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승가엔 어떤 분쟁 있었나

1840년 7월 3일 불갑사 승려 도영은 초의에게 편지를 보낸다. 크기는 27.2cm×43.0cm이고 행서체로 꾹꾹 눌러쓴 편지로, 정중함이 묻어난다. 겉봉투 상단에 ‘대둔사 초의사주 대법하 회답(大芚寺 草衣師主 大法下 回答)’이라 썼으니 초의에게 보낸 편지임이 분명하다. 하단의 오른편에 ‘불갑사 도영 상사장(佛甲寺 道影 上謝狀)’이라 썼다. 바로 초의가 보낸 편지에 대한 도영의 답신인 셈이다. 도영이 총섭차첩(總攝差帖)을 받는 과정에서 초의와 서로 다른 입장 차이를 보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1840년 7월 도영이 보낸 편지
총섭차첩 받는 과정서 보여준
초의의 처신을 강하게 비판해
도선암, 불갑사 사중 입장 확인
조선시대 승직 논쟁사 연구 사료


이 분쟁과 관련된 편지는 도영의 편지 이외에도 우활과 성활의 편지, 그리고 도영의 다른 편지 등이 남아 있다. 하나같이 이들의 편지에서 드러난 분쟁의 요인은 총섭차첩을 요청, 부임하는 과정에서 도영과 초의의 입장이 달랐으며, 도영은 총섭차첩(總攝差帖)을 받는 과정에서 초의의 처신에 상당한 불만을 피력하면서 시정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특히 이 분쟁의 전개는 1840년 3월에서 우활(宇闊)이 보낸 편지를 필두로, 같은 해 7월까지 논쟁이 이어졌는데 도갑사, 대흥사뿐 아니라 안국암(安國庵) 종정(宗正) 우활(宇闊)까지 가세하였고 송광사, 불갑사 승려들도 도영의 입장을 옹호했다는 점이다. 결국 이 문제는 같은 해 7월17일 도내승통(道內僧統) 성활(性闊)이 ‘표충사수호겸팔도선교양종승풍규정도원장(表忠祠守護兼八道禪敎兩宗僧風糾正都院長)’에게 상고한 일을 처리하면서 이관을 청하는 공문으로 보낸 후 일단락된 듯하다. 따라서 도영의 이 편지는 조선 후기 대흥사 총섭차첩과 관련하여 초의와 다른 입장을 표명했던 도선암(道詵菴), 송광사, 불갑사 승려들의 입장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승직에 관련된 대흥사의 논쟁사를 밝힐 근거 자료라 하겠다. 도영의 편지를 찬찬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해사(海士)가 집안 일로 오래 머물렀습니다. 지금 온 서신을 열어 삼가 살펴보았습니다. 존체가 편안하시다고 하니 우러러 경하함을 이루다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편지에 급히 위에 글을 올리려했지만 성암 노사가 끌어 당겨 늦어졌다고 했는데 이는 속이는 말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만약 진실로 상사에게 말하고자 했다면 부임하지 않겠다고 위에 말하시는 것이 오히려 옳습니다.

지금은 이미 그렇지 않으니 당초에 법형(초의)이 사적으로 인편을 위에 보내, 내려 온 차첩(差帖)에는 여러 조목이 보이지 않았는데, 삼 개월 동안이나 우리 간사의 일을 깊이 묵혀 두었으니 망령되게도 속여 그대로 버려둔 것입니다. 다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수첩(受帖)을 요청하고 부임하여 권리를 행한 이후에 지금 위에 말하는 것이 마땅한 것인가요. 이것은 사람을 속이는 태도를 은근히 드러낸 것입니다.

