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생활 속 수행

선지식이 계신 수행 장소란 일반 선방처럼 정갈하고 조용한 도량이 아니었다. 지저분한 쇠똥 치는 젖소 목장이었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목장의 일은 지저분하고 어렵고 위험하였다.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지저분하다는 판단이 참이 아닌 줄 알고 그 생각을 부처님께 바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 생각이 참이 아닌 줄 알고 그 생각을 부처님께 바쳐야 할 것이며,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 두려움이 참이 아닌 줄 알고 부처님께 드려야 할 것이다.

당시는 1일 2식, 하루에 두 끼를 먹고 쉴 사이 없이 일하니까 오후가 되면 상당히 배가 고팠다. 선생님 몰래 밖에 나가 빵이라도 사먹을까?

“배고픈 거 어떡하지요?”

예상되는 선지식의 대답을 뻔히 알면서 또 묻는다.

“배고픈 생각이 참이 아니니 그 배고프다는 생각을 부처님께 바쳐라.”

하루 종일 중노동에 가까운 일을 하며 잠드는 시간은 약 10시 다음날 새벽 3시에 일어나는 것은 잠패기인 나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잠이 쏟아져 괴롭다는 생각 역시 참이 아니니 착각인줄 알고 부처님께 바쳐라.”

올라오는 각종 본능을 정성껏 바치려고 하면 도저히 불가능할 본능이 신기하게도 조금씩 바쳐지며 배고픔이나 잠이 줄어드는 것이었다. 잠과 배고픔이 줄어들며 시끌시끌 끓어오르는 각종 생각들도 동시에 차츰 줄어 들었다. 마음이 점차 평화롭게 변하는 것이다.

이제 〈금강경〉 공부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공부법을 이제 잘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누구의 도움이 없어도 지도자가 없어도 혼자서도 충분히 공부할 수 있겠다. 간화선 수행자들도 어느 정도 공부가 되면 스승의 곁을 떠난다 하지 않았나? 나는 언제쯤 이 도량을 떠나서 홀로 서기 공부가 가능할 것인가?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목장의 소들에게 사료를 주고 있는 나 있는 곳으로 일부러 찾아오셨다. 스승없이 공부하는 것을 즐기며 며칠 동안이나 계속 선생님 방을 노크하지 않은 나에게 “매일 아침 법당에 들어 오거라”하는 말씀을 하시었다.

매일 아침 법문 시간은 선생님의 강의를 듣는 시간이 아니었다. 자신의 분별을 내놓는 시간이었다. 내놓은 자신의 각종 생각을 올바른 방향으로 유도해주시거나 잘못된 사고방식은 경우에 따라서는 경책을 하시어 해로운 분별심을 제거하게 하시는 시간인 것이었다.

“소젖 짜는 일이 간단지 않습니다. 젖짜는 방법이 젖짜기 어렵다는 생각을 부처님께 바침으로 다 해결이 됩니까?”

여쭐 말씀이 없었지만 매일 법당에 들어오라 하시어 억지로 여쭌 말씀이었다.

“소젖을 짜며 부지런히 젖짜기 어렵다는 생각을 자꾸 부처님께 바치거라. 부지런히 바치면 어렵다는 생각이 없어지고 일이 한층 수월해 질 것이다. 안된다는 생각을 부지런히 부지런히 바치면 안된다는 생각이 착각임을 알게 되어 사라지며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꾸어지는 것이다.”

불가능이 없다라는 말씀을 듣자 나의 질문꺼리는 계속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동양학문과 서양학문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동양학문이란 세상의 이치를 잘 아는 밝은이들이 직관으로 말씀해놓은 것을 공부하는 학문이요, 서양학문은 세상의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모르는 이치를 하나하나 더듬어 가면서 합리적으로 알도록 써놓은 학문인 것이다.”

지금은 구시대의 유물이요, 아무 실용성이 없는 것 같은 사서삼경을 말씀하신 공자님같은 옛 어른이 우주의 모든 이치를 잘 아는 밝은이의 말씀이라는 말에 다소 의문을 들었다.

“공자님을 위대한 성인으로 생각합니다만 그분이 우주의 이치를 잘 아는 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어리석은 질문 같습니다만 공자님은 불세출의 과학자라는 아인슈타인과 비교해서 우주의 이치를 잘 아는 밝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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