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금강경 제 3분

내 마음 속에는 우주의 이치를 막연히 알지 않고 구체적으로 알아 우리 생활에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는 천하의 공자님이나 아인슈타인이라도 미치치 못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네 마음 속에 누군가 낫다 혹은 누군가 못하다라고 비교 분석하는 분별심을 부처님께 바쳐야 한다. 네가 나에게 묻지 않아도 어떤 사람이 어두운 사람이며 어떤 사람이 밝은 사람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선지식께서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배고프거든 그 생각을 부처님께 바쳐라. 매우 졸리면 그 생각을 부처님께 바쳐라. 각종 근심 걱정을 하지 말고 당연히 부처님께 바쳐라. 왜냐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부처님께 바칠 때 아니됨이 사라져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모른다는 생각을 바칠 때 모를 것이 없어져 다 알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여 년 전 금강경 제 3분 대승정종분에 무슨 생각이든지 부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고 부처님께 바치면 다 된다, 다 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금강경 3분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응당 이렇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되나니 이른바 세상에 있는 온갖 중생인 난생, 태생, 습생, 화생, 유색, 무색, 유상, 무상, 비유상, 비무상을 내가 모두 제도하여 무여열반에 들도록 하리라 하라. 이와 같이 한량없고 가이없이 많은 중생을 다 제도하였다 하더라도 실로 제도 받은 중생이 없느니라.’

부처님은 다 되는 방법 다 아는 방법, 즉 부처가 되는 방법을 제시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전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였을 때 그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움은 물론 실천하여 부처님이 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의 내용을 잘 살펴보자. 알로 까는 중생(若卵生)의 이면의 뜻은 배신하는 마음이요, 태로 낳는 중생(若胎生)의 이면은 의지하는 마음이었다. 불립문자라(不立文字)는 말씀이 있듯 〈금강경〉을 이처럼 문자가 아닌 그 이면의 뜻으로 해석한다면 〈금강경〉 가르침은 이해가 어려운 가르침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고 실천 가능한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도 밝은 이가 보면, 배신하는 마음을 연습한 결과 새나 뱀 등은 알로 까는 보를 받게 되는 것이며, 의지하는 마음을 연습하면 태를 빌어나 낳는 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또 ‘我皆令入無餘涅槃 而滅度之’는 ‘이런 모든 중생심을 부처님 만들겠다고 하라’로 해석하여야 한다. 그러면 금강경 제 3분은 ‘그대들 마음속에 올라오는 생각들 중 가령 배반하는 마음, 배은망덕 하는 마음이 올라오거나 또 숨거나 피하고 싶은 생각(若濕生)이나, 잘난 척 하며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은 화생(化生) 등 이런 가지가지의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 모든 생각을 다 부처님께 바쳐라’로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처럼 올라오는 가지가지의 생각을 다 부처님께 바칠 때 실무중생득멸도자(實無衆生得滅度者)가 된다 하셨는데 이는 무슨 뜻이냐? ‘실무중생 득멸도자’란 즉 한 중생도 제도받은 자가 없게 된다는 말씀이다. 한 중생도 제도 받은 자가 없다는 것은 수많은 분별심을 부처님께 바치다보니 마음 밖에 존재하는 중생이 본래 없음을 알게 된다는 뜻도 되고, 마음속의 중생, 즉 배신하는 마음, 의지하는 마음, 숨는 마음 등(약난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등)의 분별심이 착각이요, 본래 없음을 깨닫게 된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부처님께서는 무슨 생각이든지 그 생각을 가지지 말고 부처님께 바쳐라 하신 것이었다. 무슨 생각이든지 부처님께 바침으로 중생들 마음속의 각종 중생심이 착각이요 본래 없음을 알게 된다면 가짜 나를 주인으로 섬기고 탕자로 살아 왔던 삶에서 벗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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