또 지난번에 충허간사(?虛幹事)가 송광사로부터 온 인편에게 들으니 즉 법형(초의)이 스스로 편지를 써서 성암 사주에게 말하길 ‘보내 온 차첩은 지난번 원(院)의 장 간사가 상사(上司)에 보낸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런 망언을 하는 자가 어찌 자기 말이 서로 어긋남을 깨닫지 못하는가. 서로 어긋나는 것은 3월에 장 서방 편에 보낸 편지에서 보장(報狀)이 오기에 앞서 사적으로 인편을 통해 위에 올렸다 말했고, 지금 온 회보(回報)에 말하는 것은 즉, 사적으로 인편을 보내 올린 말이라 하였는데 그것을 보면 일의 착오를 의심하지 않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묻기를 ‘다시 보낸 차첩에 본원의 간사가 나오지 않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장 서방의 답에 ‘나의 삼촌 친척 되는 사람이 해남 신연 이방편에 부탁해 왔다’고 했습니다. 또 ‘총섭첩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으니 (장서방이)답하기 ‘총섭차첩(總攝差帖)은 예조참판인 나의 삼촌이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첩은 삼촌에게 있다고 하더라. 이와 같은 말을 들은 후, 법형(초의)이 사적으로 인편을 왕래한 일임이 또렷하고 확실히 알았기에 그만 둔 것입니다. 지금 전임 원장간사가 상사에 차출을 가게 했다는 망언은 애매모호해졌으니 어찌 서로 어긋난 것이 아닙니까.

이 망언의 당처(當處)는 충허 스님에게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종이에 가득 찬 많은 말들은 글자 하나하나가 곤란한 말입니다. 전해 들으니 즉 통탄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모두 법형(초의)의 망언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또 우활 간사가 돌아와 말하기를 ‘초의가 다른 사람에게 부임수첩을 요구했다’고 하니 이 말을 듣고 곧 마음이 불쾌해졌으며 후일 쟁송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따라서 즉시 편지를 보내 ‘차첩을 돌려보내시고 부임하지 마십시오’라고 한 것입니다. 일일이 지적하여 말한 것은 삼 개월을 생각한 후에 말씀드린 것입니다. 운흥사 인편에 스님께 전합니다. 끝까지 내 말을 듣지 않으시고 급히 부임한다면 쟁론이 일어남을 어찌하시겠습니까. 무릇 쟁론의 폐단은 모두 법형(초의)의 친한 사람을 상사(上司)에게 보내, 내려온 첩(帖)을 스스로 돌려보내지 않고 첩(帖)을 받아 부임한 것이 과실입니다. 간사가 관계한 모든 일은 실패할 것입니다.
법형(초의)이 사적으로 보낸 인편으로 인해 차출된 것을 미워하고 원망합니다. 아, 우연히 승려에게 염치없는 억울함을 당한 것이 원통하고 분합니다. 편지에 가득 눈물이 넘칩니다. 이만. 1840년 7월 초3일  도영 올림.
     
海士久滯家事 今來傳書開緘 謹審尊體萬安 仰賀無任 第書內?欲辭上 而惺老挽住云者 知是欺言 若眞欲辭上 不赴任而辭上 猶可也 今旣不然 當初法兄私因便送上 下來之差帖 不現衆目 深藏留置 三月吾之幹事 欺妄率去 復與衆人偕請受帖 赴任行權後 今辭上之言 可當耶 此欺人之色欲隱彌露 又向者?虛幹事 自松廣來便聞見 則法兄自作書簡 告惺庵師主曰 所送差帖 舊院丈幹事 去上司下來云云 如是妄言者 何不覺自語相違耶 所以相違者 三月張書房便送簡曰 報狀前私因便送上矣 今來回報云 則私因便送上之言 見之 則任事違差不無疑 故余問曰 更差帖以本院幹事不出來耶 張書房答 吾之三寸親人 海南新延吏房便付托來 又問摠攝帖何在耶 答 摠攝差帖 禮曹參判吾之三寸 名移差 故帖在三寸云云 如是言聞之後 法兄私因便往來事 昭昭知而坐 今以曖昧舊院丈幹事去上司差出之妄言 何不相違耶 當此妄言處 ?虛以實言聞之 故滿紙長語 字字困說 傳聞則不勝痛?者 皆起於法兄妄言中也 又活幹事回來曰 草衣要人受帖赴任云云 此言聞則不快心自動 恐似有日後諍起 故卽時送簡曰 差帖還退勿赴任事 一一條陳 三月念後 雲寺便傳于座下矣 終不聽吾言 速赴急任 何起諍論乎 大凡諍論之病 都在法兄親人去上司來帖 不得自退 受帖赴任之過也 幹事萬關見敗 法兄私便差出之憎怨 噫偶然見得 僧人無色之寃 則痛憤也 漏滿封一 伏惟   庚子 七月 初三日 道影 拜

