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는 과거 자기, 달구지는 현실 자기, 마부는 바로 마음!

촛불을 밝히고 천도재를 하는 이유

질문 선원에 걸려 있는 현수막에 새겨진 새해맞이 촛불재 안내 문구를 보고 의문이 생겼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내 안에 모든 것을 진실하게 맡기면 내 근본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선원에서는 매년 정월에 삼 일 동안 촛불재를 봉행합니다. 그리고 사시에는 조상님들을 위한 천도재를 하고 저녁에는 촛불을 밝힙니다. 내 근본 하나만 붙들고 가면 될 것 같은데 해년마다 촛불을 밝히고 천도재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정초에 삼 일 동안 촛불재를 하는데, 그 촛불을 밝히는 이유는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면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본래 아는 것이라면 아마 전자에 선조들이 그렇게 방편으로 많은 설법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게 여러 말씀 안 하고도 될 수 있었다면 부처라는 이름도 없었을 겁니다, 아마.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모든 것이 있는 겁니다. 염불도 있어야 했고 촛불재도 있어야 했고, 그 옛 법을 다 갖추어야 했던 겁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법도 예전 법도 둘이 아니게 우리는 항상 그걸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뜻과 의미를 알고 해야 합니다. 모르고 남이 하니까 그냥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보통 마음을 밝힌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래 마음이 밝혀져 있기 때문에 그 촛불을 들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마음이 밝아져 있지 않다면 촛불 자체를 들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밝다고 생각을 할 수도 없고 내 마음을 밝힌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의 근본도 마음의 근본이요, 태양의 근본도 마음의 근본입니다. 전체 근본 자체가 바로 마음의 근본이니까요. 우리가 부처를 이루려고 하는 것도 마음의 근본이라! 그 근본 성품에 의해서 우리는 무수히 이렇게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작용을 하면서도 자기가 부처인 줄 모르고 그 조그마한 마음의 촛불, 티끌만도 못한, 아니, 티끌이라고 보이지도 않는 그 마음 자체가 천차만별로 작용을 하고 있거든요. 그러니 얼마나 묘합니까.

그래서 조그마한 촛불이지만, 언제나 생활을 하든지 만남이 있든지 사랑을 하든지 회사에 나가든지 모든 것을, 먹는 거나 자는 거나 깨는 거나 또 만나는 거나, 모든 것을 자기한테로 돌릴 때 그때에 진짜 나를 만나기 위한 보림을 하는 겁니다. 또 만나고 난 뒤에 보림을 잘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잘해야 됩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그 촛불 하나가, 조그마한 촛불 하나가 이 우주를, 아니 우주 전 세계 삼라만상 대천세계에 다 닿기만 하면 몽탕몽탕 태워 버린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촛불재를 하면서, 저녁에 예불을 모시고 촛불재를 하면 그 촛불 하나가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집어삼킨다는 거를 아주 실감 나게 실천으로 옮기면서 내 모든 것을 불태우면서 나까지도 거기 더불어 같이 태우는 법이죠. 그렇게만 한다면 그 촛불 자체는 볼 수도 없고 쥘 수도 없고 바로 내가 가질 수도 없는 겁니다. 그러나 역력하게 이렇게 여러분이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항상 우리가 촛불재를 하더라도 그 촛불 하나가 우주 대천세계를 태울 수도 있다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고정되게 착을 두지 않으면서 흘러나오는 모든 생각을 나온 그 자리에 내려놓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되돌려 놓는 겁니다. 그런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또 공부를 할 수가 없으니까요. 생각을 했어도 놓고 돌아가는 겁니다. 여러분이 어디를 가려고 걸음을 걸었다면 뒷발자취가 없듯이 말입니다. 앞으로는 아직 떼 놓지 않았으니까 발자취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마음으로 밝힌 그 한마음 촛불 하나에 지금 현실, 이 순간 바로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그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는 걸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그 촛불 하나가, 조그마한 촛불 하나가
이 우주를, 아니 우주 전 세계 삼라만상 대천세계에 다 닿기만 하면
몽탕몽탕 태워 버린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순간순간 어떻게 살아야 정진인지요

