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상주 북장사·갑장사 도난 성보

〈상주지역 고적조사보고서〉에 수록된 상주 북장사 극락구품도(사진 왼쪽)와 개인 소장 극락구품도. 도난 이후 사립박물관을 거쳐 개인이 소유하게 됐다. 1969년 조사된 보고서를 통해 동일한 화기를 가진 것이 확인됐다.

우리나라 불교미술사에서 사찰과 문화재가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던 시기는 몽고 침입, 임진왜란,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해이다. 그 전쟁기간 중에 사찰에 봉안된 불교문화재들이 거의 파괴되거나 소실되었다. 몽고와 왜구의 침입에 항거하던 의승군(義僧軍)의 활동 거점지였던 사찰이 왜군들에게는 신앙의 성소가 아닌 저항군이 머무르는 곳으로 인식되면서 파괴되었고, 한국전쟁 중에는 정부를 반대한 세력들이 산에 들어가 저항군으로 활동하면서 은신처가 될 수 있는 대부분의 사찰을 국군이 직접 소각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결국 전쟁은 몇 백 년의 역사를 한 순간에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당시 호남, 관동, 경기 북부 등에 위치한 많은 사찰이 처절하게 파괴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전쟁이 끝나자 사찰에서는 중창불사를 일으켜 새로운 전각을 짓고, 그 안에 봉안할 불상, 불화, 범종 등을 조성하였다. 경북 상주의 사찰은 임진왜란으로 파괴되어 17세기 중반부터 중건을 시작한다. 1680년을 전후한 시기에 대웅전 불상 조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명산대찰이나 중소도시를 대표하는 사찰의 중건 연대보다 약간 늦은 편이다. 따라서 경북 상주는 사찰 내에 봉안된 석조문화재를 빼고, 대부분 17세기 후반 이후에 제작된 불교문화재가 많은 지역이다.

상주 사찰들, 전란 피했으나
1960대 이후 절도·도굴 표적
북장사 구품도·갑장사 관음상
대표적 상주 지역 도난 성보
도난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조사서 있어 행방 추적 가능

상주 지역 문화재들은 한국전쟁 기간에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1960년대 이후 수집가들의 소장품에 대한 수요가 조선후기 불교문화재로 확장되면서 도난과 도굴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특히, 대구에 많은 수집가들이 생기면서 큰 골동 시장이 형성되었고, 그들에게 유물을 훔쳐 제공하는 도굴범들이 활발하게 활동한 무대가 바로 상주 지역 사찰인 것이다.

이 지역에서 도난된 중요한 불교문화재는 갑장사의 금동관음보살좌상, 북장사의 극락구품도, 남장사의 고승진영, 신흥사의 영산회상도와 관음도 등이다. 그 가운데 갑장사 금동관음보살좌상과 북장사 극락구품도는 1969년에 정영호 교수가 이 지역의 사찰과 불교문화재를 조사한 〈상주지역 고적조사보고서(단국대 출판부 발행)〉를 통하여 구체적인 크기와 형태를 알 수 있다.

상주 지천동 연악산(淵岳山, 일명 甲長山)에 위치한 갑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상주에 위치한 대표적인 사찰 갑장사, 북장사, 남장사, 승장사를 사장사(四長寺)라고 하는데, 이 가운데 갑장사는 가장 으뜸이란 의미에서 사명(寺名)이 되었다고 한다.

갑장사는 1373년에 나옹혜근(懶翁惠勤) 스님이 창건하고, 임진왜란 이후 진묵일옥(震默一玉, 1562~1633) 스님이 중건한 후, 1797년(정조 21)에 연파(蓮坡) 스님이 중수하였다. 그러나 1985년 6월 15일 오후 6시 30분경 온돌 가열로 인하여 산신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과 내부에 봉안되어 있던 성보물이 소실되었고, 1988년 5월 8일에 법당을 중건하였다.

1985년 화재 이전 갑장사에 소장된 성보물을 알 수 있는 재산대장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과 1932년 12월에 조선총독부 관보에 실린 소장품목록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재산대장에는 금동관음보살상 1구, 미타도와 신중도 등 7점과 고승진영 8점이 적혀 있다. 1932년에 작성된 관보에는 높이가 1척 9촌(현재 57.5㎝)인 관음보살상 1점, 미타도와 고승진영 14점이 적혀 있어 1점의 불화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국립박물관 소장본 재산대장에 더 많은 성보물이 적혀 있다.

이를 통하여 20세기 전반 갑장사에 봉안되었던 성보물의 현황을 알 수 있지만, 다른 사찰에 비하여 많은 성보물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금동관음보살좌상의 도난 시점을 알 수 없고, 정영호 교수가 간행한 보고서와 최근 조계종에서 발간한 〈불교문화재 도난백서 증보판〉에는 관음보살상의 사진이 남아있다. 관음보살좌상은 이목구비가 작고 볼에 살이 오른 얼굴형으로, 미간 사이에 표현된 백호는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머리카락은 높게 틀어 올린 보계(寶?)와 동심원을 이루며 리본처럼 어깨에서 팔꿈치로 흘러내린 보발은 단정한 편이다. 보관은 양쪽으로 흩날리는 커다란 수식이 달려 있고, 투각된 보관의 중앙에 앉아있는 화불이 있다. 상단 부분이 7개의 산형(山形)으로 처리되었다. 전체적인 신체 비례는 상체가 길고, 하체는 낮고 길게 안정적인 편이다. 가슴에는 다섯 개의 수식이 달린 목걸이를 걸고 있다.

