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성스러움 구현한 ‘合一’의 금자탑

법주사 팔상전 내부의 사천주와 팔상도. 내부가 통으로 뚫린 통층식 구조로 성스러움을 표현했다.

법주사 두 축선과 세 상징적 성소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성(聖)과 속(俗)의 상반성의 합일에 대한 깊은 통찰력으로 저명하다.

엘리아데의 표현에 의하면 성스러운 종교적 공간은 ‘성스러움의 드러남’, 곧 ‘히에로파니(hierophany)’를 갖춤으로써 세속과 차별되는 신성을 갖는다고 보았다. 그런데 성스러운 공간 역시 세속의 지상에 구현한 것이다. 세속적이면서 성스러운 모순된 상반성의 합일로 나타난다. 성과 속의 변증법적 관계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종교건축은 어떤 방법과 형식을 통해 히에로파니의 표상을 갖출 수 있는가? 엘리아데는 종교건축이 히에로파니를 추구하는 방법론으로써 거리, 높이, 중심, 정형의 특성 등을 구사한다고 보았다.

화엄 교의와 미륵정토사상 공존
동양 삼국 통층식 구조 유일 목탑
추녀 인물상 하늘 떠받치는 역사

한국산사의 진입동선과 가람배치, 법당건축의 장엄세계를 살펴보면 엘리아데의 통찰을 수긍하게 된다. 산사의 청정한 숲길과 계곡의 물길은 영혼의 씻김과 함께 세속의 경계를 넘는 속리의 정화장치다.

일주문→ 금강문→ 해탈문을 거치는 과정, 곧 물리적 거리와 깊이가 심화될수록 중심성에 근접한다. 중심에선 특별한 형태의 높고도 웅장한 건축을 만난다. 종교적 태도에서, 혹은 심리적으로 성스러움의 의식이 최고조로 고양되어 법당건축은 히에로파니로 다가온다. 한국산사의 가람배치는 그 히에로파니를 중심으로 목적의식적인 유기체로 경영한 불보살세계의 만다라다.

법주사 가람은 두 개의 중심축선을 갖는다. 달리 말하면 각각의 히에로파니의 성소를 갖는다는 의미다. 남북방향의 수직 중심축선과 그에 직교하는 수평 동서방향의 축선이 그것이다. 수직축선은 관음봉을 주산으로 한 화엄종의 교의체계를 수용하고, 수평축선은 수정봉을 주산으로 한 법상종의 미륵정토사상을 수용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남북방향의 정점엔 대웅보전(실제로는 김제 금산사처럼 대적광전이다)이 있고, 동서방향의 정점엔 미륵대불과 용화보전이 있다. 용화보전은 현재 미륵대불 지하에 모셔 두었다.

수평과 수직 축선이 교차하는 가람의 중심에는 국내 유일의 목탑인 팔상전을 경영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러한 계획적인 축선은 흐트러져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수직축선만 뚜렷하다. 근대에 들어 미륵대불을 조성하면서 시선과 부지확보를 위해 축선 아래에 터를 잡고, 석등, 석연지, 희견보살상 등을 이 곳 저 곳으로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람경영의 위계에 있어 세 히에로파니는 뚜렷하다. 대웅보전과 미륵대불, 팔상전은 변함없이 법주사의 상징적 성소로 현현하고 있다.

법주사 전경. 팔상전과 미륵대불

8봉, 8대, 8석문, 팔상전

법주사의 장엄세계는 팔상전(捌相殿)에 집중적으로 현존한다. 팔상전은 법당이면서 국내 유일의 5층 목탑이다. 화순 쌍봉사에 3층 목탑이 있었지만 1984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오직 한 기만 남게 되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을 8개의 장면으로 나눠 그린 불화를 팔상도(八相圖)라 부른다. 팔상도를 봉안한 건물이 영산전, 혹은 팔상전이다. 법주사의 팔상전은 여덟 ‘八’이 아니라 나눌‘捌’을 사용해서 특별하다. 물론 여덟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범어사 팔상전에서도 그 같은 편액을 만날 수 있다. 목탑 내부 사천주(四天柱) 사방 벽면에 각 면마다 2폭씩 부처님 일대기를 담은 탱화를 모셨다. 팔상도를 일렬로 배치한 것이 아니라 목탑의 건축특성을 적절히 활용했다. 사천주 사방벽면 따라 동→남→서→북 순서의 시계방향으로 빙 둘러 모신 희귀한 사례를 연출한 것이다. 북쪽 벽면에는 쌍림열반상을 상징하는 와불을 봉안하고 있다. 팔상도의 배치 순서는 곧장 예배 동선이 된다. 부처님 계신 방향에 오른편 어깨를 두고 세 바퀴 도는 우요삼잡이 탑 내부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장치한 것이다. 그런데 법주사는 숫자 8과 대단히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속리산은 8봉(峰), 8대(臺), 8석문(石門)으로 표현되는 산이다. 그 산에 신라시대 8암자가 자리 잡고 있고, 연꽃 형국의 지형을 일컫는 ‘연화부수형’ 가람의 중심엔 팔상전이 있다. 중첩하는 8의 이미지는 궁극적으로 괴로움을 소멸하여 열반에 이르는 성스러운 길, 팔정도에 이어진다. 자연과 건축에서 8의 범주로 불교교의를 묵시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팔상전은 법주사 8의 범주를 구현한 강력한 구심점으로 일승법계 부동의 자리에 있다. 불국 만다라로 구현한 가람의 중심에 금속 상륜부로 장식한 금자탑으로 솟구친 것은 모든 강물이 바다로 가듯 일심으로 향한 귀의적 공간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사천주, 용으로 장엄한 수호신

