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비선이란 무엇인가? - 2) 깨달음 가는 地圖 명상 ②

地圖 명상하기 실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의 지도(地圖) 명상’은 출발과 과정과 목적지에 이르는 길을 쭉 보여주며 본래의 면목을 깨닫게 하는 깨달음의 지도(수행의 지도)이다. 깨달음의 지도는 명상의 동기를 가지게 하고 마음의 잠재력을 이끌어내어 각 개인의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는 하나의 용광로와 같다. 용광로는 무명이 섞인 광석을 녹여 마음순금(청정심·심광명)을 추출해낸다.

명상 출발지부터 목적지까지
흐름 먼저 그려 잠재력 본다
시뮬레이션으로 길 바라보고
두려운 마음 멈추게 해보자

각 개인에게 잠재되어 있는 무한 가능성의 마음에 자극을 주어 모든 존재와 모든 것의 근원인 심광명(心光明)으로 돌아가게 영향을 준다. 심광명은 삶과 죽음의 괴로움을 일으키는 무지와 번뇌를 소멸하여 생사가 없는 영생의 지혜를 얻고 생로병사 하는 삶 그대로 영생임을 깨치게 한다. 그래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의 지도 명상’은 밖에서 안으로, 형상에서 무형상으로, 현상에서 본성으로 들어가게 하는 길이며, 이 지도를 보고 우리는 (수행의)결의를 다지고 명상할 수 있게 된다.

깨달음의 지도는 깨달음 속에 있으면서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뜻이 들어있다. 즉 수행자가 깨치고 나면 원래 깨달을 것이 없었음을 알게 되며, 진리를 추구하지만 진리 아닌 것이 없어서 원래 진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수행하게 되면 바른 수행의 길에서 어긋날 수 있다. 깨달음은 무명의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기 전에는 그 꿈속의 일이 사실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깨달음의 지도를 알고 수행하면 꿈을 꾸면서도 꿈속의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시작죽비를 3번 치고 좌종을 1번 친다.

반가부좌나 평좌 또는 의자에 앉아서 허리를 펴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어깨에 힘을 빼고 척추를 곧추 세운다. 눈은 반쯤 뜨고 시선을 코끝에 잠시 둔다(10초). 순간 집중의 명상이 조금 숙달되면 시선을 호흡에 둔다. 들숨과 날숨을 두세 차례 정도 지켜본다. 그렇게 하면 집중력이 증가한다.

좌종을 치는 이유는 좌종소리를 들으면서 시각화하여 사유하는데 시간을 재기 위해서다. 보통 좌종소리는 30초~1분 정도의 길이다. 그리고 좌종은 명상의 분위기를 잡아주며 잡념을 없애주는 효과도 있다. 그러나 좌종이 굳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며 초보일 때 명상언어로 길잡이 해줄 때 필요하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의 지도 명상’의 내용이 익으면 좌종은 없어도 된다. 그리고 ‘깨달음으로 가는 길의 지도 명상’은 글로 쓰면 길지만 명상 중에는 빠르게 시간이 지나간다. 우선 명상의 흐름을 다음과 같이 시뮬레이션 해보자.

사유하기와 시각화하기
①범부의 깨달음

◎ 좌종을 친다.

○ 부모의 보호아래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던 집을 버리고 어린 아이로 가출하여 여러 지방, 혹은 여러 나라를 헤매면서 온갖 고초를 당하는 것을 시각화한다. -중생과 부처의 마음이 차별이 없는 집을- 나가는 것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유하려는 욕망을 갖고 그 온갖 욕망이 흐르는 길을 따라 나서는 것을 의미한다. 무지와 탐욕과 분노를 표출하는 말과 생각과 감정으로 건립된 사회를 또는 다른 나라를 오가면서 욕망과 탐욕과 분노가 표출한 문화충돌과 환경오염, 테러 등의 온갖 괴로움의 현상을 본다. 계층 간의 차별과 성차별, 그리고 인종차별 등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삶을 조망해 보면서 불평등을 시각화해 본다. 그리고 남을 도와주지 않고 오직 자기의 이익이나 자기가 속한 단체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떠올려보고 자살과 우울, 분노조절장애 등으로 연일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 그리고 앞날이 보이지 않는 삼포세대 등 오늘날의 절벽사회도 되돌아본다.

온갖 욕망이 만들어낸 이런 사회현상은 ‘너는 너고 나는 나다’하는 생각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고 분리되어 있어 스스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 결과인 것이다. 이것은 꿈속에서 꿈인 줄 모르고 어렵고 괴로운 것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변하고 서로 상호의존 하는 것이며,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자성이 없다는 이치를 모르는 무지의 마음이 만들어낸 세상인 것이다. 우리 무지의 마음이 만든 꿈인 줄 모르는 것이다[不覺].

여기저기 떠돌면서 겪는 온갖 고통과 죽음이 두려워서 필사적으로 벗어나려고 노력하다보면 자기를 반성하고, 도덕성을 가지고 남들에게 베푸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천계에 태어나거나 아니면 인간계에라도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영생을 바라는 염원을 가지는 이것이 바로 범부의 깨달음임을 상기한다.

②어린아이 수준의 깨달음
◎ 좌종을 친다.

