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영 대목장(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우리건축의 살아 있는 대들보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현재 3명뿐인 대목장 중 한 사람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한옥 중 전통사찰건축 독보적
60여 년 간 수 백 채 불사

16세에 김덕희 문하에서 입문
상원사 출가 탄허 스님 시봉도
죽을 각오로 대패 들어
할아버지 아버지도 목수
“봉정사 극락전·한마음선원 불사
가장 보람 있고 기억에 남는 불사”

최기영 대목장은… 1945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1961년 김덕희 문하에서 목수에 입문했다. 1977년 문화재청 지정 문화재수리기능자 목공 407호로 인정됐으며, 200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으로 지정됐다. 2008년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전수교육관 관장을 맡고 있으며,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2016년부터는 전북대학교 석좌교수를 맡고 있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 해체 보수, 영주 부석사 설법전, 한마음선원 부산 지원 대웅보전 등 수 백 채에 달하는 당우들을 되살리거나 새로 지었으며, 2004년 옥관문화훈장, 2006년 장한 한국인무궁화상, 2010년 은관문화훈장 등 다수 수상했다.

‘집’이란 각자의 삶을 축적해가는 중요한 공간이다. 그래서 집을 짓는 일은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신성한 일이며 중요한 일이다. 60년 가까이 우리 전통건축을 전승하고 있는 이가 있다. 철근과 콘크리트로 지은 현대식 공법의 건물들이 대세인 오늘날, 나무를 손수 다듬고 기와를 얹어 집을 짓는 일이 여전히 가치 있는 일임을 확신하며 우리건축을 잇고 있는 목수, 최기영 대목장이다.

대목장 최기영
200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으로 지정된 최 대목장은 현재 3명뿐인 대목장 중 한 사람이다. 우리 전통 건축의 살아있는 ‘계보’다. 대목장이란 궁궐, 사찰 등 전통건축의 설계와 시공, 감리 등 건축 전반의 과정과 결과를 관리하고 책임지는 목수를 말한다. 그는 일반적인 대목장의 표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목, 미장, 기와, 단청, 창호 등 한옥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대해 훤히 꿰고 있는 대목장 중의 대목장이다.

“내가 모든 것을 다 해보고 제대로 알아야 남이 하는 것을 관리하고 감독할 수 있죠. 그래야 대목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최 대목장은 목조건축 중에서도 전통사찰 부분에서 독보적이다. 평생을 사찰 건축에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불사가 없을 정도로 역사적, 국가적 차원의 대형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쳤다. 상원사, 월정사, 낙산사, 수덕사, 한마음선원 등 주요 사찰의 대웅전이나 부속 당우들이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됐으며, 남한산성 수어장대와 충남 부여에 조성된 백제문화단지 사업도 그의 손을 거쳤다.

최 대목장은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전통건축기법을 통해 옛 건축물을 복원하고 창의성을 발휘해 건축의 아름다움을 재창조했다는 점이 등재의 이유다. 하지만 최 대목장은 아직도 새롭게 배우는 것들이 많다며 자신을 가리키는 수식어들을 어색해한다. 그리고 여전히 현장에서 대패를 잡는, 그는 천상 ‘목수’다. 그는 어떻게 목수가 되었으며, 그 많은 불사의 인연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일까.

삶으로의 첫 발, ‘출가’
최 대목장은 1945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년과 청년시절은 모든 것들이 부족하고 혼란스러운 시절이었다. 한 마디로 국민 대부분의 삶이 힘겨운 시절이었다. 최 대목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욱 힘겨웠다. 다섯 살 때 아버지마저 여읜 최 대목장은 먹고 사는 일이 그야말로 일대사였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궁여지책으로 그는 마을에 있는 서당을 다니며 한학을 익혔다. 다른 친구들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해 국어, 영어, 수학을 배우는 동안 그는 천자문과 명심보감, 소학, 논어, 맹자를 배웠다. 그는 산에서 나무를 하고, 들에서 꼴을 베면서 틈틈이 공부를 해야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부처님의 말씀대로 ‘연기(緣起)’였다. 최 대목장은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에 가지 못했지만 훗날 대목장이 되기까지 한학이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시절에 배운 한자와 한학이 그가 전통건축을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이다.

