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주 무서울수록, 사찰 재정 투명화를

사찰의 재물은 정재(淨財)다. 세속의 어떤 재물보다 깨끗하게 모이고 깨끗하게 쓰이기 때문에 그렇다. 사찰의 정재는 신도들이 부정하지 않게 정성스럽게 모아서 보시한 재물이다. 그리고 그 정재는 부처님(佛)을 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널리 전하기 위하여, 그리고 승가(僧)를 위하여 사용되기에 삼보정재(三寶淨財)라고 한다. 불상을 만들거나 불전에 마지(摩旨)를 올리는 것은 부처님을 위해서 정재를 사용하는 것이다. 불서를 출간하고 보급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기 위하여 정재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님들의 일상생활과 승려복지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은 승가를 위하여 정재를 사용하는 것이다.

정재는 신도들이 소중하게 아껴 모은 재물을 보시한 시주물이기에 삼보를 위해서 사용하여야 하며, 그와 같이 사용하더라도 일체의 낭비가 없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 스님들은 ‘시주물의 무서움’을 가르치셨다.

성철 스님의 서릿발 가르침
“시주물, 독화살 받듯 피해야”
개인소유시 망실 위험 높아
공동 재화로 공심으로 써야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 스님은 사중(寺中)의 물건을 어찌나 아끼는지 구두쇠로 널리 알려질 정도였다. 심지어 공양간에 두고 써야 할 고춧가루, 깨소금, 참기름을 극락암 공양간에서는 구경할 수 없었다. 경봉 스님이 양념 통에 참기름 병까지 당신께서 일일이 간수하시며, “적게 써라”, “조금만 넣어라”, “한 방울만 쳐라”라고 노래를 부르듯 하신 것이다. 시주물로 들어온 것이니 쌀 한 톨, 고춧가루 하나, 배춧잎 한 장도 무서워할 줄 알아야 참된 수행자라는게 경봉 스님의 가르침이었다.

〈무소유〉로 널리 알려진 법정 스님과 그의 스승인 효봉 스님의 일화에서도 시주물에 대한 스님들의 엄중한 경계를 알 수 있다. 어느 날엔가 법정 스님이 설거지를 하는데 밥풀과 시래기를 흘렸다. 그런데 효봉 스님이 그것을 건져먹으며, “자신들이 장사해서 번 것도 아니고 신도들이 정성으로 시주한 것을 버리면 안 된다”고 크게 나무라셨고, 법정 스님은 스스로 참회의 시간을 가졌다. 밥 한 톨, 시래기 한 조각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지만, 그것을 신도의 정성 자체로 보고 귀히 여긴 것이다.

시주물의 엄중함에 대한 일화는 성철 스님과 그의 상좌인 원택 스님의 일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원택 스님이 백련암에서 공양주를 하던 시절, 신도가 연필이라도 사서 쓰시라고 하면서 시줏돈 500원을 두고 갔다. 그런데 그 순간 원택 스님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팁을 주었는데, 이제는 내가 팁을 받는 신세가 되었구나”라는 묘한 심정이 들었다. 이에 원주 스님에게 “어떤 보살이 팁 500원을 놓고 갔심더”라고 말하고 전해드렸다. 그리고 얼마 뒤 성철 스님이 원택 스님을 호출하였다.

“이놈아, 팁이란 말이 뭐꼬?”

“세속에서, 음식점 같은 데서 음식을 먹고 나면 감사하다는 뜻으로 음식을 먹고 나면 감사하다는 뜻으로 주는 잔돈을 팁이라고 합니다.”

“임마, 그런 게 팁이라는 거 몰라서 묻는 줄 아나, 이 쌍놈아!”

성철 스님의 꾸지람 속 가르침은 계속 된다.

“팁 받는 주제에 꼴좋다. 이놈아. 그 돈은 팁이 아니라 시줏돈이다. 시줏돈! 신도가 니한테 수고했다고 팁 준 것이 아니라, 스님이 도 닦는데 쓰라고 시주한 돈이란 말이다. 그걸 팁이라고 똑똑한 체하니 저거 언제 속물이 빠질란고. 허어 참!”

이렇게 시줏돈이 무엇인지를 매섭게 가르치신 후 그 용법을 또한 엄하게 말씀하셨다.

“절에 있으면 더러 신도들이 시주랍시고 너거들한테 돈을 주고 가는 모양인데. 그건 너거 개인 돈이 아니라 절에 들어온 시주물이데이. 그러니 원주에게 줘 공동으로 써야 하는 것인 기라. 그리고 시주물 받기를 독화살 피하듯 하라는 옛 스님의 간곡한 말씀이 있으니 앞으로 명심하고 살아야 한데이. 이놈 오늘 팁 받아서 니 주머니에 넣었다면 당장 내쫓았을 긴데….”

상좌에게 시주물이 무엇인지 시줏돈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일깨워주고자 하는 스승의 서릿발 같은 가르침이다.

시주물과 시줏돈, 즉 삼보정재에 얽힌 어른 스님들의 일화 속에서 정재가 신도의 정성이 어린 보시물이며, 그것은 삼보를 위하여 쓰여야 하는 공동의 재화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삼보정재의 성격을 망각하고 그것을 개인적으로 사용하거나 낭비 나아가 망실하는 사례들이 적지 않음도 부인할 수 없다. 삼보정재를 개인 소유로 하면 어떻게 망실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실례(實例)를 소개하여 경각심을 갖게 하고자 한다.

