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아난존자에게 참선에 대해 말하시기를 설사 역천만겁 동안 나의 깊고 묘한 법문을 다 외운다 하여도 단 하루동안 도()를 닦아 마음을 밝힘만 못하느니라. 내가 아난과 같이 멀고 먼 전생부터 같이 도에 들어 왔다. 그러나 아난은 항상 글을 좋아해 글 배우는데 힘써 왔기 때문에 이제 까지 성불하지 못했지만, 나는 반대로 참선에만 힘써 도를 닦았기 때문에 벌써 성불하였다고 하셨다. 간화선 이 뭣고는 밖으로 상()에 매여있는 중생들을 내안의 공성(空性), 불성(佛性)으로 회귀(回歸)시키는 일대사 인연(因緣)인 것이다. 아상(我相)이 떨어져 나간 그 공성(空性) 자리는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래야 볼 수 없는 오직 모르고 모르는 일을 마친 사람의 경계(境界)이며 본래 내 고향인 것이다.

이 뭣고는 이주 정성스럽고 지극하고 간절하게 오직 모르는 당처인 에 대고 하는 것이다. ‘이 뭣고는 내 자성불과 마음속에 함께 하는 인간 세상을 향해 불도(佛道)의 장애를 주관하는 타화자재천의 우두머리인 마구니 마왕(魔王) 파순(波旬)이 하고 치열한 전쟁을 하는 것이고, 일체 불안(不安)과 시비(是非)와 속박(束縛)서 벗어나 자유롭고 존귀(尊貴)하게 하는 것이고 우주법계의 왕이 되는 것이다. ‘이 뭣고는 성불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문고리이니, 한 생각만 뒤집으면 바로 부처인 것이다.

밖으로 상에 매인 중생들을 내안의 공성과 불성으로
회귀시키는 일대사 인연(因緣)이 바로 간화선 이뭣고

중생의 분별심(分別心)은 생사윤회의 길잡이가 되지만, ‘이 뭣고는 생사(生死)의 굴레서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광명(光明)이니, 그 자리와 하나가 되면 절대 행복만이 상존(常存)하는 극락세계인 것이다. 그러니 밥 먹으면서도 밥 먹는 이놈이 무엇인지 걸을 때도, 일할 때도,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꼬집으면 아픈 줄 알고, 울고 웃을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지 되묻는 이 뭣고밖에 없는 것이다.

종일수타보(終日數他寶) 자무반분전(自無半錢分)이라는 말을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종일토록 남의 보물을 세어도 나에게는 반 푼어치의 이익이 없다는 의미이다. 언제 다시 인간몸을 받아 불법을 만나 깨쳐 본래의 내자리에 이를 수 있을까? 그물에 천 코가 있지만, 고기가 걸리는 것은 이 뭣고의 한 코인 것이다.

옛날 염관(鹽官) 스님 문하에 7백여 제자 중 쉬일 스님이란 분이 계셨다. 이 스님은 나이가 50세가 넘도록 매일 대중 스님들의 뒷바라지만 하고 공부는 게을리 하며 허송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스님이 저녁 법당 옆을 지나가는데, 9척 장신이나 되는 험상궂은 남자가 시커면 옷을 입고 우뚝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신 누구요?”라고 스님이 물으니 염라대왕이 당신을 끌고 오라고 해서 왔소.”

내가 스님 시봉과 대중들 뒷바라지나 하다가 공부를 못하고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 염관 스님 법문에 “7일만 목숨 걸고 참선하면 해탈한다고 했소, 그러니 나에게 1주일만 시간을 좀 주시길 바랍니다고 간절히 애원했다. 그러자 그 험상궂은 사내는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니 염라대왕에게 허락 받고 오겠다고 말하고는 돌아 갔다. 이런일이 있은 후 쉬일 스님은바로 그 자리에 앉아 이 뭣고화두를 간절히 들었다. 바늘귀에 실이 쏙 들어가듯이 이 뭣고삼매에 빠져 버리니, 저승사자가 7일 후에 다시 와서 아무리 그 시자를 찾아도 몸뚱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 일화에서 보듯이 우리도 7일만 삼매에 들면 저승사자도 볼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반드시 해탈 하겠다는 큰 원력을 갖고 이 뭣고수행을 하면 금생에는 성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란 강한 믿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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