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어라/법정 지음/박성직 엮음/책읽는 섬 펴냄/1만 3천원

한국 전쟁이 끝났다. 누군가는 돌아오지 못했고, 누군가는 서서히 미쳐 갔고, 누군가는 밀항을 꿈꾸었고,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참상을 목격한 대학교 3학년생 박재철. 그는 몇 날 며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회답 없는 질문을 던지다가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이듬해에 박재철의 사촌동생 박성직에게 짤막한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든다. 핵심 요지는 “불쌍한 우리 어머님의 아들 노릇을 네가 대신 해 다오”라는 부탁이었다. 그리고 박재철은 승려 법정(1932~2010)이 되었다.

이 책은 1955년부터 1970년까지 법정 스님이 사촌동생 박성직(77)에게 보내온 50여 편의 편지를 엮은 것이다. 홀어머니를 비롯한 친지들과 혈육의 인연을 끊어 버린 매정함을 스스로 질책한 청년 박재철. 그가 위대한 자연과 진리에 의탁하며 승려 법정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내면의 독백으로 이어진다. 그 편지들 속에는 구도행을 하는 한 수행자가 마주한 인간적 고뇌와 깨달음의 흔적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특히 청년 박재철이 승려 법정으로 거듭나는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어 흥미롭다. 이외에도 편지속에는 1976년에 출간된 베스트셀러인 〈무소유〉가 글감이 된 사연들과 깨우침도 알알이 박혀 있다.

이 책은 원래 2011년에 출간된 〈마음하는 아우야〉를 재편집한 것이다. 하지만 첫 판본과는 달리 출가 당시를 회상하는 법정 스님의 소회를 담은 에세이와, 편지에 짧게 이름만 등장하는 이를 추억하며 쓴 글들을 덧붙여 내용을 보다 튼실하고 풍성하게 엮었다. 그래서 독자들은 법정 스님의 편지와 이 책에 인용한 에세이를 함께 접하면서 편지에 담긴 사연과 의미를 더욱 깊이 음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불쌍한 우리 어머님 아들 노릇 네가 대신 해 다오.”
청년 박재철이 승려 법정으로 다시 거듭나기 위해 겪은
고통과 고뇌, 희열과 깨달음의 흔적 담긴 편지 50여편
법정 스님 입적 8주기에 맞춰 새롭게 편집해 재출간

 

어쩌면 승려 생활 초기에 법정 스님이 감내해야 했던 가장 큰 고행은 ‘인연의 끊어 버림’ 이었을 것이다. 가족을, 청춘을, 나아가서는 속세에 머물던 박재철의 존재조차 끊어 버려야 했던 그 고통의 시간. 오히려 자신을 걱정할 동생에게 보낸 글이기에 의연함을 담았지만, 그의 편지에는 자신의 길을 택함으로써 오랜 고향을 등진 이의 설움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옛집의 주소조차 잊어버렸다’는 그의 서글픈 음성에서는 인간적 애잔함과 함께 오히려 수행자의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는 그렇게 더 큰 사랑을 위해 가장 아끼는 것을 버린 것이다.

법정 스님이 사촌동생 박성직에게 보낸 편지에는 공통점이 있다. 삶에 대한 조언과 당부의 말이다. 공부 열심히 하라고, 술 마시지 말라고, 책과 친구는 가려서 접하라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빛나는 보석 같은 순간을 건지라고, 고통의 시간이 우리의 마음을 살찌우는 거라고, 번민하고 사색하라고, 자연으로부터 배우라고, 그리고 울지 말라고 등등. 동생에 대한 사랑이 곳곳에 묻어난다.

