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조선족 최초의 사형수 전재천

2006년 5월 1일 전재천의 두 딸 결혼식 참석차 중국 장춘을 방문한 삼중 스님이 전씨의 부탁으로 큰 딸에게 결혼선물인 금목걸이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은 의사인 전재천의 큰딸. 가운데는 작고한 모친.

1996년 8월 2일 새벽 남태평양 사모아섬 부근 해상서 최악의 선상반란 사건이 발생했다. 어업기지로 회항하던 온두라스 국적 참치잡이 원양어선 ‘페스카마 15호’서 중국 동포 선원 6명이 열악한 작업 조건과 강제 하선에 반발해 한국인 선원 7명을 포함해 선원 11명을 무참히 살해했다.

이들 모두 1996년 1심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듬해 항소심서 주범인 전재천을 제외한 5명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았다. 주범인 전재천은 1997년 7월 사형이 확정됐다. 이런 전재천의 운명에 극적인 전기가 마련된다. 2008년 1월 1일 무기징역으로 특별사면된 것이다.

두 딸 합동 결혼식에 금목걸이 선물 원해
삼중 스님, 중국가 편지와 선물 대신 전달
대전교도소 수감중, 한중수형자 이송 신청

사실 전재천은 단순 선원이 아니라 2등 항해사로서 선상 지휘부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조선족 선원들이 선장을 죽이기 위해선 기관실 밖으로 끌어내야 되는데 자신들 힘으로는 할 수 없으니 항해사인 전재천을 설득했다. 그가 선장하고 친하니까 기관실 문을 열어 줄 것을 부탁했다. 선원들이 그를 앞세워 배를 장악한 것이다. 그래서 부산 해경에 붙잡혀서도 그는 반란 주모자로 지목돼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 받았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부산구치소였다. 당시 나는 서울구치소 교정위원이었지만, 부산 자비사 주지를 맡고 있어 부산에 주로 많이 있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이슈가 된 큰 사건이라 나는 전재천을 만나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산구치소에서는 종교위원이 아니어서 사형수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가 없었다. 만나보니 그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전재천은 나를 보자마자 말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장시간 통곡하는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웠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그런 엄청난 살인을 저질렀다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선해 보였다. 그는 중국서 고등학교 교사였다. 그런데 의대생인 큰딸의 학비를 교사 월급으로는 댈 엄두가 안 나 항해사가 된 것이다. 종교는 다르지만 그를 조금이라도 도와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따금씩 성금을 모아 전해 주면서 자주 그를 면회했다. 친해지니까 자주 편지도 보냈다. 그러던 2006년 2월 27일 돈 백만 원만 빌려달라는 편지가 왔다.

“늘 온정을 베풀어 주시는 삼중 스님께 기대는 것 같아 차마 말씀 드리기 어렵지만, 오랜 망설임끝에 말씀 올립니다. 오는 5월 1일 한날 한시에 제 고향인 중국 장춘서 저의 두딸이 합동 결혼식을 올립니다. 사형수인 제가 아버지로서 딸들에게 도리를 다하지 못한 자책감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비록 딸들 결혼식에 참석하지는 못하지만 제 생애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지금 딸들에게 못난 아비의 흔적이라도 남겨주고 싶은 바램뿐입니다…”

전재천에게는 딸 둘과 아들 하나가 있었다. 맏딸은 의사가, 둘째딸은 고교 교사가 됐다. 동시에 자매가 합동 결혼식을 하는데 돈 백만원으로 두 딸에게 금 목걸이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고 사형수이지만 아버지로서 선물을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마지막으로 부모 노릇을 하고 싶다는 그 마음을 전해듣고 나는 전재천의 이름을 새긴 금목걸이 두 개를 만들어 결혼식 전날 중국 장춘으로 날아갔다.

전재천의 모친은 나를 보자마자 아들 소식을 갖고 왔다고 나를 끌어안고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모친은 “스님, 저는 매일 교회에 나가 모든 분들에게 무릎 꿇고 절을 올립니다. 영영 사람을 볼수 없는 피해자와 가족 분들에게 더 속죄하고 더 기도합니다”라고 목멘 소리로 흐느끼듯 말했다. 두 딸의 합동결혼식에 전재천 대신 참석한 나는 약속대로 옥중 어버지의 애절한 마음이 담긴 금 목걸이를 전하고 내빈들께 그가 쓴 인사 편지를 읽었다. 식이 끝난 피로연 자리에 많은 이들이 함께 했다. 일가 친천은 물론 동네이웃, 전재천의 과거 제자들까지. 그들은 나를 에워싸며 이구동성으로 “전재천은 사람을 절대 죽일 사람이 아니라고, 제발 구명 운동을 통해 우리 품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애원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나는 개신교계와 함께 각 기관에 탄원서를 올리고 적극적인 구명 운동에 나섰다. 지성이면 감천이었든지, 전재천은 2년 뒤인 2008년 무기수로 감형됐다.

전재천은 지금 대전교도소에 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또 속죄하며 종교는 다르지만 매일 간절히 참회의 기도를 한다. 지난해 면회 갔을때 그는 마지막 소원을 나에게 피력했다. “삼중 스님 2008년부터 한중수형자 이송조약이 체결됐습니다. 저도 5년전부터 신청을 계속 하고 있는데 번번이 거절 당했습니다. 염치 없고 그들 볼 낯이 없지만 가족과 일가친척이 있는 고향의 형무소에서 평생 속죄하며 살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비록 돌아가셨지만 자식들만이라도 자주 보며 못다한 애비 노릇을 조금이나마 이 세상 떠날때까지 하고 싶습니다”라고.

나는 매일 부처님 전에 발원한다. 중죄인이지만 그의 바램대로 중국으로 돌아가 남은 업장을 소멸 하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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