최 대목장이 열여섯 살 때였다. 시절은 이제 그를 더 이상 서당에 묶어두지 못했다. 그에게도 이제 삶은 그저 바라만 보고 생각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책임지고 해결해야 하는 절박한 본분이었다. 그는 무엇이든 해야 했다. 살기 위해서.

그는 어느 날, 서당의 훈장 큰 아들이 목수 일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때 들었던 이야기들 중에는 사찰 불사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는 목수보다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절들이 귀에 들어왔다. 출가하면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될 것만 같았다. 최 대목장은 무작정 이야기로만 들은 평창 상원사를 찾아 나섰다.

당시 상원사에는 당대 선지식이며 시대의 지성으로 불리던 탄허 스님이 계셨다. 탄허 스님이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던 그는 무작정 스님의 시봉 행자를 자청하며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았다. 출가의 위대한 뜻도 없었으며, 뜻 자체도 알지 못했던, 그야말로 ‘하루’를 살기 위한 출가였다. 어찌 보면 그의 출가는 힘겨움에서의 도피이기도 했으며, 삶으로의 위대한 첫 발이기도 했다. 그 출가로부터 목수 최기영의 삶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목수 김덕희를 만나다
최 대목장이 행자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상원사 노전채와 월정사 지장암 요사채 불사를 위해 목수들이 산문에 들어왔다. 그 중에는 최 대목장이 서당에서 함께 공부했던 훈장의 아들 김충일 씨가 있었다. 그들은 다시 만났다. 최 대목장은 상원사 행자였고, 김충일 씨는 목수였다. 최 대목장은 결과적으로 자신을 상원사로 이끌었던 김충일 씨를 다시 만나고보니 그 인연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느꼈고, 그가 하고 있는 ‘목수’라는 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삶이 다급하여 절에 들어온 최 대목장이었지만 김충일 씨를 통해 목수 일을 하루하루 들여다보게 된 최 대목장은 삶에 대한 생각이 조금 씩 바뀌기 시작했다. 행자보다는 목수가 더 나아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는 그 때 불교가 무엇인지도 몰랐고, 탄허 스님이 누군지도 몰랐어요. 머리를 깎으면 무슨 길이든 길이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고 그래서 출가했죠. 형뻘인 김충일 씨는 돈을 벌고 있었어요. 며칠 곰곰이 생각했죠. 그리고 결심했죠. 목수가 되겠다고. 그 역시 원대한 뜻과 의미가 있는, 그런 발심은 아니었어요. 그저 먹고살아야 하는 일대사 때문이었죠.”

그랬다. 최 대목장에겐 아직 ‘생계’라는 일대사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는 김충일 씨를 찾아갔다. 그리고 목수가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가 김충일 씨를 따라가 만난 사람은 다름 아닌 당대 최고의 목수였던 김덕희 선생과 그의 동생이자 제자였던 김중희 선생이었다.

전통 한옥건축에서 대목의 영역은 크게 두 갈래로 이어져왔다. 궁궐건축과 1600년 동안 이어져오며 우리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친 사찰건축이다. 김덕희 선생은 사찰건축의 계보를 잇는 당대 최고의 목수였다. 최 대목장은 김덕희 문하에서 목수로서의 첫 발을 띠게 된다.

