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사형수 육근성

불법으로 교화, 형집행 날까지 참회기도
육근성 “제 딸이 저에겐 종교이자 신앙”
삼중 스님, 그의 초등생 딸 양녀로 삼아

“늦은 가을밤입니다. 감방의 가을은 냉기와 함께 찾아옵니다. 지장기도를 끝내고,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습니다. 사과 맛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 먹는 사과는 죽기 위해서 먹는 것일 뿐입니다. 갇혀 있는 몸, 갇혀 있는 곳에서 드리는 기도, 그러나 결말은 사형입니다.” -사형수 육근성의 <참회록> 중에서-

내가 사형수 육근성을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경이다. 육근성은 인물이 출중한 밤업소 가수였다. 그는 한 여인과 동거하며 딸 하나를 두었는데, 집안의 생계를 모두 책임져야 했던 육근성은 단칸방에서 부모님까지 모시고 살아야 할 만큼 형편이 좋지 못했다. 육근성의 아내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실을 비관해 오다가 딸을 낳고는 집을 나가버렸다.

어렵게 살아온 육근성은 사랑하는 아내마저 자신을 떠나가자 큰 충격과 함께 삶의 의지를 잃고 방황하게 된다. 여러 차례 어린 딸과의 동반자살을 결심하고 바닷가를 찾기도 했지만, 울고 있는 어린 딸의 얼굴을 바라보면 어린 아이가 무슨 죄인가 싶어 되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렇게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육근성은 설상가상으로 급성 맹장염에 걸린다. 하지만 수술비가 없었다. 육근성이 아픈 몸을 이끌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가 급전으로 2백만 원의 수술비를 간신히 마련했다. 육근성은 어머니 덕분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그 바람에 어머니는 빚을 지게 됐다. 당시 200만원은 육근성과 그의 어머니에겐 큰 돈이었으며, 급전이었기에 육근성의 마음은 무거웠다. 평소 어머니께 잘해 드린 것도 없는데 큰 빚까지 지게한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고, 어머니께 죄송스러웠다. 육근성은 다른 것은 몰라도 자신 때문에 어머니가 진 빚만은 어떡하든 해결해드리고 싶었다.

그러던 중 육근성은 교도소를 들락거리던 친구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듣게 된다. 그것은 돈을 대가로 한 ‘살인’이었다. 아내가 떠나가고 어머니께는 큰 짐만 안겨드린 채 희망 없이 살아가던 육근성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돈이 없어 아내가 떠나갔고, 돈이 없어 어머니를 빚쟁이로 만든 육근성이었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저 많은 돈만 벌 수 있다면, 돈을 벌어 어머니의 빚을 갚고 어머니와 딸을 행복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돈도 받지 못하고 살인만 저지른 채 사형수가 되었다. 처음부터 잘못된 길이었다.

나는 그를 서울구치소에 처음 만났다. 나를 만나자 그는 “스님, 저는 종교를 믿고 싶지 않습니다. 제 딸이 저에겐 신앙이자 종교입니다. 엄마가 도망가서 조부모 손에 크고 있는데, 이 아이를 어떡하면 좋을까요? 저는 우리 딸을 도와주시는 분이 생기면 그 분이 하라는 대로 모두 하겠습니다”며 딸에 대한 애타는 심경을 털어놨다.

그 당시 서울 자비사 주지로 있던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초등학교 1학년이던 육근성의 딸을 양녀로 삼았다. 호적에만 안 올렸을 뿐, 나는 그 아이를 친딸처럼 보살폈다. 그의 딸 역시 나를 ‘스님 아빠’라고 부르면서 잘 따랐다. 그 아이도 나의 마음이 보였는지,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도 그 아이는 불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육근성 역시 “스님의 큰 은혜 죽어서라도 갚고 싶다”며 불교에 귀의했다.

“용서받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도 저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좁은 감방 안의 공간일망정 빈틈없이 채워놓아야 합니다. 아직도 그 공간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이 감방 안으로 돌아오지 못할 때 어쩌면 비로소 이 공간은 채워질지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용서받을 수 있다면 그 후에나 가능할런지요.”

육근성은 안타깝게도 그의 딸이 초등학교 3학년 때인 2년 뒤 사형이 집행되어 세상을 떠났다. 육근성은 세상과 작별하는 그날 까지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살았다. 어떤 이유로도 그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지만, 한 인간의 고단한 삶을 함께 들여다봐주고 위로하는 일은 공업의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나는 그와의 약속대로 그의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대고 돌봐줬다. 그의 딸은 가끔씩 할머니와 내가 머물고 있는 자비사를 찾아왔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 내가 부담스러웠는지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았다. 아마도 그 아이는 지금 쯤 어엿한 숙녀로 성장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사형 집행 후 그의 어린 딸이 나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어보면 지금도 가슴이 저미어 온다.

“저의 아빠는 어디에 있을까요? 하늘에 별이 되어 반짝반짝 빛나며 저를 보고 있을까요? 저는 아빠가 원망스러웠어요. 저는 소원이 있었어요. 아빠와 함께 살며 그때 그 행복을 아빠와 함께 다시 만들어 보는 것이었어요. 시험 잘봐서 아빠 기쁘게 해드리려고 열심히 공부 했어요. 하지만 아빠가 그렇게 되실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제가 커서 스님 아빠께 보답하겠습니다. 몸 건강하시고 안녕히 계세요. 추신: 저는 저의 반에서 1등을 했고, 3학년 전체에서는 5등을 하였습니다.”

삼중 스님은 사형수 육 씨의 딸(사진 왼쪽)을 양녀로 삼고 고3때까지 친자식처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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