질문 정진에 대해서 좀 여쭙겠습니다. 전에 큰스님께서 저녁 때 잠들기 전에 하루를 되돌아보고 반성을 하고 자야 된다고 그러셨습니다. 우리가 한 시간을 제대로 살면 하루를 제대로 살게 되겠는데 그러면 그때부터 반성하고 잠들어서 아침에 일어나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루를 어떻게, 순간순간을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우리 공부에 관련해서 정진이 되겠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답변 그냥 생활선법(生活禪法)이 아닐까요? 그냥 우리가 생활하면서 하되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모든 것을 그냥 내 주인이 그렇게 시키고 있고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그 주인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하라 이런 것이 참선입니다, 그냥. 그대로 참선이에요. 그런데 그게 두 가지 여건에서 세 가지 단계로 내가 얘기한 겁니다. 왜냐하면은 나를 발견을 못했으면 진짜 공부를 못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라면 저녁에 남이 다 자고 조용한 틈을 타서 한 30분이라도 앉아서 ‘이놈아, 네가 너 있다는 증명을 할 수 있는 거지 누가 증명을 해 주느냐?’ 이거죠. ‘당신이 있다는 것을 당신만이 증명을 해 줄 수 있는 거지 누가 증명해 주느냐?’ 이거야. 그것이 똑바로, 직속 들어가는 관법이거든요. 그게 바로 좌선도 되지만 그게 관법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를 발견 못했을 때 지극하게 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이죠. 그리고 살림하면서 살아가는 분들에 한해선 특히 더하고, 스님네들도 역시 그렇고요. 우리가 이 도리를 발견하려면요, 첫째는 다섯 가지 요소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그 다섯 가지의 문제라는 것은 인과성, 세균성, 영계성, 업보성, 유전성을 말하는데 그것이 다 거기서 나오고 빚어지는 거거든요. 뭐, 관습이라든가 습성이라든가 이런 것도 한번 굴려서 놓아야 떨어지죠. 거기에서 예전에 살던 그 습성이 나오면, 그냥 나오는 대로 생각하게 돼 있거든요. 나오는 대로 말하고 나오는 대로 하거든요. 그걸 한번 굴리지 못하고 그러니까 그 습성이 다 떨어지지 못하면 인정을 못해요. 하늘에서, 한울 중심에서 인정을 못한단 말입니다. 열쇠를 받지 못해요. 그걸 해인(海印)이라고도 하고 그러지만요.

그러니까 그 다섯 가지 요소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내가 나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 통 속에서 나오지 못합니다. 모든 인과의 습성, 인연들과 살던 그 습성을 그대로 그렇게 반영하고 자꾸 그대로 하지 말고 한번 굴려서 놓되, 그 마음이 분기해서 탁 나오더라도 안으로 상대방을 생각해라 이거야. 내 생각을 하지 말고, 언제나 내 생각으로써 나의 기준으로써 잣대를 삼지 말고, 한번 내가 상대방으로 들어가서 상대방이 돼 봐라 이거죠. 그러면 그 습성이 차차차차 없어지죠. 그리고 둥글어지고 둘로 보지 않게 되고, 그래야 빨리 그 몸통 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병을 선(禪)으로 고칠 수 있는지

질문 주인공에 진짜로 맡겨서 참선이 된다면 몸의 병도 고친다고 스님께서 설법하실 때마다 말씀하시는데요, 병도 세균에 의해서 생기는 병이 있고 또는 정신적으로 오는 병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근데 제 경우는 작년부터 당뇨병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선으로써 고칠 수 있는지 좀 말씀해 주십시오.

