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마음은 우리의 본원이고 생명의 원천이다. 즉 일체 만법이 모두 다 이 마음에 있다는 말이다. 한 법도 만들어 지기 이전의 본래 마음은 모양도 없고 방위와 처소도 없지만, 인연 따라 온갖 작용을 베푼다.

마음 떠난 일체의 상(相)은 생멸 있고 무상한 것
업식 벗어나면 마음과 부처와 모든 중생이 무차별

‘미고삼계성(迷古三界城) 오고십방공(悟古十方空)’이라고 했다. 중생이 미(迷)하면 삼계가 성(城)이지만 깨치면 동서남북이 사라진 십방이 공(空)인 것이다. 상(相) 놀음에 젖어 있는 중생들은 이 말을 알아 듣기가 어렵다. 하지만 여기서 바로 계합이 돼야지, 생각으로 헤아리면 즉시 어긋난다. 진여자성의 마음자리를 무심 또는 공성이라 하는데 마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범부의 집착하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마음은 뿌리요 법은 티끌이니 마치 거울에 묻어있을 때의 흔적과 같다. 이것이 제거돼야 비로소 생사가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되고, 당당한 대도(大道)는 대단히 밝고 분명해 사람마다 본래 구족해 있고 원만히 이루어져 있지만, 다만 한 생각으로 인해 만 가지 모양을 나타낸다.

세간은 환화(幻化)이며 일체는 무상한 객진이다. 오직 태허공의 체만 있으니, 그 자리에는 형색과 소리를 두지 못하며 털끝만큼의 먼지도 세우지 못한다. 만약 부처님과 조사를 초월하고자 하면 모름지기 한 생각마다 공적(空寂)해야 한다. 우리의 식심(識心)으로 구분하는 것은 모두 전도몽상이고 ‘이 뭣고’로 관조(觀照)해 보면 ‘있다’ ‘없다‘를 떠난 진여실상의 반야지혜 자리이다.

마음 떠난 일체의 상(相)은 무자성의 연생법이어서 생멸이 있고, 무상한 것이다. 우리의 몸뚱이도 자성이 없고 허망한 것이어서 인연이 다하면 놓고 가는 것이고, 죄(罪) 또한 무자성이라서 부처님 당시 99명을 죽인 앙굴리마라도 참회하고 부처님 제자가 됐다. 〈화엄경, 입법계품〉에 선재동자가 구도 여행 중에 찾아가는 53선지식 중에 창녀 바수밀다도 선지식으로 나온다. 물론 중생의 욕망에 따라 몸을 나타내 제도한 보살의 화신이지만, 업식에서 벗어나면 마음과 부처와 모든 중생이 차별 없는 본래 부처인 것이다.

요견삼세제불마(要見三世諸佛麽)?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보고자 하는가?”

연하휘해갈(沿河休解渴) 파병막언기(把餠莫言饑)이라, 즉 “큰 강을 따라 내려가며 목마르다 하지 말고, 떡을 손에 쥐고 있으며 배고프다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모든 부처님이나 조사와 팔만사천 법문도 모두 반야바라밀을 의지해 밖으로 드러내 보인 것이니, 이 반야를 믿고 ‘이 뭣고’로 쓰는 것이 불행이며 대신통인 것이며, 오직 모르고 모를 뿐인 당처를 찾아가는 유일한 길이 ‘이 뭣고’인 것이다.

또한 반야의 반대가 무명인데, 중생의 생각으로 구분하는 식심을 ‘이뭣고’ 수행으로 반야지로 바꾸는 것을 망상을 여읜다고 한다. 우리가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 화날때 그 마음이 경계에 끌려가거나 따라 가지 말고 그 순간 알아차리고 바로 ‘이뭣고’ 하면 홍로일점설(紅爐一点雪)이란 말처럼, 붉은 화로에 눈 한 송이가 떨어져 녹아 버리듯 내 안의 용광로가 분별망심을 다 녹여 주며, 빌지 않아도 만사형통은 자동으로 이루어져 업장소멸 된다.

‘보리자성본래청정(菩提自性本來淸淨) 단용차심즉료성불(但用此心卽了成佛)’인 말처럼, 우리의 자성은 본래 청정하니 여의보주(如意寶珠)인 ‘이뭣고’를 생활속에서 굴려쓰면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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