보살상이 입은 변형통견의 대의(大衣)는 목 부분에서 한 번 접혀 양팔을 따라 자연스럽게 내려오다가 손목 부분에서 한 번 접히고, 오른쪽 소맷자락은 배 부분의 옷자락 사이에 끼워져 자연스럽게 접혀 있다. 발목 부분에서 부드럽게 중첩된 대의자락은 팔(八)자형으로 무릎을 덮고 무릎 좌우에 영락이 장식되어 있다. 배 부분에는 승각기를 묶은 끈의 리본형으로 매듭지어 있다. 그리고 양 무릎에 소매자락이 흘러내리듯 표현되어 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가슴 앞에 들고 왼손은 복부 앞에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자세를 취하고, 양다리는 길상좌로 오른쪽 발은 왼쪽 다리 위에 올려 자연스럽게 앉아있다. 꺾긴 대의 자락과 함께 노출되어 있다.
갑장사 금동관음보살좌상과 대의자락, 영락의 표현, 보계와 보발, 보관 형태가 거의 유사한 금동관음보살좌상(높이 67.5㎝)이 현재 서울에 위치한 사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상주시 내서면 북장리 천주산에 위치한 북장사(北長寺, 일명 北丈寺)도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다. 이 사찰은 833년에 진감국사가 창건하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24년에 중건하였다. 1650년에 화재로 전각이 모두 소실되어 서묵 스님과 충운 스님이 중창했다. 그러나 1736년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장사의 연혁은 남아 있는 〈향승성책(연대 미상)〉과 〈상주 천주산 북장사 사적기(1646)〉에 기록되어 있다. 〈전우영건기〉에는 극락전을 비롯해 화장전·명부전·대향로전·궁현전·심검당·은현당·명월당·삼강실·원통전·육화당·명월당·적요당·백연당·향적전·황학루 등 그의 20여동의 전각이 세워지고, 법당마다 불상과 불화가 조성되었으며, 여덟 곳의 부속 암자가 있었다고 적혀있어 대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20세기 전반 북장사에 소장된 성보물을 알 수 있는 재산대장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과 1932년 12월에 조선총독부 관보에 실린 유물목록이 있다.

당시 불교조각은 아미타삼존상과 지장보살삼존상, 시왕상 등이 있고, 불화는 미타도, 신중도, 독성도, 산신도가 있다고 적혀 있다. 1932년에 작성된 관보에는 미타회탱은 가로 6척 4촌, 세로 6척 8촌으로 적혀 있어 가로 193.9㎝, 세로 206㎝인 거의 정사각형의 화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불화의 화기는 정영호 교수의 〈상주지역 고적조사보고서〉에 ‘건륭사십삼년무술(乾隆四十三年戊戌) 원월초오일금릉(元月初五日金陵) 서령황산직지사(西嶺黃山直指寺) 심적암극락세계(深寂庵極樂世界) 구품회정봉안우(九品會幀奉安于)’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극락구품도는 1788년에 경북 금릉 황(악)산 직지사 심적암에 봉안하기 위하여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금릉은 현재 김천시이고, 심적암은 대항면 황악산에 있던 직지사의 부속 암자로 현재 남아있지 않고 위치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직지사지(아세아문화사, 1980)〉의 〈금산 직지사 중기(1776)〉, 〈황악산직지사사적〉, 〈금산 황악산 직지사 사적비(1681)〉, 〈금산군 서(西) 황악산 직지사 대법당 중창기(1735)〉에 심적암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 불화가 언제 북장사로 이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화기를 가진 극락구품도가 사립박물관을 걸쳐 개인에게 들어갔다. 기존 불화의 화기를 살펴보면 “乾隆四十三秊戊戌 元月初五日金陵 西嶺黃山直指 深寂菴極樂殿 九品會幀奉安 … 良工 有誠 靜坦 守印 戒?幸活 普仁 若禪 戒仁 …”이라 동일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개인 소장 극락구품도의 규격은 180×192.5㎝이다.

정영호 교수의 보고서에 게재된 사진이 흑백이라서 접근에 한계가 있지만, 개인 소장 극락구품도와 비교해 보면 화면의 형태와 구성이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면의 상단 중심에는 아미타불과 그 밑으로 보살상이 배치되고, 결가부좌한 본존과 보살상은 둥근 두광과 신광을 두르고 있다. 그 옆으로 묘사된 전각과 여러 명의 여래와 보살이 무리지어 있고 그 아래 성중들이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극락구품도는 그다지 많이 제작되지 않은 불화로, 18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유성의 작품이라는 것을 개인 소장 극락구품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화면 구성과 여래와 보살의 배치구도는 1841년에 조성된 대구 동화사 염불암 극락구품도로 계승되었다.

상주 지역을 대표하는 사찰인 갑장사와 북장사에서 도난당한 불상과 불화는 1969년에 정영호 교수가 조사한 자료가 남아있어 도난 이후 행방 추적이 가능하다. 결국 도난 이전의 사진이 체계적으로 수집되고 공개된다면 현재 박물관이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불상과 불화들이 제작되거나 봉안되었던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1970년대 사찰을 조사한 연구자들이 촬영한 사진의 수집과 공개가 종단 차원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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