○ 지나친 욕망으로 인한 몸과 마음의 고통과 고뇌를 당하면서 생로병사의 현상을 보게 된다. 객지의 서러움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나 죽음의 두려움은 권력으로 막을 수 없고 재산으로도 막을 수 없으며 남녀의 단정한 아름다움으로도 막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어 안락하고 포근한 집을 떠올리고 떠난 집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한다. -생로병사를 일으키는 무명인 불각(不覺)을 없애고자하는 시각(始覺)이 일어난다.

○ 드디어 부모가 사는 자신의 집에 도착하지만 자기 집인 줄 모르고 지나친다. 지나가면서 집 안에 있는 고귀한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는 아버지와 눈이 마주친다. 아버지는 어릴 때 집나간 자식을 알아보지만 자식은 아버지를 못 알아보고 그냥 지나간다. -자기의 마음 본성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마음의 본성인 아버지는 본각(本覺)이며 자식은 시각(始覺)이다.

◎ 좌종을 친다.

○ 아버지는 사람을 보내어 자식을 집으로 데려오게 한다. -이제 본각의 집으로 오기 시작하는 시각의 모습이다. 이것은 범부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아 명상을 통해 모든 것은 변하고 상호의존하며 자성이 없다는 이치를 알게 하는 것이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하는 생각을 가지고 세상은 고정되고 분리되어 있어 스스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세상을 향해 이익을 추구하던 것이 생로병사 하는 세상의 꿈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즉 명상을 통하여 몸(身-苦諦)·느낌(受-集諦)·마음(心-滅諦)·현상(法-道諦)을 관찰하면 먼저 몸은 형태가 사라지므로 신체에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나라는 것은 환영과 같고 -몸의 껍질을 벗는다.

몸의 형태가 사라지고 느낌만 관찰되는 감각도 과거는 지나가서 없고 미래의 감각은 오지 않아 없으며 현재도 머물러 있지 않음에 머문다. 이는 일상생활에서 보이고 들리는 오감이 활동적이지 않게 되고 이때의 느낌은 꿈과 같음을 알게 된다. -감각의 껍질을 벗는다.

◎ 좌종을 친다.

다음은 느낌으로부터 일어나는 탐진치를 가진 마음들이(망념)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알아차려 없앤다. 망념과 알아차림이 같이 사라지면 마음은 빈 항아리와 같이 되어 마음도 허공과 같음을 관찰한다. 일어나도 일어난 곳이 없고 사라져도 사라짐이 없어 늘 자취 없음이 빈 항아리와 같이 무심상태로 들어간다. -번뇌의 껍질을 벗는다.

망념이 없어져 텅 비어 있는 현재만 경험하는데 이 텅 빔을 유지시키고 이 텅 빔에 익숙해질 때 텅 빔을 지켜보는 마음이 드러나면서 이 마음이 바로 명상의 대상이 된다. 이때 마음의 본성을 알게 된다. -무아와 공성이 드러난다.

첫째, 한 순간의 마음이 다음 순간에 남아 있지 않아 찰나임을 경험한다. 하지만 마음의 연속성은 없어지지 않아서 불연속의 연속이라는 마음의 특성을 알게 된다. 둘째는 ‘나’라는 것은 마음에 의존해서 명칭이 붙여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알게 되면 우리가 죽을 때 우리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줄일 수 있다. 셋째, 불연속의 연속성의 마음은 유도 무도 아닌 중도이며 무자성이다. 그래서 무조작(無造作)의 본래적인 마음상태에는 탐욕 등 부정적인 감정과 긍정적인 감정이 없다. 감정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생멸하지만 자성이 공한 마음의 본성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경험할 것이다. 넷째, 마음은 순간적이므로 생각도 일시적임을 알게 되어 번뇌를 없애고 열반을 실현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다섯째, 마음의 본성은 자아가 없어 무아이며 자성이 없어 공함을 알게 된다.

◎ 좌종을 친다.

마음의 본성이 무생무멸[空]임을 아는 지혜를 얻게 된다. -이 지혜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수용해야하는 마음의 작용과 버려야하는 마음의 작용을 알아서 무아와 공성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자아와 자성이 있어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꿈을 꾸다가 이것이 꿈인 줄 알고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지혜는 모든 것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상호 의존하여 자성이 공하며 평등하다는 자비의 지혜를 만나 일상생활에서는 끝없이 자비심을 베풀고 보리심을 키우게 된다. 안으로는 무분별 속에서 자아와 자성이 없다는 무아 공성의 지혜로 일행삼매가 일어나고 일행삼매 속에서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게 된다. 이제 무지의 긴 꿈속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 드디어 집 안으로 들어온다. 그 집은 본각의 집이며 자신의 내면이며 깨어있는 마음의 본성이다. 집안으로 들어옴은 깨달음을 의미한다. 즉, 일행삼매(공삼매) 속에서 공성의 지혜로 아공법공, 주객평등 중생과 부처가 평등하여 법계가 하나임을 깨닫고 법신을 성취하게 된다. 무명의 꿈으로 인하여 현실이 왜곡되어 꿈속에서 온갖 어려움과 고초를 겪고 있는 괴로움에 대하여 공성의 지혜로, 깨달음의 빛으로 삶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멈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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