불교종단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친 모 스님이 있었다. 그런데 그 스님이 입적했을 때 삼보정재가 속가의 지인들에게 상속되면서 망실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스님은 수십억 원대에 달하는 사찰의 주지이자 사회복지법인의 이사장이었다. 그 사찰과 법인은 은사 스님과 신도들이 원력이 모인 삼보정재였다. 그 스님이 속한 종단은 삼보정재의 망실을 방지하고자, 승려 자신이 사망 시 개인명의 재산을 종단에 출연한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의무적으로 제출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당 스님은 사찰과 법인 등 삼보정재를 개인의 것으로 간주하고, 소속 종단에 재산 출연 유언장을 제출한 후 다시 ‘자신의 사망 시 모든 것을 속가의 특정 지인에게 양도한다’는 유언장을 작성해 공증까지 받아놓았다. 세속법상 유언장은 나중에 작성한 것이 효력을 발생하므로 종단에 제출한 이전의 유언장은 무효가 되고 삼보정재인 사찰과 법인은 속가 지인의 소유가 되어버렸다. 은사 스님과 신도들의 오랜 원력이 담긴 수십억 원의 삼보정재가 한 스님의 욕망의 대상으로 변질되면서 순식간에 망실되어버린 것이다.

눈 밝은 혹자는 사회복지법인은 해산하면 그 재산이 국고에 귀속되므로 개인이 소유하지는 못한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 생각이 틀린 것만은 아니다. 그런데 속가의 특정 지인이 그 사회복지법인의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불교계 이사들은 임기만료와 함께 물러나게 되었고 그 자리는 개신교계 인사들로 채워지고 있다. 개신교 인사들이 삼보를 위하여 정재를 사용할리는 없지 않는가. 비록 법인의 재산이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삼보정재가 망실된 것은 명백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삼보정재를 관리하여야 망실을 방지할 수 있는가? 이를 위한 가장 큰 과제는 사찰 재정의 투명화이다. 사찰 재정의 투명화란 사찰의 재정을 신도 혹은 일반에게 공개하여 그 용처가 삼보를 위하여 쓰이고 있는지를 확인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재정의 불투명은 소수의 구성원에게만 재정이 공개되고 구성원 다수 또는 외부에는 비공개하는 것으로써 부패를 초래할 여지가 많다. 그 재정이 정재라고 할지라도 그 수입과 지출의 내역을 주지 등 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신도 일반에게는 알리지 않는다면 역시 부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찰의 재정 운용이 사중의 스님뿐만 아니라 신도 대중에게 공개된다면, 삼보정재로서의 용처에 맞지 않는 지출은 상당 부분 감소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대부분 사찰의 재정은 신도는 배제한 채 주지 등 소수의 스님들에 의해서만 운용되고 있거나, 혹여 신도가 참여하더라도 형식적인 경우가 많다. 신도의 참여는 스님의 자의적 운영에 불편을 초래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재가신도가 사찰 운영, 특히 재정 운용에 참여하는 것은 승가의 반감을 유발할 여지가 상당 부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재가 승려 개인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삼보를 위하여 여법(如法)하게 쓰이기 위해서는 재가신도의 참여가 현실적으로 필요하다.

현재 한국불교의 주요 종단들은 사찰 재정 투명화를 위하여 〈사찰예산회계법〉, 〈사찰운영위원회법〉 등 종법령의 제·개정을 통한 제도 정비를 그 어느 때보다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사찰의 재정을 공개하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사찰운영위원회를 통해 신도들의 사찰 운영 참여를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이와 같은 사찰 재정의 공개와 사찰 운영의 신도 참여 보장은 사찰과 승가에 대한 신뢰를 증진시켜 사찰 재정이 확대되는 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하지만 종헌·종법 등의 제도는 아무리 잘 정비하더라도 법적 미비가 존재하기 마련이므로 삼보정재를 대하는 승가의 여법한 가치관 정립이 근본적 과제이자 방안이다. 공양이나 시주물을 독약이나 독화살처럼 생각하여 자신을 살피고 그 과보를 알아 함부로 받아쓰지 말 것을 권하는 옛 스님들의 말씀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故曰 道人 進食如進毒 受施如受箭 幣厚言甘 道人所畏
(고왈 도인 진식여진독 수시여수전 폐후언감 도인소외)

그러므로 말하기를 ‘도를 닦는 사람은 음식 먹기를 독약 먹듯이 하며, 시주 받기를 화살을 받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한다. 예물이 두텁거나 말이 달콤한 것은 도를 닦는 사람이 두려워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가귀감(禪家龜鑑)〉의 이 구절은 정재의 사용을 무섭게 경계하고 있다. 스님의 자의이든 신도의 권유이든, 비구는 신도의 신심과 원력이 정성스럽게 담긴 정재를 삼보가 아닌 개인의 욕구와 욕심을 위하여 써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승가 자신을 위해서 쓸지라도 수행에 필요한 최소한도로 아끼고 아껴서 사용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정재를 쓰는 것은 도과(道果)를 잃는 독약을 먹는 것이며 화살을 받는 것임을 항시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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