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반권위, 허상 타파 운동 전개

임제이어 덕산·단하 등장
덕산, 임제보다 수위 높아
단하, 불상 뗄감으로 태워
관념의 벽 부수기 위한 방편


‘임제할’ ‘덕산방‘ 중국천하를 평정하다

임제의현에 이어 두 번 째로 ‘반권위, 허상 타파 운동’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선 선승은 덕산선감(德山宣鑑, 782~865)이다. 그는 ‘덕산방’으로 유명한 선승으로 ‘임제할’과 함께 기봉(機鋒, 예리한 방법으로 선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의 쌍벽을 이루었다. 임제는 ‘할’로 덕산은 ’방‘으로 중국천하를 평정했다. 그는 상당하여 다음과 같이 법문했다.

“나의 여기에는 부처도 없고 법도 없다. 달마는 늙은 누린내 나는 오랑캐고, 십지보살은 똥통을 멘 놈들이고, 등각과 묘각은 파계한 범부고, 보리와 열반은 나귀를 묶는 흔한 말뚝에 불과하고, 12분교(경전)는 귀신들의 이름을 나열한 명부(名簿)이고 고름 닦는 종이이며, 부처란 늙은 오랑캐들의 밑 닦는 막대기(간시궐)이다(一日上堂云. 我這裡, 佛也無, 法也無. 達摩是個老?胡. 十地菩薩, 是擔糞漢. 等妙二覺, 是破戒凡夫, 菩提涅槃, 是繫驢獗. 十二分敎, 是點鬼簿, 拭瘡紙. 佛是老胡屎獗).”

선승다운 놀라운 기개이다.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기상이다. ‘경전’이라고 하는 것은 귀신들의 이름을 적은 명부(名簿)에 불과하고, ‘부처’라고 하는 것은 늙은 오랑캐들이 대변(똥)을 닦을 때 사용하는 막대기(간시궐)에 불과하고, ‘보리와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집집마다 나귀를 묶어 두는 흔한 말뚝에 불과하다니, 덕산의 법문 수위는 임제의 ‘살불살조’를 무색케 했다. 적어도 임제의현 보다는 ‘두세 수’ 위였다.

이 법문의 핵심은 ‘부처도 없고 법도 없다(佛也無, 法也無)’에 있다. ‘부처가 되겠다.’고 집착하는 불박(佛縛)과 ‘불법을 깨닫겠다.’고 집착하는 법박(法縛)에 구속되어서는 깨달을 수가 없다는 것이 이 법문의 메시지이다.

 

‘임제할’과 ‘덕산방’이 맞붙다

임제와 덕산은 세칭 ‘임제할,’ ‘덕산방’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당시 중국 선원총림에서는 기봉(機鋒, 예리한 언동으로 선을 보여줌)으로는 쌍벽을 이루는 선승이었다. 두 선승은 몰년(沒年)도 2년 차이(덕산 782-865년, 임제 867년) 밖에 나지 않는다. ‘임제할’과 ‘덕산방’이 맞붙으면 누가 이길까? ‘할’이 이길까? ‘방’이 이길까? 〈임제록〉에는 ‘방’과 ‘할’이 한바탕 맞붙은 법거량 장면이 나온다.

“임제가 덕산화상을 모시고 서 있었다. 덕산화상이 말했다. ‘오늘은 피곤하군’ 임제가 말했다. ‘이 노장이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소.’ 덕산이 곧바로 방망이로 쳤다. 그러자 임제는 덕산이 앉아 있는 의자를 밀어서 넘어뜨렸다. 덕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師侍立德山次. 山云. 今日困.師云. 這老漢寐語作什?. 山便打. 師?倒繩床. 山便休).”

이 장면은 덕산이 법문을 하기 위하여 법당에 올라갔고 마침 임제가 대중들과 함께 그를 모시고 법문을 들으려고 하는 참이었다. 그런데 “사(임제) 시립덕산차(師侍立德山次, 임제가 덕산을 모시고 서서 법문을 듣다)”를 본다면 임제보다는 덕산이 10세 이상은 위였다고 보여 진다. 덕산은 83세를 살았다.

그런데 난 데 없이 덕산이 오늘은 피곤해서 법문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와일드한 임제는 거침없이 “이 노장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하고 큰 소리 치자, 덕산은 그 유명한 ‘방’을 한방 휘둘렀다. 피곤하다는 덕산이 갑자기 방망이를 휘둘렀으니 본색(즉 底意저의)은 드러난 것이다. 임제가 그 때 바로 ‘할’을 했더라면 기막히는 장면이 연출되었을 텐데, 의자를 넘어뜨렸으니, 기대보다는 좀 싱겁게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덕산방’과 ‘임제할’이 맞붙었다면 각각 ‘방과 할’이 3-4회 정도는 오갔어야 드라마틱한데, 겨우 한 번 정도, 우리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단하천연, 목불을 쪼개서 불을 피우다

세 번 째로 ‘반권위 허상 타파 운동’에 나선 선승은 ‘단하소불(丹霞燒佛, 단하선사가 목불을 태우다)’로 유명한 단하천연(丹霞天然, 739-824)이다. 그의 이름은 멋있다. ‘붉은 저녁 놀/노을)[丹霞].’ 석두희천의 제자로 백장회해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선승이다. 그 계통들이 조동종이다.

