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사형수 양동수 씨의 모친 故 김장순

1978년 12월 27일, 대구교도소 앞에서 사형수인 아들의 감형 소식을 듣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기뻐하는 양동수의 노모 김장순 보살(사진 왼쪽). 그는 안타깝게도 아들의 가석방 출소를 끝내 보지 못하고 1992년 타계했다.

 

아들 출소 못 보고 안타깝게 타계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고귀한 것이다. 그래서 그 모정이라는 것은 종종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해낸다. 나의 어머니가 그랬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그렇다. 이번에 이야기하고 싶은 인연의 주인공은 바로 ‘어머니’다. 1977년 사형수가 되었던 양동수의 노모 김장순 씨다.

1975년 12월 24일, 양동수(당시 26세) 씨는 크리스마스로 들뜬 기분에 친구들과 술을 마셨고, 취기가 오른 그는 변심한 여자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하지만 찾아간 여자 친구는 없고, 가정부가 자고 있었다. 양 씨는 순간적인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가정부를 추행하고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소식을 접한 양 씨의 노모 김장순 씨는 기가 막혔다.

아들 죄 자신의 죄로 받아들인 모정
진심과 정성이 상상못한 기적 만들어
법무장관, 대통령까지 마음 움직여
사형수에서 감형, 가석방으로 출소

1심 사형, 2심 사형, 대법원 상고 기각으로 1977년 2월 양 씨의 사형이 확정됐다. 김장순 씨의 길고도 눈물겨운 모정의 여정은 시작됐다. 청천벽력이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것이 자식 아닌가. 그런 아들이 그 끔찍한 죄를 저지르고 사형수가 된 것이다. 김장순 씨는 자식이 지은 죄와 그로 인한 희생자와 유족들의 아픔, 두 가지를 모두 떠안고 함께 겪기로 결심했다.

김장순 씨는 대구로 이감된 아들을 따라 진주서 대구로 이사했다. 그는 교도소 옆에 한 평 반, 월세 5천 원짜리 방을 얻었다. 아들을 매일 만나기 위해서였다. 아들의 죄가 바로 자신의 죄라고 생각한 김장순 씨는 아들을 매일 면회하면서 아들과 함께 옥살이를 한 것이다. 독실한 불자인 김장순 씨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새벽 3시에 일어나 인근에 있는 화장사를 찾아 예불을 올렸다.

“못난 어미가 먼저 눈 감을 때까지 제 아들의 목숨만은 꼭 지켜주십시오”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 예불을 마친 김장순 씨는 어김없이 아들을 만나기 위해 교도소로 달려갔다. 아직 살아있는 아들을 만나면 그는 그제야 작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렇게 김장순 씨는 3년을 살았다. 김장순 씨는 자신도 공범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병이 나도 약조차 먹지 않았다. 그리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들의 사형이 집행되면 내 손으로 화장할 겁니다. 꿀을 섞어 산에다 뿌릴 겁니다. 아들의 마지막 시신을 산짐승들에게라도 주어야 그나마 저와 제 아들의 죄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 날, 그로부터 그 말을 들은 나는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교화활동을 오랫동안 해왔지만 그때처럼 가슴이 먹먹한 적은 또 없었다. 내가 양 씨의 어머니를 알 게 된 것은 다른 사형수였던 방 씨 때문이었다. 나는 양 씨를 교화하기 전에 같은 사형수인 방 씨를 교화하고 있었다. 방 씨는 나에게 “저는 죽음으로 죄 값을 치르고 싶습니다. 제가 더 큰 죄를 지었으니, 저 보다는 양 씨를 위해 노력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양 씨의 어머니를 알 게 된 것이다. 김장순 씨의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과 또 피해자를 생각하는 마음을 하루하루 보면서 내 마음 역시 견딜 수가 없었다. 양 씨의 죄를 어쩔 수는 없지만 한 어머니의 애틋한 마음이라도 알려 그의 말대로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형 집행을 미룰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었다. 나는 서명운동을 벌였고, 1만여 명이 서명한 탄원서를 들고 법무장관을 찾았다. 당시 이선중 장관은 처음엔 당치 않는 소리라고 외면했지만 양 씨 어머니의 눈물겨운 사연을 들려주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모두 누군가의 어머니이고 그들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장관의 마음이 움직이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이 눈물겨운 사연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78년 12월 27일, 양 씨는 무기수로 감형된다. 그때의 기쁨은 말로 다 형언 할 수 없다. 양 씨의 노모가 만세를 부르며 얼싸안고 울던 모습은 지금도 진한 감동으로 어제 일 같이 생생하다. 출가자의 몸이기 이전에 사바의 같은 중생으로서 많은 것을 배웠다.

아들을 구사일생으로 살려낸 노모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아들의 죄 값을 함께 치르겠다던 그였다. 그래서였을까. 김장순 씨는 얼마 후 백내장에 걸려 앞을 보지 못하게 됐다. 여러 해 병마와 싸우던 양 씨의 어머니 김장순 씨는 결국 1992년 고단한 생을 마감했다.

1996년, 양 씨는 사형수로 확정된 지 21년 만에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그리고 출소와는 상관없이 늘 죄인으로 속죄하면서 살겠다고 했다. 결국 김장순 씨는 아들의 석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양 씨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교도소 안에서 법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양 씨는 출소 후 법사로 살면서 어려운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등 많은 이타행으로 속죄하는 삶을 살고 있다. 비록 한 순간의 어긋남으로 여러 사람이 슬픔에 들었지만, 또한 한 사람의 헌신으로 인해 삶의 소중함이 더욱 고결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법은 매 순간 우리 곁에 있었다.

 

정리=박재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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