답변 이 병 문제라는 것은 여러분이 잘 모르시는 게 많아요. 병뿐만 아니라 전체 살림살이가 다 그렇습니다. 일체 만법이 다 그렇죠. 그런데 그게 원인이 어디서 오느냐는 얘깁니다. 이 원인은 지금 여러분 몸속에, 예를 들어서 간단히 방편으로 따져도 11억이라는 숫자가 나와요. 숫자가 아니라 숫자 없는 11억이라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11억이라는 게 어디서 왔나. 자기가 과거에 살던 인연들입니다. 악으로 했으면 악으로 지은 인연, 선으로 했으면 선으로 지은 인연들, 형제의 인연들 뭐, 모든 인연들이 착을 가지고 이렇게 살기 때문에 그대로 인연이 돼서 여기 여러분의 몸 하나가 된 겁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엄마나 아버지의 정자 난자가 있어서 뼈와 살을 빌려서 몸뚱이 하나를 부모한테 받았는데, 그 몸속에 있는 생명체, 그 의식들은 전부 자기의 인연으로 인해서 만난 뭉침이거든. 그러니까 내가 살다가 망하게 되는 것도 과거의 인연이 그렇게 하게 만들고, 악도 거기서 나오게 하고 선도 거기서 나오게 하고, 모든 게 한군데서 그냥 바깥으로 나고 들고 나고 드는 겁니다. 체가 없으니까. 마음에 정말 입자가 돼 가지곤 그냥 분자로 화해 가지고는 자꾸 나와서 나한테 귀인이 되게 만들지 않고 그냥 악인이 돼서 나를 망하게 만들고 있고 또 잘돼 나가는 거는 전자에 살다가 인연을 잘 지어서 선으로 이렇게 됐기 때문에 그런 인연이 있다면 또 그런 인연은 귀인을 만들어서 끌어오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병이 나게 하는 것도 공장마다 병이 나게 하는 수도 있고 간장 공장만 병나게 하는 수도 있고 방광 공장만 병나게 하는 수도 있고 그냥 전부, 대장 소장이니 식도니 뭐, 심장이니 콩팥이니…. 이런 것도 전부 공장과 같다 이겁니다, 오장육부가.

우리가 지금 마음공부 하는 사람이니까 마음을 잘 내면 꿈을 잘 못 꾸고도 ‘아, 이거는 잘될 꿈이다.’ 생각을 하면, 한생각 주인공한테 맡겨서 ‘아, 이거 잘되게 할 수 있다. 주인공만이 할 수 있다.’ 하고 맡길 수 있는 그 믿음, 그런 것이 들어가면 그것이 바로 이 속의 모든 의식들을 지배하거든, 전부! 마음이 그러면 두뇌로 올라가서 두뇌로 인해서 사대에 다 통신이 되는 거라. 의학적으로도 그렇고 인체적으로도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모든 걸 다루는, 병 다루는 그 지배인이 자기지만 다루지 않게끔 말을 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자기 자유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자유스럽게 할 놈의 거를, 자기가 자기 몸 다루는 것도 자유스럽게 생각을 못해요. 자길 믿질 않아. 지금도 “놔라! 놔라!” 응? 아니 “당신은 거기에 자꾸 말리지 말고 거기에 모든 것을 놓고 거기에 부드럽게 생각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그렇게 살아라!” 이러는데도 자기가 부드럽게 생각을 못하는 것은 자기가 자길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신경질이 나고 부아가 치미는데 그게 화탕지옥이다 이겁니다. 왜냐하면 딴 데서 화탕지옥을 갖다 주는 게 아니라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게 화탕지옥이에요. 근데 왜 내가 거기에 끄달리느냐 이거죠.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그런 원인도 거기에 있다 이겁니다.

내 지배인의 이 마음은, 그대로 마음내기 이전은 부처지만 이 속에서 수없이 일어나는 마음 분별은 바로 중생들의 마음이다 이겁니다. 그러니 중생들의 마음이 그렇게 이끌어서 분별심이 막 동할 때는 ‘어, 이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깐 거기서 해결할 수 있다.’ 하고 믿고 놔야 될 텐데, 하늘이 무너진들 어떻고 땅이 꺼진들 어떻습니까! 어차피 한 번 죽을 거, 죽기가 그렇게 원통합니까? “놔라! 놔라!” 해도 그걸 놓지 못하기 때문에 살지 못한다 이겁니다.

그거를 비유해서 한마디 하겠는데, 만약에 집안사람들이 심부름꾼을 두었다고 합시다. 여기 가게들 많이 하죠? 그러면 가게에서 심부름꾼을 두었는데 심부름을 시키려면 “이거 가지고 어디 가서 뭐뭐 뭐뭐 해 가지고 와!” 이렇게 해야만이 심부름꾼이 심부름을 해 올 텐데 그냥 “너 알아서 해!” 이렇게 한단 말이야. “알아서 해!” 그러면 뭐를 알아서 하라는지, 심부름을 영악하게 못한다 이 소리죠. 그러니까 운전수가 잘 끌고 다니고 잘 이끌어 갈 수 있는 생활이 필요하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병을 낫게 하는 데는 그저 무조건 자기 지배인, 즉 말하자면 주인공 그 자체를 믿고 맡겨 놓는다. 주인공이라는 것은 뭐냐. 영원한 생명의 근본과 마음을 낼 수 있는 분별과, 마음을 내면 육신이 움죽거리는 그 모든 그…. 사람들이 서로가 독불장군이 없이 돌아가는 거.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 할 수 있는 이 세상, 이런 거를 더불어 같이 이익하게 할 수 있는 마음을 낸다. 꿈을 꿔도 꿈을 잘못 꿨다 잘 꿨다 이런 거를 논의하지 말고, 이게 잘못될까 잘될까 생각을 하면 벌써 이게 잘못되게 나가는 수가 있어요. 그리고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잘못되는 겁니다. 그렇게 여기에 벌써 통신이 됐기 때문에.