 

목수를 천직으로, 천상 목수
60여 년 단 하루도 쉰 적 없어
불사하며 부처님 가르침 알게 돼
“불법 알아야 ‘법당’ 지을 수 있어”
출가 인연 법당 짓는 목수로 회향
황룡사 9층 목탑 복원 마지막 원
“불사는 내가 다시 살 집 짓는 것”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넘어
신참 최기영은 손재주가 좋았다. 눈썰미도 좋았다. 한 번 본 것으로 그의 손은 충분했다. 보면 보는 대로, 들으면 듣는 대로 그의 손이 모두 기억했다. 낯선 연장들도 금방 손에 붙었다. 당시 목수들에게는 매뉴얼이나 교과서는 물론 스승이 제자들을 따로 가르치는 일조차 거의 없었다. 쉴 틈 없이 일하는 중에 곁눈질로, 어깨너머로 주워들으며 스승의 비법을 익히는 것이 전부였다.

최기영은 밤이 되면 낮에 보고 들었던 것들을 달빛 아래 앉아 땅 바닥에 그리며 복습을 했다. 기둥도 그리고 서까래와 창호도 그리며 집을 지었다. 그렇게 최기영은 하루하루 목수가 되어갔다. 마치 목수가 천직인 사람인 것 같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신기한 일은 그저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그의 손엔 목수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도 목수였고, 아버지도 목수였다. 그는 훗날 어머니로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최기영의 손은 이미 나무와 가까운 손이었다. 하지만 그가 목수로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선친으로부터의 유전적 소질도 있었지만 그 무엇보다 살고자 하는 그의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목수 아니면 내가 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 일을 못해내면 나는 죽는다는 생각으로 했죠.”

그랬다. 그는 죽을 각오로 대패를 들었다. 이 세상에서 목수일 밖에는 없다는 생각으로 목수를 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할아버지를 넘고, 아버지를 넘어선 목수가 된 것이다. 결국 최기영의 불연은 산문의 삶이 아닌 사바의 삶으로 이어지는 연기였다.

하산, 목수 최기영 대목장의 길로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목수가 되었던 최기영은 어느덧 어엿한 목수가 되었고, 마침내 스승의 울타리를 나서야 했다. 힘겨웠던 시절을 지나 스승의 울타리를 벗어났지만 울타리 밖은 더욱 힘겨웠다. 아니 힘겨웠다기 보다는 어려웠다. 막상 김덕희의 제자가 아닌, 목수 최기영이라는 이름을 걸고 밖으로 나오고 보니 마치 광야에 홀로 선 듯, 어느 누구도 해결해줄 수 없는 의문들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한옥이 보여주는 진짜 한국의 미는 과연 무엇일까.”

최 대목장은 이제 먹고 살기 위해 대패를 잡는 목수가 아니었다. 정확한 설계에 의해 원칙대로 집을 짓는 서양 건축과 달리 우리 전통 건축은 도면으로 해결할 수 없는, 대목장의 감과 촉에 의존해야 하는 부분이 많다. 지붕의 높낮이나 처마의 미세한 곡선과 기울기, 서까래가 놓이는 각도 등은 터의 위치와 풍토, 집 주변의 자연환경과 조망 등을 두루 감안하여 대목장이 즉석에서 감과 촉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다. 결국 한옥 건축에 있어서 대목장은 모든 것을 책임지는, 그야말로 외로운 자리인 것이다. 대목장 자신이 도면이고 연장인 것이다. 이제 그는 신념이 필요한 목수, 확실한 기준을 가진 대목장의 길에 들어서야 했다.

이음새 하나가 천년을 간다
최 대목장은 현장이 거듭될수록 그 신념과 기준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정읍 내장사 명부전,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갑사 대웅전, 무위사 극락보전과 사천왕문, 순천 송광사 육감정, 양평 용문사 대웅전과 요사채, 영월 법흥사 무설전, 영주 부석사 설법전, 한마음선원 부산 지원 대웅보전 등 수 백 채에 달하는 당우들을 되살리거나 새로 지었다. 그 중 가장 힘들었고, 힘들었던 만큼 애정을 쏟았으며, 큰 보람을 느꼈던 것은 충남 부여에 조성한 백제문화단지 중 전통사찰건축과 현존 최고 목조건축물인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 해체보수 불사, 그리고 탄허 스님과 대행 스님으로 이어진 인연으로 짓게 된 음성과 부산의 한마음선원이다.

