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생이지만 불제자로 산 세월 천년 산 보람”
“짧은 생이지만 불제자로 산 세월 천년 산 보람”
  • 정리=김주일 기자
  • 승인 2018.03.09 19: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⑤ 사형수 고금석

매일 3천배와 참선, 교도소내 ‘선사’로 불려
영치금 모아 용소분교 어린이 돕는 선행도
삼중스님, 고금석 만든 염주 지금도 손에 차


1989년 8월 4일 오전 10시 서울구치소 교수형 집행장에 들어선 박삼중 스님의 합장한 손이 바르르 떨렸다. 사형수 고금석의 사형 집행 현장이었다. 5분간의 인정심문이 끝나자 사형자에 대한 종교 의식에 들어갔다. “죽음이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육신의 얽매임에서 해탈하는 순간을 맞았군요”라고 삼중 스님이 가까스로 입을 뗐다. 그러자 고금석은 “예, 비록 27살 나이로 떠나지만 저의 삶은 여한이 없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다시 고금석은 잔잔한 미소를 띤 편안한 얼굴로 “스님 부디 건강하세요. 안색이 무척 안좋으신데 건강하셔야 좋은일 많이 하실 것 아닙니까”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두 사람은 함께 <반야심경>을 독송했다. 그리고 다시 생각난 듯 고금석은 “사건 피해자들을 위해 자신이 올리던 1천일 기도가 10일 부족하니 스님이 나머지 기도를 채워달라”고 부탁했다.
사형수는 태연하게 미소 짓고, 스님은 울고… 완전히 위치가 뒤바뀐 셈이 됐다. 의식이 끝난 뒤 그가 도리어 스님을 위로했다. “스님, 죽음은 없다고 가르쳐 주셨죠…그래서 이렇게 웃고 있지 않습니까.”
고금석은 교도관들 사이에서 가장 인상적인 최후를 보인 사형수로로 꼽힌다. 고 씨는 서진 룸살롱 살인사건의 범인이었다. 이는 1986년 서울 강남 조직폭력배 간 다툼으로 8명이 잔인하게 살해되거나 중상을 입은 사건이었다. 그는 유도대학 출신으로 친한 선배들을 쫓아다니다 엉겁결에 싸움에 휘말려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험상궂은 외모나 잔인한 범행수법과 달리 감옥에서는 3년간 매일 3천배와 참선 등을 하며 교도소내에서는 '선사' '스님' 등으로 불렸다. 또한 자신의 영치금을 털어 산골 어린이를 돕는 선행도 베풀었다. 이런 고금석을 삼중 스님은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서일까? 삼중 스님의 손에는 지금도 그가 만들어준 염주가 끼워져 있다. 지금은 오래 돼서 글씨가 닳아서 잘 안보이지만 염주에는 고금석이 평소 좋아하던 경구들이 새겨져 있다고 말한다. 삼중 스님은 고금석이 사형수로서는 기록에 남을 만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독실한 불자로 어려운 재소자를 도와가며 자신의 죄를 참회했다는 것이다. 삼중 스님은 “지금까지도 여생을 이렇게 보낸 사형수는 본 적이 없다. 자신의 죄를 받아들였고, 사소해도 타인을 위한 일이라면 스스로 나서고 나누고 싶어했다”고 회고했다.  
고금석은 교정시설 밖에서 ‘키다리 아저씨’로 불렸다. 동료 사형수가 후원하던 강원도 오지인 정선의 용소분교를 이어받아 정성을 쏟으며 죽기 직전까지 후원했다. 어느 날, 고금석의 신분을 모르는 한 학생이 “탄광촌에 살아서 저는 푸른 바다에 가 본 적이 없어요. 바다를 보고 싶어요”라고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고금석은 그 꿈을 이뤄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당시 그의 영치금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데다 사형 집행이 수시로 있던 시기였다. 약속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달은 고금석은 펑펑 슬피 울었다고 한다. 삼중 스님은 눈물 흘리는 그 앞에서 “내가 대신 아이들에게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그를 위로했다. 

1989년 10월 19일 정선 용소분교서 열린 임간교실 ‘금송정’ 준공식서 삼중 스님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금송’은 사형수 고금석의 법명이며, 이 임간교실은 그의 영치금을 비롯해 각종 단체서 기탁된 성금을 모아 지어졌다.
1989년 10월 19일 정선 용소분교서 열린 임간교실 ‘금송정’ 준공식서 삼중 스님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금송’은 사형수 고금석의 법명이며, 이 임간교실은 그의 영치금을 비롯해 각종 단체서 기탁된 성금을 모아 지어졌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산으로 아이들 물놀이 행사를 준비 하던 스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1989년 8월 4일 고금석의 사형을 집행한다”는 내용이었다. 많은 사형수들을 만난 삼중 스님이지만 고금석의 사형 집행 소식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고 고백한다. 평생 처음 취할 만큼 술을 마셨고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의 마지막 모습은 봐야 했기에 사형 집행장을 찾았지만 결국 삼중 스님은 평정을 찾지 못했고, 그의 앞에서 아이처럼 울었다. 오히려 스님을 위로한 것은 사형수 고금석이었다. 사형 집행이 이뤄지기 직전 그는 “그동안 저에게 베풀어 주신 스님의 크나큰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스님의 지병이라도 제가 갖고 떠나고 싶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러니 제발 웃어주세요”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사형이 집행된 지 열흘 뒤, 강원도 오지 아이들의 부산 바다 여행이 성사됐다. 고금석은 전 재산 20만 원을 학교에 남겼고, 강원도 용소분교에는 각종 단체서 기탁된 성금을 모아 그의 법명인 ‘금송’을 딴 야외 임간(林間)교실이 지어졌다.
용소분교는 힉생수 감소로 2008년 통폐합돼 없어졌지만, 아이들을 사랑한 사형수 고금석이 강원도 산골벽지에 뿌린 진정한 참회의 의미는 오래토록 회자될 것 같다. 

삼중 스님의 손에는 아직도 고금석이 만든 염주가 끼워져 있다.
삼중 스님의 손에는 아직도 고금석이 만든 염주가 끼워져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