이 편지에서 도영이 초의를 법형(법형)이라 부른다는 점이다. 불갑사는 당시 대둔사(대흥사)의 말사였다. 그러므로 도영이 초의를 법형이라 부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분쟁은 무엇에서 발단된 것일까. 같은 해 3월 17일 우활(宇闊)이 보낸 편지에  “본사 원장 스님에 보고한 것입니다만 지난번 예조에 보고한 후, 간사(幹事) 스님이 망기(望記)에 개인적으로 고쳐 첩을 내기 때문에 간사한 상황은 잘못된 보고이며 망기(望記)도 거짓된 것이라 조치할 수 없습니다. 원안대로 고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하지만 초의는 우활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기에 다시 불갑사 도영이 편지를 보내 “지난번 충허 간사 편에 법형과 성암 사주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지금까지 회신이 없으므로 다시 말씀드립니다. 즉 종정이 결정하여 운흥사 인편에 돌려보내시길 바랄 따름입니다. 성암 사주께서도 함께 회람하시기 바랍니다.(向者?虛幹事便 書送于法兄與惺庵師主矣 今無回示 故更告 則宗正決事 雲寺便回示爲望耳)”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같은 해 3월 17일 우활이 언급했던 간사는 충허(?虛)였고, 이 일과 관련된 인물은 초의와 성암 사주였음이 이 편지로 밝혀진 셈이다.

1840년 3월 26일에 도영의 편지에는 이 분쟁은 더욱 첨예한 입장 차이를 보였는데 이 무렵 초의는 표충사 원장 소임을 그만 두었다가 다시 원의 소임을 맡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난다. 바로 이번에 소개할 편지는 1840년 7월 3일에 초의에게 보낸 도영의 편지이다.

이 편지에 “편지에 급히 위에 글을 올리려했지만 성암노사가 끌어 당겨 늦어졌다고 했는데 이는 속이는 말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만약 진실로 상사에게 말하고자 했다면 부임하지 않겠다고 위에 말하시는 것이 오히려 옳습니다”라고 하여 그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드러냈다. 바로 초의가 원장 소임을 맡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바로 예조(禮曹)에 보고한 내용은 간사가 허위로 꾸민 대로 내려온 문서이므로 부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의의 입장은 다른 견해를 보였다. 바로 초의 자신이 상부에 글을 올리려 했지만 성암 노사가 못하도록 만류하여 늦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의의 입장 표명에도 도영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바로 초의에게 총섭차첩(總攝差帖)을 보낸 것은 “초의가 다른 사람에게 부임수첩을 요구했다’고 하니 이 말을 듣고 곧 마음이 불쾌해졌으며 후일 쟁송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따라서 즉시 편지를 보내 ‘차첩을 돌려보내시고 부임하지 마십시오’”라고 한 것이다.

만약 초의가 끝내 총섭에 부임한다면 “쟁론이 일어남을 어찌하시겠습니까. 무릇 쟁론의 폐단은 모두 법형(초의)의 친한 사람을 상사(上司)에게 보내, 내려온 첩(帖)을 스스로 돌려보내지 않고 첩(帖)을 받아 부임한 것이 과실”이라는 도영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하였다. 하지만 초의의 입장은 “보내 온 차첩은 지난번 원(院)의 장 간사가 상사(上司)에 보낸 것이라’는 점은 밝혔던 것이다.
이 분쟁은 4개월간 지속되다가 1840년 7월17일, 도내승통 성활이 보낸 공문으로 종결된 듯하다. 이 공문에는 논쟁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는데 첫째 우활이 총섭첩문을 잃어버렸으나 모두 다시 줄 것이라 생각하고 간사함을 일으킨 것이 잘못인데 상부 관청에서 처리하지 않았다. 구 원장이 새로 총섭을 맡으면서 자신이 규정에 있으면서 처음에 상부를 범한 잘못을 바로 잡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둘째 승통은 한 도를 규정하고 원장은 팔도를 총섭, 규정하는 것인데 자의로 일일이 논하여 보고했다는 점이다. 셋째는 잘못을 범했는데도 승도에게 내려 보낸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새로 부임한 초의는 도영의 부당함을 팔도총섭의 규정에 따라 처리하라고 하였다. 당시 총섭첩과 관련된 분쟁은 초의의 입장대로 처리되었을 것이지만 대흥사, 불갑사 사중 간의 팽팽한 대립이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자료라 하겠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