팔상전은 기단부에서 금속 보주탑이 있는 상륜부에 이르기까지 22.7m에 이르는 5층 목탑이다. 층층이 짜 올린 적층식 구조가 아니라, 내부가 통으로 뚫린 통층식 구조다. 통층식 내부구조를 가진 목탑으로선 한, 중, 일 동양 삼국에서 유일하다. 단지 3층에 천정을 가설한 까닭에 3층 위로는 내부구조가 드러나지 않게 되어 있다. 1968~1969년 완전해체를 통한 보수공사 과정에서 심초석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탑의 성격이 명확해졌다.

탑의 구조를 살펴보면 판축으로 다진 바닥 한가운데 심초석을 놓고, 심초석에 탑의 중심 코어인 심주(心柱)를 5층 정상부까지 세웠다. 3개의 목재로 짜 올린 심주는 한 그루 전나무의 주간과 같이 모든 물리적 역학의 균형과 힘의 분산을 통제하는 건축구조의 중추에 해당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세상의 중심에 선 우주목이자, 불국토의 보주나무다. 왜냐하면 상륜부 금속보륜 찰주가 곧바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심심주에 근접한 네 모서리에는 4층 높이까지 이르는 4개의 기둥을 우뚝 솟게 했다. 이 네 기둥은 심주를 호위하는 사천왕 형상의 이미지를 빌려 ‘사천주(四天柱)’라 부르는 매우 특별한 기둥이다. 목탑 내부에 막상 들어서면 심주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사천주 사면을 심벽치기로 벽체를 쌓아 올렸기 때문이다. 대신 이 사천주들이 하늘로 치솟는 웅장한 위용을 볼 수 있다. 사천주 기둥마다 용틀임하며 힘차게 하늘로 승천하는 용을 장엄해서 심리적 위용을 배가하고 있다. 건축구조의 실용적 필요성을 수호신의 위상으로 전환시켜 종교적 교의와 성스러움으로 승화해 놓은 것이다. 그때 사천주는 곧 용으로 표현한 불국토의 사천왕에 다름 아니다.

팔상전 2층 추녀를 떠받치고 있는 각신

가구구조 뼈대의 유기체적 생명력

하늘로 솟구친 거대한 직육면체와 사천주는 수직 입방체의 힘과 확고부동한 중심성을 드러내는 데 대단히 유용해 보인다. 노출된 가구구조는 투박하다. 하지만 통층의 공간구조를 짜나가는 역학적 가구들은 공간을 주도면밀하게 해석하며 규칙적인 질서로 조화롭게 엮고 있다. 가구부재들의 짜임은 마치 인체의 뼈대처럼 대칭적이며 공간위상학적인 유기성이 돋보인다. 중층의 반복과 대칭의 패턴 속에서 광대무변의 우주공간을 떠올리게 한다. 고저장단의 리듬감을 갖춘 뼈대에는 힘과 에너지가 흐른다. 건축이 유기체로 살아있다.

팔상전 외부 1, 2층의 네 모퉁이 귀공포 구조는 건축에 신성과 생명력을 부여하는 데 얼마나 주의 깊은 공력을 기울였는지를 환기시켜 준다. 지붕 추녀의 하중을 받치는 포작을 용틀임하는 용의 역동성으로 기막히게 대체했다. 용의 몸통은 내부로부터 박차고 나와 중중의 ‘ㄹ’ 자로 힘차게 용틀임해서 붉은 보주를 취하고 있다. 역학적 가구구조를 예술적 미학으로, 종교장엄의 신성으로 끌어 올렸다. 2층의 귀공포에는 뿔 달린 사람 형상의 동물이 연잎을 딛고 앉아 지붕을 받들고 있는 특이한 장면을 조영해뒀다. 그 모티프는 강화도 전등사 대웅보전의 나부형상과 동일하다. 귀공포에서 추녀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인물상은 12세기 중국의 토목건축 책 〈영조법식〉에서 말한 ‘각신(角神)’에 다름 아니고, 고구려 벽화고분 삼실총 등에서 하늘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신령한 역사(力士)와 다르지 않다. 팔상전의 각신이 특별한 점은 입에 청룡을 물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기이한 장면이다.

또한 내부 가구부재에 입힌 석간주나 황토색 계열의 단청색채는 따스한 질감으로 가구부재를 육화하는 인상을 갖게 한다. 단청의 색채가 목재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팔상전에서 단청장엄은 3층 천정장엄에 역량을 쏟았다. 통층공간에 천정을 만듦으로써 새로운 내부공간의 감각을 조성하고, 공간에 신성함을 부여할 단청장엄의 화면도 새로이 마련하게 되었다. 3층 천정에 조영한 단청 소재는 용, 연꽃, 그리고 보상화 넝쿨문양으로 비교적 단순하다. 그런데 단청으로 장엄한 연꽃과 넝쿨은 더 이상 자연의 묘사가 아니다. 자연의 생태를 초월하여 관념적 이상으로 승화된 교의적인 장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연화의 한가운데 신라 와당에서 표현되던 길상의 고전문양을 베풀어 둔 까닭이다. 부처님께서 밝힌 법의 진리, 혹은 자비의 상징성으로 두루 빛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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