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是)는 언전대기(言前大機)인 반야지혜로서 일체만법을 들이고 내는 당처이며, 제불보살의 불모(佛母)로서 ‘이 뭣고’는 반야지혜를 살려 쓰는 대활구(大活口)이다.

호미 들고 밭메러 가는 것도 생사해탈 도리
생활 속 마음챙김이 모든 장애 벗어나게 해

시 속에는 부처님 암호밀령(暗號密令)이 다 들어 있고, 부처님의 지혜와 복덕이 구족(具足)되어 있고, 과거 억겁으로 부터 지어온 업장과 습기와 번뇌망상을 모두 녹여 주는 자가 발전소이며, 지혜광명이 천남(千萬)의 태양보다 더 밝게 항상 비춰준다. 또한 아프면 약사여래불이, 소원을 이루고자 하면 관세음보살이 자동적으로 되어준다.

‘이 뭣고’ 시심마(是甚麽)는 내가 누구이며, 참나를 찾는 수행이며, 시는 인과를 벗어난 인과불낙(因果不落)의 자리이다.

남악 회양선사가 육조 스님을 찾아갔을 때 육조 스님이 “시심마물임마래(是甚麽物恁麽來)”하고 물었다. 즉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고 물으니, 회양선사는 입이 딱 막혀 대답을 못하고, “이 물건이 무엇인고?” 즉 ‘이 뭣고’ 화두를 갖고 8년간 고행(苦行) 끝에 확철대오 하고 다시 찾아가 “설사일물즉부중(設似一物卽不中)”이라,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하니 육조 스님이 “도리어 수증할것이 있느냐?”하고 물었다. 회양선사가 “수증즉불무(修證卽不無) 오염즉불(汚染卽不)=닦고 증(證)하는 것이야 없지는 않습니다만 오염(汚染)될 수는 없습니다”고 했다.

즉 일여 평등의 진리를 차별심을 갖고 자타(自他), 고하(高下), 시비(是非)하는 것은 없습니다고 하여 인가(認可)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이 뭣고’ 화두가 유래된 것이다.

이후 대혜종고 스님에 이르러 간화선이 체계화 됐으며, 서장서 화두의 역할은 분별(分別) 망상(妄想)을 확실하게 때려잡는 무기(武器) 즉 청룡보검으로 간화선을 정의하였고, 좌선 만을 강조하지 않고 언제 어디에서나 화두를 놓치지 않을 것을 주문하였다.

한암 스님의 서신 중에도 “꼭 부처님 앞에서 참선해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무를 보거나 일을 하는 복잡한 가운데서 득력하는 것이 적정한 곳에서 좌선하는 것보다 10만배나 더 힘이 있는 것이다”고 하셨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강 선사께서도 “참선은 농사지으며 왜 못혀? 생활 참선을 해야 하는 것이지. 다 끊고 여의고 돌아와서 가만히 혼자 앉아서 이 뭣고만 하는 건 그건 쪼가리 참선이요, 절름바리 참선이요, 소승참선 이지, 대승참선이 아녀. 농부가 쟁기를 지고 논 갈러 가는 것도 생사 해탈의 도리요, 여인네가 호미 들고 밭 메러 가는 것도 생사해탈의 도리요, 숟가락 들고 밥 먹는 것도 생사 없는 해탈의 도리인데 일체가 무엇이 아닌 것이 있으리오. 뭐 아무것도 힘든 것도 없고 내 찾는 법이 그려. 그저 ‘이 뭣고’ 알수 없는 놈 하나면 그만이여. 밥 먹고 옷 입고 오고가는 소소영영한 주인공, 이것이 도대체 무슨 물건이냐? 알수 없거늘 제가 무슨 이치를 붙여서 죽이지 말고, 대답하려고 애쓰지 말고 알 수 없는 그 놈 하나를 갖고 비비고 나가라”고 하셨다.

간화선 ‘이 뭣고’ 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불자에게도 정치나 사업, 직장, 학업등 에서 막히는게 없게 해주고,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장애서 벗어나게 한다. 이것을 등지면 무엇을 하든 엎어지고 넘어지고 만다.

그때마다 ‘아이고’라는 자조와 한탄 대신 ‘이 뭣고’가 자동적으로 나오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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