그러니 자기네들 속에서 나오는 거 자기네들이 해결하라고 딱 맡기면, 자기네들이 ‘아, 이거 맡기는 놈이나 나 지금 하는 놈이나 다 같은 나구나. 내가 만약에 이렇게 맡기는 놈 죽인다면…. 바로 이 맡기는 놈이 바로 내 몸뚱이로구나. 나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자기 죽이는 법은 없거든요. 여러분이 자기 죽이려고 하는 분 없죠? 자기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 분도 없고. 그러니 그렇게들 해서 몸 건강하게 고치고 자기가 자력으로서 고쳐 나가면서 가정을 튼튼하게 해 나가면서, 또는 남도 한생각을 내서 건져 줄 수도 있고, 내가 건져 줬다고 으시대는 그런 마음 없이 말입니다. 그렇게 한번 지켜보면 그것이 바로 실험이 되고 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한 생명을 지웠습니다

질문 제가 한 생명을 지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후회가 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살생을 하면 천벌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다음 생에 큰 벌을 받게 되는지요? 제가 속죄할 수 있는 길이 있는지요? 부디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답변 그것도 여러 가지죠. 원인에 따라서, 어떻게 됐길래 낙태를 했느냐에 따라서 더하고 덜함의 죄가 있겠죠. 어쩔 수가 없어서, 남편의 배신으로 어쩔 수가 없어서 그렇게 하는 수도 있겠고요. 또는 여자가 배신을 했기에 그렇게 하는 수도 있겠고, 돈벌이를 해 가지고 어린애를 가지자 해서 낙태하는 수도 있습디다. 또 여자애를 많이 낳았기 때문에, 남자애가 영 생기지 않기 때문에 자꾸 낙태하는 수도 많고요. 여러 가지가지겠지요. 말로 어떻게 다 하리까.

우리 선원에도 산부인과 의사선생님들이 많이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그 낙태하는 숫자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그 낙태시키는 숫자를 생각해서 그만큼 정성을 들이려고 자꾸 그래요. 그래서 “네 마음의 그 영에다가 영을 만 개를 넣으면 몇 개가 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도 없다는 걸 알았으면 됐소!” 했습니다.

어떤 이가 예전에는 병원을 운영하는데 잘못돼서 크게 일이 벌어지고 하는 일이 한두 건이 아니었답니다. 그런데 이 마음공부를 하고부터 그런 일들이 다 없어졌다고 감사하다고 그럽디다. 그것은 왜냐하면 어떤 생명체가 이 세상에 태어나려고 할 때 70살이고 80살이고 딱 주어져서 이제 잉태가 됩니다. 그러는데 그냥 중간에서 탁 치워 버리니까 그 영혼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만약에 70살까지 살 나이라면 70살까지 허공에서 돌아야만 될 거 아닙니까, 그 기한까지? 이게 자연적인 법칙에 의해서 조금도 에누리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중간에서 그렇게 가로막히고 보니까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도리를 배워서 지극하게 근본과 둘 아니게 처리를 할 수 있는 사람에 한해서는 바로 그냥 자기가 돼 버리는 거죠. 그렇게 돼 버려도 두드러지지 않죠. 빗물이 바다로 수많은 방울이 들어간다 하더라도 두드러지지 않죠? 이 한 그릇의 물을 한 그릇의 물에다가 이렇게 부은들 그냥 한 그릇이죠. 그와 같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을 또 이 주인공에 의해서 줄을 놔서 내보낸단 말입니다, 좀 더 좋은 데로. 그렇게밖에 살 수 없어서 그렇게 악행스럽게, 그렇게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런 가정에 다시금 태어나지 말라 하고 지극하게 염원을 해 주는 거죠. 그러면 그대로예요.