“고려시대 건축된 사찰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 양식을 내포하고 있는 봉정사 극락전 해체 보수 불사를 통해 나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우리 문화재의 소중한 비밀을 터득할 수 있었어요. 백제문화단지는 1994년부터 2010년까지 17년 동안 진행된 대규모 공사로 백제 특유의 하앙식 기법을 사용하여 사비궁과 위례성을 비롯해 국내 최초로 37.5미터 높이의 능사 5층 목탑을 조성했죠. 또한 한마음선원은 대행 스님에 대한 내 존경심을 담아 사찰 안의 어느 건물 하나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없었어요.”

그렇게 숱하게 많은 불사를 이어오면서 최 대목장이 얻은 신념과 기준은 단 하나였다. ‘이음새 하나가 천 년을 간다’는 것이었다. 바로 최기영 대목장이 짓고 싶고, 짓고 있는 ‘집’이다. 그것은 최 대목장이 여러 현장을 통해 우리 전통 건축에서 발견한 최고의 가치였다. 그는 그와 같은 선조들의 신념과 기준을 충실하게 잇고 있는 것이다.

“남들 잘 때 다 자면 결코 장인이 될 수 없는 것이여.”

최 대목장의 스승 김덕희 선생이 그에게 남긴 가르침이다. 그를 대목장으로 이끌어 준 소중한 가르침이다. 그는 단 한 줄의 그 가르침을 생각하며, 60년 가까이 단 하루도 쉬어 본 적이 없다.

건축가 최기영, 불제자 최기영
“많은 당우를 고치고, 짓고 하다 보니 대패질 하나도 시절과 함께 달라지더군요. 내가 목수가 되고 대목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불연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한 해 한 해 내가 지은 불사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불연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오랜 세월 지나 돌아보니, 내가 지었고 또 지어야 하는 건축물들이 거의 모두 부처님 모시는 집이었다는 생각이 진지하게 들기 시작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고나니 창호 하나, 기와 한 장 얹는 일이 또 한 번 새로워지기 시작했어요. 부처님 모시고 공부하는 집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짓는 집이 언젠가 내가 살게 될 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음 생에 말이죠. 그러니 천 년, 아니 그 이상 가는 집을 짓는 게 내 일이구나 생각했죠.”

최 대목장은 먹고 살기 위해 무작정 머리를 깎았지만 출가의 공덕을 온전히 회향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60년 가까이 절집을 지으면서 경전과 목탁 대신 대패와 망치를 들고 부처님 가까이 다가갔다. 법당의 기와가 쌓이는 만큼 그의 불교도 쌓여간 것이다. 부처님 말씀을 모르고 법당을 짓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지은 법당은 ‘법당’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원력이 있다면 황룡사 9층 목탑 되살리는 게 생애 마지막 꿈입니다.”

평생 목수로 살아온 최 대목장은 아직도 모르는 것이 있고, 알면 알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느낀다. 그는 선조들의 위대한 불사인 황룡사 목탑의 전설을 떠올리면 아직도 자신이 한 없이 작다고 했다. 그는 그 어떤 민족도 흉내 낼 수 없는, 우리 건축의 위대함이 깃들어 있는 황룡사 목탑을 재현함으로써 불연 속에서 살아온 시간을 회향하고 싶다고 했다.

나무 끝에 지은 새들의 둥지 하나도 허투루 지은 것이 없다. 최 대목장은 언젠가 자신이 다른 이름으로 돌아와 살지도 모르는, ‘집’을 짓고 있었다.

백제 문화단지 능사 5층목탑.

한마음선원 부산지원 대웅보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강화 보문사 극락보전과 명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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