그가 어느 날 운수행각(만행)을 하다가 낙양에 있는 혜림사(慧林寺) 객실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당시 낙양은 장안과 함께 양경(兩京, 수도가 두 개) 체제의 당나라 도읍이었다. 아마도 동안거 해제를 하자마자 만행을 떠났던 모양이다. 추운 겨울, 객실은 차가운 냉골이었다. 그는 대웅전에 올라가서 금색 목불(木佛)을 들어다가 도끼로 쪼개서 불을 피웠다. 불꽃이 한창 좋을 때 쯤 원주스님이 맨발로 쫓아 나왔다.

“이봐요, 객승! 불상을 쪼개서 불을 피우다니 미쳤소?”
이때 단하선사가 막대기로 재를 뒤지면서 말했다.
“목불을 다비(화장)해서 사리를 얻고자 해서입니다.”

원주스님이 다시 노발대발 말했다.
“정신이 나갔소. 목불인데 어떻게 사리가 나올 수 있겠소?”
“사리가 없다면 나무토막이지 어찌 부처라고 할 수 있겠소? 원주스님, 좌우 두 보처불(補處佛)도 마저 불 때 버립시다.”

그가 혜림사로 가서 목불을 쪼개서 불 피운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당시 낙양 일대는 많은 불교 종파와 사찰이 집중해 있었는데, 일년 내내 수륙제, 천도재 등 각종 행사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단하소불은 이에 대한 경종(警鐘)을 울려 주기 위한 의도된 행동이었다. 선불교가 율종 사찰로부터 독립하여 시주 단련을 하지 않고 울력으로 자급자족을 하고자 했던 이유도 당시 낙양 사찰들의 모습에 기인한다.

단하천연이 목불을 쪼개서 불을 땔 수 있는 행동의 사상적 바탕은 어디에 기인한 것일까? 그 사상적 정신적 뒷받침은 〈금강경〉, 〈화엄경〉, 〈유마경〉 등 대승경전에 바탕하고 있다. 그리고 문화적 뒷받침은 ‘중국문명의 자부심’ 즉 ‘중화주의’라고 할 수 있다.

‘단하소불(丹霞燒佛)’ 공안은 소설가 김동리의 ‘등신불’을 통해서 일찍부터 우리에게 알려진 문학작품이기도 하다. 필자는 15세 때 어느 스님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이 두근거린 적이 있어서 잊지 못한다.

그림, 강병호

 

“무엇이 부처입니까? 간시궐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참구하고 있는 화두 가운데 ‘간시궐,’ ‘마삼근’ ‘정전백수자’가 있다. 이를 보면 ‘반권위 허상 타파 주의’는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어떤 납자가 운문선사(864-949)에게 여쭈었다.

“선사, 무엇이 부처입니까(如何是佛)”

운문선사가 답했다.

“간시궐(乾屎獗·똥 치우는 마른 막대기).”

또 어떤 납자가 동산수초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如何是佛)”

동산이 대답했다.

“마삼근(麻三斤·삼 세근)”

어떤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정전백수자(마당 앞의 잣나무)”

여기서 부처는 박살나 버렸다.
‘간시궐(乾屎獗)’이란 ‘똥 치우는 마른 막대기’인데, 구체적으로는 선원 화장실에서 대변을 보고 난 다음 1차적으로 닦아 내는 과도(果刀) 칼처럼 생긴 대나무 조각이다. 그것을 측주(厠籌)·측궐(厠獗)이라고 한다. 사용 후 세척해서 말린 것을 ‘정주(淨籌)’ 또는 ‘간시궐(乾屎獗)’이라고 하고 사용한 것을 ‘촉주(觸籌)’라고 한다. 이걸로 1차 닦아 낸 뒤에 물로 세척한다.

조사선의 정신을 상징하는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인다)’ ‘가불매조(呵佛罵祖, 부처도 꾸짖고 조사도 꾸짖는다).’ ‘초불월조(超佛越祖, 부처도 뛰어 넘고 조사도 뛰어넘는다),’ 그리고 ‘단하소불’ 등은 모두 ‘부처라고 하는 속박[佛縛],’ ‘법이라고 하는 속박[法縛]’ 등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난 절대자유의 경지를 말한다.

그리고 간시궐, 마삼근, 정전백수자는 부처는 성스럽다는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본래면목을 직시하기 위한 것이다. 장막에 가려서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없고 환상을 갖고 있는 한 속박될 수밖에 없다. 먼 발치서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그날부터 상사병에 걸린다. 그런데 이따금씩 간혹 마주친다. 눈을 감아도 그 여인이 아른거려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공부도 싫고 돈도 싫다. 음식 맛도 없다. 그것이 미인의 속박[美縛]이다. 돈에 억매이면 돈박[金縛]이고, 명예에 사로잡히면 명박(名縛)이다.

살불살조, 간시궐 등 파격적인 선어들은 모두 다 부처나 조사에 대한 속박과 권위 부정을 통해서 절대적인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방편적인 언어들이다. 불(佛)과 조사에 대한 우상의 벽, 관념의 벽을 부수기 위한 이열치열(以熱治熱)의 방법일 뿐,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서 내 뱉은 말이 아님을 절대 독자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밖에 ‘즉심시불(卽心是佛, 마음이 곧 부처)’라든가,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있지 않다(心外無佛)’라든가, 또는 ‘지위 없는 참사람(無位眞人)’,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등도 모두 권위나 고정관념을 타파시키기 위한 방편적인 언어에 불과하다. 거기에 무슨 큰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과대 망상증에 걸리면 삼천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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