법정 스님이 박성직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낸 6년 뒤에 불후의 명작인 〈무소유〉가 세상에 나온다. 앞서 밝혔듯, 〈무소유〉에는 법정 스님이 박성직에게 보낸 편지를 원전(原典)으로 삼은 에세이가 더러 실려 있다. 50여년 전 법정 스님이 동생에게 보낸 이 편지들은 누군가를 지극히 아끼고 사랑한 사람이 추억이라는 타임캡슐에 담아 오늘의 우리에게 보낸 것이 아닐까 상상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법정 스님과 박성직과의 편지는 점점 뜸해지다가 1964년 이후에는 끊긴다. 공식적인 마지막 편지는 책 속에 나온걸로 보면 1970년 11월경이다. 박성직의 부친이자 법정 스님의 작은 아버지 별세 소식을 듣고 보낸 편지다. "마음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데 요즘의 내 건강과 주위의 내 형편이 나를 부자유하게 만들고 있다. 이 세상에서 내게 가장 은혜로운 분은 작은 아버지이시다. 나를 교육시켜 눈을 띄워 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할머님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오늘은 법당에 들어가서 많이 울었다. 이 일 저 일 생각하니 내가 진 빚이 한량이 없구나. 불효하기 그지 없고 … …"

한편 지난 3월 11일은 법정 스님 입적 8주기였다. 스님이 생전에 창건한 성북동 길상사에서는 스님을 기리는 추모 음악회와 법회가 열렸다. 스님의 유언에 따라 스님 관련 출판물이 절판돼 아쉬움이 큰 춘삼월, 스님의 향훈과 체취를 다시 글로서 느낄 수 있는 이 행복은 입적 8주기를 맞아 스님을 그리워 하는 이들에게 크나큰 봄선물이 될 것 같다.

저자 법정 스님은?
1932년 전라남도 해남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경험하고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하다가 대학 재학 중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섰다. 1955년 통영 미래사로 입산해 1956년 송광사서 효봉 스님의 문하에 출가했다.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행자 생활을 했으며,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 탑전으로 가서 스승을 모시고 정진했다. 그후 해인사 선원과 강원에서 수행자의 기초를 다지다가 28세 되던 해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1975년 본래의 수행승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에 명성이 알려지자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아무도 거처를 모르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 문명의 도구조차 없는 곳에서 혼자 살아왔다. 폐암 투병 중 2010년 3월 11일 병원서 퇴원해 법정스님이 1997년 12월 창건해 2003년까지 회주를 맡은 길상사서 입적했다. 저서로는 수필집 〈산에는 꽃이 피네〉 〈인연 이야기〉 〈오두막 편지〉 〈물소리 바람소리〉 〈무소유〉등이 있고, 역서로 〈깨달음의 거울(禪家龜鑑)〉 〈진리의 말씀(法句經)〉 〈불타 석가모니〉 〈숫타니파타〉 〈因緣이야기〉 〈신역 화엄경〉 등 다수가 있다.

엮은이 박성직은?
법정 스님 사촌동생으로, 어린 시절 한집에서 같은 방을 쓰며 친형제처럼 자랐다. ‘나 대신 네가 아들 노릇 해 달라’는 스님의 부탁을 받들어 결혼한 뒤에도 법정 스님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고, 법정 스님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줄곧 제사를 지내왔다. 1986년 불일암에서 부부가 함께 법정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계를 받았다.

    

책속의 밑줄 긋기
▲“성직아, 고난을 겪는 사람은 행복하게만 사는 사람보다 훨씬 인생 경험이 많아서 자신이 생기고 또한 생활에 대한 저항력도 길러진다. 누구보다도 인생에 대해서 심각하게 체험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위를 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할 말이 실로 많으나 한이 없겠기로 줄인다. 항상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하여라.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어라”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어라〉 中에서
▲“반복하는 생활에서 어떤 위대한 것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생활이라고 해서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더 새로워야 하고, 또 오늘보다 내일은 한 걸음 앞서야 되는 것이다. 여기에 훌륭한 삶의 보람이 있고 인간 성장이 있는 것이다. 저 하늘의 태양을 보아라. 흐린 날에도 제 갈 길은 꾸준히 가고 있는 그 위대한 모습을!”
〈반복되는 일상 속의 위대함을 보아라〉中에서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그저 먼 날에 죽어 버렸거니 생각하여라. 실은 죽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편지는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안 하는 것이 좋다. 이곳 공부에 방해가 되니까…….”  〈세상일이라는 게 한바탕 꿈〉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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