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불교인 평화통일 선언’ 등 전국적으로 불교기념사업을 펼칠 수 있는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 중심엔 역시 선 원장이 있었다.
1959년 선 원장이 봉화산에 호미든 관음상을 봉안한 이후로 그의 이름은 불교가 있어야 할 자리와 불교를 알릴 수 있는 자리마다 빠지지 않았다. 그가 향하는 곳, 그가 머무는 곳, 그가 만나는 사람, 그가 바라보는 곳은 모두 포교의 일환이었다. 故 노무현 前 대통령과의 인연 역시 많은 대중에게 불교를 알리는 자리가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모든 시간과 공간이 그의 원력과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명함 뒷면엔 20개 가 넘는 직함이 적혀있고, 현직인 직함만 해도 6개가 적혀있다.
그는 얼마 전부터 가야불교를 알리는 일에도 동참하고 있다. 가야불교문화원 홍보위원장인 그는 우리 불교의 뿌리에도 마음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 불교의 작은 글씨 하나도 아까워하는 그의 마음은 그야말로 ‘불심’이며, 천상 부처님의 심부름꾼이다. 이제 그의 이름 앞에 ‘여래사’를 붙여본다. 여래사 선진규.

2002년 조계종 전국신도회 제18대 회장으로 선출된 선진규 회장〈맨 오른쪽〉의 취임식.

 

1993년 봉화산 청소년 축제
2월 28일 심우장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기념 불교준비위원회 구성 발기인 대회’. 왼쪽 두번째 선진규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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