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가 150세 나이로 중국으로 건너와서 불교에 대혁명을 일으켰는데, () 염불(念佛), 송주(誦呪)등을 다 부인(否認)하고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했다. 마음을 관하는 한 가지 공부에 모든 법이 다 들어있으니, 곧 바로 진심을 관해 자기 성품을 보고 깨달아 생사가 없는 부처가 되게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진심을 관하는 일법이 일체 수행법의 근본이며, 그 관하는 반야지혜(般若智慧)가 바로 이 뭣고인 것이다.

육진경계(六塵境界)를 딱 하나로 관하는 자리가 반야(般若)인데, 저 높고 깊은 곳에서 내 모습을 ~뭣고로 관조(觀照)하면, 아무리 높은 태산 같은 무게의 괴로움과 슬픔도 한 조각 하염없이 흘러가는 뜬 구름일 뿐이요, 금방 질식(窒息), 폭발(爆發)할 것 같은 나의 감정의 모습도 지나가는 아지랑이에 불과 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부처님 경계를 알고자 한다면 그 마음을 허공같이
모든 망상과 취하려는 욕심을 여의면 걸림이 없다

그러니 생활속에서 매순간 일어나는 한 생각을 바로 알아차리고(싸띠) 그 뿌리를 ~뭣고로 찰라에 잘라 버림으로서 제 8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장이 점차 소멸돼 생사고(生死苦)에서 벗어나고, 내안의 자성불인 지혜광명의 스위치를 ~뭣고로 올려 밝히면 그것이 매순간 여의보주를 굴려 쓰게 되는 이치와 같다. 우리의 모든 소원성취도 내안 자성불(自性佛)의 진성연기(眞性緣起)로 이뤄지게 되는 것이지 밖에서 빌어서 오는 것이 아니다.

<화엄경>에 약인욕식불경계(若人欲識佛境界) 당정기의여허공(當淨基意如虛空) 원리망상급제취(遠離妄想及諸趣) 염심소향개무애(念心所向皆無碍)이란 말이 있다. 이는 만일 부처님의 경계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마음을 허공같이 하라. 모든 망상과 취하려는 욕심을 여의면 이 마음 가는 곳에 걸림이 없으리라는 의미이다.

돈오(頓悟)의 돈제망념(頓諸妄念)은 모든 망념을 제거하는 것이고, 오무소득(悟無所得)은 깨달음이란 본래 갖춰 있기 때문에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즉 망념만 제거하면 그대로가 부처인 것이다.

화두란 지금 우리에게 직접 부딛히는 모든 장애와 관계된 마음의 성질이다. 생활속에서 불법과 화두를 따로 분리시켜 놓으면 생각마다 어려움에 갇혀 움직일 수가 없게 된다. 본래 어둡고, 밝고, 알고, 모를 것이 없다. 누구나 본래부터 그대로 부처인 것이고, 모든 생명은 본디부터 깨달음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본각(本覺)은 깨닫는 자와 깨닫는 대상은 둘이 아닌데, 둘이 아닌 것을 둘로 나눠놓고 깨달으려 하니 남()과 북()이 서로 갈라진 것이다. 또한 깨달아 증득하려는 마음이 앞에 놓여 있기 때문에 장애와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고,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자기 집 안방에 앉아서 자기 집을 찾는 격이다. 우리가 삶속에서도 나와 너를 둘로 보기 때문에 시시비비(是是非非)가 일어 나지만, 깨닫고 보면 남이란 타인(他人)이 아니고 또 다른 나인 것이다. 중생이 아무리 본래부터 뚜렷이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천성으로 지혜의 눈이 어두워 생사윤회를 거듭 하는 것이다.

만약 세상서 뛰어난 금강보검(金剛寶劍) ‘~뭣고가 아니라면, 누가 무명(無明)의 두꺼운 껍질을 벗겨 줄 수 있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우리가 수행중 혼침이 일어 나더라도, ()를 심안(心眼)으로 반조(返照)하며, 천천히 의심(疑心)을 일으켜 ~뭣고하면 차차 화두가 순일 하게 이어지게 될 것이다. 쇳덩이를 달궈 황금을 만들 듯이 오직 모르고 모를 뿐인 그 당처를 ~뭣고를 통해 근본 마음자리로 되돌려보는 것이 바로 회광반조(廻光返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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