나는 어떡하든지 여러분이 편리하고 마음을 훌훌 털고 살아갈 수 있는 조건으로 자꾸 얘기를 해 드리거든요. 뭐 안된다, 뭐 죄가 있어서, 너는 무슨 업이 있어서 못한다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모두 이 불바퀴에다가 그냥 갖다가 넣으면 타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즉 말하자면, 자력이라는 것은 자석이 큰 덩어리가 있으면 조그만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큰 데 갖다 붙으면 그냥 하나로 돼 버리고 말죠. 그와 같은 겁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참, 생각하기에 달려 있고, 그 생각하기에 달려 있기 때문에 생활이 윤택해질 수도 있고, 생활이 급박해질 수도 있고, 생활이 완화될 수도 있고 다복할 수도 있는가 하면 극치적으로 그냥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은 자유스러운데 왜 자유스럽게들 못하는지 좀 이해가 안 가는 점이 많습니다. 내가 이렇게 잘못을 했으니 나는 이제 큰 벌을 받는다고 마음을 옭아매어 놓고 안절부절하지 마시고, 내 안의 근본에 둘 아니게 하나로 결부를 시켜 버리고 이 마음공부를 열심히 하세요.

모든 것을 둘 아니게 돌릴 수 있는 그런 간절한 믿음도 없는데 내 행동만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한 조각 진실한 마음으로 통신할 수 있다면 그 생명도 당신과 둘 아니게 차원이 높아져서 더 좋은 곳에 임할 테니까요.

소와 달구지와 마부에 대해서

질문 『한마음 요전』에 보면 삼합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영원한 생명의 불씨와 육신과 마음, 그리고 내가 들어가고 나온 자리를 모르고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는 ‘소와 달구지, 마부, 즉 달구지를 탄 사람’의 비유와 흡사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깐 소와 달구지와 마부 삼합에 비유를 하셨습니다. 소와 달구지, 달구지와 달구지를 탄 사람, 달구지를 탄 사람과 소, 이 모두를 한 생명으로 묶어 보아야 옳은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아직 이해가 안되는 저 같은 사람도 알 수 있도록 가르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불씨는 우리 원소의 에너지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 불씨는 마음을 내게 할 수 있는 활동력이 있죠. 전자와 전자가 한데 합치면 불이 들어오듯이, 그렇게 불이 들어올 수 있게끔 하는 바탕이 바로 원소 자체의 에너지입니다. 그러면 그 에너지를 불씨라고 합시다. 불씨가 없으면 마음을 낼 수 없고 마음을 낼 수 없다면 육체가 움죽거리지 않는데, 어떻게 할 겁니까? 삼합이 동일하게 하나가 돼서 지금 움죽거리고 말을 하고 돌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바로 소를 타고 피리를 분다 이 소리나 똑같습니다. 지금 소를 타고 달구지를 끌고 다닙니다. 즉 말하자면 마부는 마음이요, 바로 육신은 달구지요, 소는 자기의 주인공, 바로 자기 조상입니다. 과거에 살던 자기, 현실에 사는 자기! 현실에 사는 자기는 달구지요, 과거에 살던 자기는 바로 소입니다. 그렇게 비유한 겁니다. 그래서 마부는 그 소를 쳐야지 달구지를 잘 끌고 가지 않느냐. 달구지에다가 모든 걸 다 실었는데 어떻게 달구지를 치느냐? 지금 기복으로 나가는 게 달구지를 치는 법이요, 바로 지금 마음법을 가르치는 게 소를 치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삼합이 같이 동일하게 지금 움죽거리고 가는 것을 바로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주인공, ‘나’이면서도 내가 공(空)해서 쉴 사이 없이 돌아가면서 화해서 돌아간다 이런 뜻으로써 주인공이란 얘기죠. 그러니까 소는 과거 자기, 달구지는 현실 자기, 마부는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으로써 그냥 무조건, 달구지가 깨지든지 말든지 그냥 치는 마음이냐, 잘 다스려서 잘 이끌어 가는 지혜로운 다스림이냐 이런 게 있죠. 마부는 마음이니 마음으로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서 달구지를 치느냐 소를 치느냐 하는 겁니다. 이 마음이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바깥으로 빌어야겠습니까? ‘네 뿌리가 네 나무를 돕지 어느 누구가 돕겠느냐.’ 하고 안으로 해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바깥으로 지금 찾아야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안으로 찾는 건 제 뿌리를 제가 찾는 것이요, 바깥으로 찾는 거는 남의 뿌리의 이름을 부르는 거나 똑같은 것입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